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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이들에게 잊혀진 인권위는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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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이들에게 잊혀진 인권위는 필요없다"

[기자의 눈] '정치적 고려'는 인권위의 몫이 아니다

억울하단다. "무엇 때문에"라고 물었지만 소용이 없다. 그저 억울하단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에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 근처에서 행인들을 붙잡고 경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자세한 내막을 물었지만 억울하다는 말 외에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언론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기자 놈들은 믿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없는 사람들' 편이 아니긴 마찬가지라는 게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인권위를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출범 5년째, 인권위의 현 주소는?

인권위는 그런 곳이다. 출범 5년째를 맞은 인권위는 이제 억울한 사연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떠올리는 이름이 됐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전환자,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인권을 고려한 권고안을 내 왔고, 그때마다 거센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 속에서 인권위는 시장통 할머니에게까지 의지처로 각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도 조금은 높아졌을 게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지난 5년 간 인권위의 성적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런 성과는 2001년 11월 인권위 출범 당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에 비춰보면 두드러져 보인다.

인권위 출범 당시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은 '독립성 보장' 문제였다. 대통령이 위원장을 임명하는 국가기구인 인권위가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인권위의 목적 중 하나가 국가기구의 인권침해를 막는 것이었던 만큼 이런 우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인권단체들이 인권위 출범을 환영하면서도 참여를 망설였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인권위, 왜 대추리에 대해 침묵하나

한동안 잠잠하던 독립성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 5월 미군기지 이전 부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 대한 국방부의 강제철거 집행에서부터다. 당시 인권위는 폭력진압과 강제연행 과정에서의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인권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주민과 활동가들은 인권위 조사관이 와 있는지도 몰랐다며 불평을 토로했다. 당시 국방부가 실시한 행정대집행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와 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주민과 활동가들이 무리한 기대를 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당시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방부와 경찰의 인권침해에 대해 문제제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외국 군대가 머물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주민들을 두들겨 몰아내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년이 넘도록 기다려도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결국 지난 10월 31일 인권위 국정감사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은 당시 국감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논란이 되자 "남한에서 벌어진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인권위가 어떻게 북한 인권 운운하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인권위가 대추리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 발언이었다. 국방부의 강제철거 작전이 있던 날, 임 의원은 대추분교 옥상에서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지켜 봤다. 여당 국회의원조차 문제 삼는 일에 대해 왜 인권위는 입을 닫아 왔을까.
▲ 지난 5월 평택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당시 한 경찰(왼쪽)이 시위대를 향해 돌을 던지자 이를 목격한 국가인권위원회 직원이 제지를 했다. 이에 거칠게 항의하는 다른 경찰(오른쪽).ⓒ프레시안

기다렸던 권고안, 그러나 반쪽짜리

지난 17일 인권위는 대추리 문제에 대한 권고안을 냈다. 국감 이후 보름 남짓 지난 뒤였다. 기자들의 이목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권고안은 반쪽짜리였다. 경찰이 대추리 입구에 대한 출입통제와 불심검문을 중단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폭력진압, 강제연행, 구금 과정에서의 변호인 접견 금지 등 지난 5월 4일 대추리 현장에 있던 이들이 겪었던 인권 침해 사례에 관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은 인권침해가 아니라는 것일까. 인권위 측은 이런 문제에 대한 진정은 대부분 증거가 부족해서 기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인권위는 왜 국방부의 대추리 강제철거 현장에 조사관을 보냈던 것일까. 당시 조사관들이 확보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인권위는 "당시 '인권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관을 파견한 것은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며 빈집 철거 및 강제연행 도중의 인권침해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위해 조사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고 응답했다.

다른 국가기관과 한통속이 된 인권위는 필요 없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생색은…." 이날 인권위 브리핑에 참석한 기자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인권위 권고안을 접한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권고안이 너무 늦게 나왔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추리·도두리에 대한 출입통제와 불심검문이 시작된지 반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권고안이 나온 것은 인권위가 평소 강조해 온 인권침해 예방조치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잘못이라는 것이다. 박래군 평택범대위 언론담당자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한 구제는 다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데 국가인권위의 판단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인권운동사랑방 김정아 활동가는 "인권위는 진행 중인 정책에 대해서는 권고안을 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책추진 과정에서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한다면 언제라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미군기지 확대 이전에 대한 정책권고를 낼 것"을 인권위에 요구했다.

김 씨는 "대추리 문제의 경우 주민들의 인권이 전방위적으로 침해당하고 있어서 출입통제처럼 특정 문제만 따로 떼어 대응할 수 없다"며 "올해의 가장 첨예한 인권 사안에 대해 인권위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말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인권위 손길심 침해구제본부장은 17일 기자 브리핑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문제는 국방·외교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인권위가 의견을 내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방·외교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인권위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인과 행정부의 몫이다.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구가 되고자 노력했던 인권위가 담당할 몫은 따로 있다.

인권위의 역할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 김정아 활동가는 "국가에 의해 상처 입은 약한 개인의 편에서 인권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법적 구속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위가 끊임없이 권고안을 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 씨는 "인권위가 사기관이 아닌 국가기구로 출범한 것은 다른 국가기구들과 한통속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인권위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나라당의 집권이 아니다

2006년은 인권위 역사에서 우울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지난 7월 인권위 조사관의 금품수수 사건이 드러난 데 이어 9월에는 조영황 전 위원장이 내부갈등으로 갑자기 사퇴했다. 이런 사태를 겪으며 인권위 안팎에서는 내년 대선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위상이 축소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안경환 신임 위원장이 취임 직후 첫 단독 인터뷰를 〈조선일보〉와 진행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을 예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인권위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나라당의 집권이 아니다. 정말 걱정해야할 것은 따로 있다.

17일 인권위 권고안이 나오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권고안의 내용을 인쇄하여 손에 들고 대추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여전히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에게 권고안의 내용을 설명했다. 경찰은 활동가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지만 활동가들은 끈질기게 이야기했다. 이 장면을 본 주민들은 억울한 일을 겪을 때마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고향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매번 경찰의 검문을 거쳐 철조망을 지나야 하는 주민들. 그들의 머리에서 '인권위'라는 단어가 잊혀지는 순간, 그때 바로 인권위의 진정한 위기가 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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