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은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했다. 이런 용어를 쓰는 순간 졸지에 세금은 '사회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악에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감세 정책은 마치 각종 구호 및 복지 정책이 풍기는 것과 같은 선한 이미지를 띠게 된다. 그 결과 공화당의 감세 정책에 따른 복지 축소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빈민, 소수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서 화제가 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프레임(생각의 틀)에 따라 왜곡해서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프레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어'다. '세금 구제'와 같은 독특한 언어 사용 전략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힘을 발휘한다.
고교 평준화 지지하면 낡은 국가주의자?
그런데 한국 사회에도 이 책이 예로 든 '세금 구제'와 같은 표현들이 종종 쓰인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게다. 한국에서도 어떤 단어들을 특정한 뜻으로만 한정하여 사용함으로써 대중이 특정한 프레임에 길들여지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런 언어 사용 전략을 가장 능숙하게 구사하는 집단은 언론이다.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 사례 중 하나가 '고교 평준화'에 대한 보수 언론의 비판이다. 보수 언론은 종종 '획일적인 평준화 교육'이 학교의 자율성을 훼손하여 보다 다양한 교육이 이뤄지는 것을 막는다고 지적한다. '자율성', '다양성' 등의 긍정적 뉘앙스의 표현을 고교 평준화에 대치되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평준화가 '통제', '획일성'의 이미지를 띠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평준화 지지자들이 반대하는 것이 성적 중심의 '획일적인' 학교 서열화 체제라는 점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평준화 지지자들이 정작 걱정하는 것은 평준화 해체로 입시 경쟁이 가중될 경우 학생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돼 학생들의 '자율성', '다양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점인데, 이런 문제의식이 부각될 여지를 아예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 뉘앙스의 표현을 보수 언론이 선점한 데 따른 결과다.
이런 구도 속에서 섣부른 고교 평준화 해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졸지에 국가의 교육 통제를 지지하는 낡은 가치관을 가진 이가 돼 버린다. 하지만 평준화 지지자들이 반드시 국가의 교육통제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학력사회'에서 '학습사회'로…학교 밖 교육의 중요성
최근 교육부총리로 지명된 김신일 서울대 명예교수의 글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같은 구도는 그대로 반복됐다.
김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한국의 미래 교육 비전과 전략'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13쪽에 달하는 이 글은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이행에 따라 기존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 산업사회의 교육제도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라는 '한정된 시기'에 학교라는 '특정한 기관'에서 학생이라는 '선발된 대상'에게 국가와 교육자가 '선정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제도는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경제적으로는 산업국가의 교육 필요에 적합한 것이었다. 교육의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지위 분배를 고려하여 제한적으로 선발된 대상에게만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으므로 언제나 '입학 경쟁'이 치열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김 지정자는 기존의 교육제도에 기반한 사회를 '학력사회'라고 칭했다.
그런데 사회가 바뀌고 있다. 세계화, 정보혁명, 고용방식의 변화 등에 따른 것이다. '한정된 시기'에 '특정한 기관'에서 '선발된 대상'을 상대로 '선정한 내용'을 가르치는 방식이 효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건 간에 그때마다 필요한 내용을 평생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정규직의 증가로 대표되는 단기 고용방식이 일반화되고, 끊임없이 신기술이 쏟아지며, 세계를 상대로 활동할 것을 요구받는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다. 요컨대 평생학습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평준화는 다양화, 특성화의 걸림돌…그러나 학교 서열화는 안 돼
김 교수는 이런 변화에 맞춰 우리 사회가 학력사회 혹은 학교교육사회(schooling society)에서 학습 사회(learning society)로 이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학교를 다양한 교육조직과 학습장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직장을 포함한 다양한 장소에서 학습한 것을 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피교육자에게 타율적 학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변화한 사회에 어울리는 능력은 특정한 지식이나 기능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학습을 영위하고 관리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정보 기술의 적극적 활용, 외국 유학생의 유치와 제3세계 국가 대학에 대한 지원을 통한 '교육외교'의 강화 등을 주문했다.
이런 주장이 이어진 뒤 글의 말미에서 김 교수는 학력주의와 학벌 타파를 위해 다양한 능력인증제도를 도입할 것, 사회적 파트너십을 구축하여 교육제도의 지배구조를 민주화할 것 등과 함께 현행 고교 평준화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특성화된 교육기관을 육성해야 하는데 현행 평준화 제도가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보면 김 교수의 고교 평준화에 대한 비판은 과거의 명문고를 부활하는 형태의 평준화 해체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 교수가 주장한 학교의 역할을 상대화하자는 주장, 타율적 학습을 강요하지 말자는 주장은 오히려 과도한 입시 경쟁을 낳을 수 있는 명문고 부활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학교들의 수직적 서열화를 반대하면서 다양한 직업교육기관과 대안학교를 폭넓게 인정하는 수평적 다양화를 추구하는 쪽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김 교수의 이런 주장은 그가 주로 연구해 온 주제가 기존의 학교 제도 바깥에서 이뤄지는 '평생교육'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주로 연구해 온 내용에 비춰 봐도 기존 학교 간의 서열화를 고착화하는 형태의 평준화 해체론과는 거리가 있다.
언론의 엉뚱한 보도, 이유는?
하지만 김 교수가 5일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로 한 글의 내용을 보도한 언론 기사만 보면 이런 인식은 찾기 힘들다. 마치 보수언론이 주장해 온 평준화 해체론과 유사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김 교수의 글을 가장 충실하게 소개했다는 〈중앙일보〉 9월 4일자 기사를 보자. "평준화가 고교 획일화 조장 수월성·평등성 모두 죽었다"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김 교수의 글 말미에 실린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소개했다. 인용문 자체는 정확하다.
하지만 김 교수의 글이 학력사회 및 학교 중심의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 기사는 원래 글의 맥락에서 벗어난 엉뚱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됐다. 마치 김 교수가 보수 언론이 평소 취해 온 고교 평준화에 대한 입장과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 김 교수가 교육부총리로 지명된 직후 '원로 교육학자'라며 호의적으로 보도한 것과 맞물리면서 고교 평준화에 대한 보수 언론의 입장이 교육전문가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인 듯 비치는 효과까지 낳고 있다.
물론 〈중앙일보〉만 이런 방식으로 보도한 게 아니다. 거의 모든 매체가 이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어떤 매체들은 사설 등을 통해 김 교수가 고교 평준화 문제 등에 대해 자신의 교육적 소신을 굽히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 교수가 원래 주장한 내용은 이들 사설이 주장하는 바와 크게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서열화 아닌 다양성' 고민해야
앞에서 언급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내용이 힌트가 될 수 있다.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프레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했다.
보수 언론이 고교 평준화를 비판하면서 '다양성', '자율성' 등의 용어를 선점해버린 까닭에 이런 용어가 나오는 순간 자연스레 자신들의 주장과 같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과도한 교육 통제를 비판한 것과 고교 평준화 이전으로 돌아가 학교를 서열화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대단히 큰 간극이 있다.
서열화를 피하면서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 섣부른 편가르기가 아닌 차분한 토론을 통해 한국 교육이 풀어가야 할 숙제다. 그런 토론이 불가능하다면 한국 교육에는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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