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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동맹'을 상대로 우리도 공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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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동맹'을 상대로 우리도 공조해야 한다"

[아시아 인권 투어] <6> 인권 시대와 대테러 시대의 공존

또 하나의 관타나모, 그러나 훨씬 오래된 곳

지난 6월 10일 미군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3명의 수감자가 자살했다. 이미 지난 2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그 마지막 보고서에서 이 수용소가 국제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며 폐쇄를 주장하고 코피 아난 총장도 동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대테러 전쟁이라는 '대의'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자신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던 미국의 오만이 낳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9.11과 이라크 전쟁이라는 국제 사회의 핫이슈 속에서 관타나모는 세계 수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에 따라 일반인들에게 전해지는 정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오래 되었지만 거의 알려진 바 없는 '그들만의' 수용소가 아시아에, 그것도 동남아의 정치·경제를 선도하는 국가에 있다. 바로 말레이시아의 카문팅 수용소다.

카문팅 수용소를 지탱하는 법률은 1960년에 제정된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제정된 '비상사태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이 법의 반인권성은 법률 전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내용은 60일간 경찰의 재량으로 재판 없이 구금이 가능하게 하고 수감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며 심지어 변호사 접견권도 주어지지 않는 데에 있다. 또한 구금 60일 이후에도 내무부장관의 재가만 있다면 바로 카문팅 수용소로 옮겨 최대 2년 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다. (마하티르 전총리가 2003년 퇴임 때까지 내무부장관 직만큼은 반드시 겸임을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이같은 국내 치안 장악 문제와 관련이 있다.)
▲ ▲ 관타나모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말레이시아의 카문팅 수용소를 지탱하는 법률 '국내보안법'에 항의하고 있는 사람들. ⓒ www.freeanwar.net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이 절차적 반인권성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구금기간 동안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고문·구타·폭력, 심지어 살해 등이다. 고문이 특히 심해, 수감 경험자들은 육체적 가학·발가벗기기·잠 안 재우기·24시간 심문·협박·가족에 대한 강간·살해 위협 등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수많은 인권단체들이 이 수용소의 폐쇄를 주장해 왔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월 20일 미국에게 관타나모 수용소의 폐쇄를 요구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국내보안법과 카문팅 수용소의 존재는 우리의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국가안보'에 의해 개인의 인권이 침해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전형적인 사례다. '국가안보' 혹은 '사회질서'는 집권자가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다. 시대별, 지역별로 피탄압 그룹의 성격이 달라질 뿐이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필리핀의 마르코스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노태우)가 갖는 공통점은 모두 냉전이라는 특수한 세계질서에 편승해 강한 반공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 등 서방국가와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장기집권에 성공한 독재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강한 반공주의 정책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슬로건이 바로 '국가안보'였다.

이 국가안보의 논리가 9.11 이후 인류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대테러'의 논리로 전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인권의 시대'가 '대테러의 시대'와 공존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9.11과 발리 테러가 지나간 자리
▲ 발리 테러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테러동맹'을 명분으로 한 인권침해가 남았다. 사진은 2003년 12월 발리 테러 1주기 기념행사에 참석한 어린아이와 아버지의 모습. ⓒ 연합뉴스

사실 동남아시아 지역은 80년대 필리핀의 '피플 파워'로부터 시작해 인도네시아의 1998년 5월 민중항쟁을 거치면서 꾸준히 민주화를 진행시켜 왔으며 더불어 시민적·정치권 권리도 확대되어 왔다.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한 인권침해에 대한 시민사회의 각성이 진작됐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국내 활동뿐 아니라 국제연대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9.11과 2002년 발리에서 벌어진 테러사건 이후 동남아 국가들은 최소한 인권침해라는 기준으로만 본다면 권위주의로 회귀할 조짐을 충분히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일련의 대테러 조치들은 자의적 구금에 면죄부를 주며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나아가 무국적자와 난민 및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증가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인권침해는 이슬람에 대한 적대화 경향으로 수렴한다. 종교적 관용이 이슬람 대 비이슬람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9.11과 발리 테러는 동남아 지역의 정치·외교 질서를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소위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에는 각 국가마다 서로 위협의 주체가 달랐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동티모르, 아체 등 지역 독립 세력이나 무슬림 근본주의자였고 말레이시아는 중국계 등의 분리주의자나 반정부인사였다. 또 그 대처방법들도 상이했으며 국가간 협조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9.11과 발리 이후부터는 모두 '테러리스트'라는 추상적 명칭으로 통일됨으로써 국가간 공조가 필수적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 동남아인권침해는 '독재자' 아닌 '대테러 동맹'의 몫

9.11 이후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명분으로 아시아에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동남아시아 각 국가들은 그리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다. 비록 2001년 11월 브루나이에서 개최된 제7차 ASEAN 정상회의에서 9.11을 비난하고 테러의 확산에 반대한다는 형식적인 성명서를 채택하긴 했으나 실제 정치적·외교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2년 10월 12일 발리 폭탄테러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3일 프놈펜에 모인 ASEAN 정상들은 새로운 권위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역사적인'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동남아 지역의 테러가 '실재'하며 '현실적' 위협임을 인식한 결과물이다. 동남아 국가들에게 9.11이 '테러'에 대한 현실적 위험성을 알린 신호탄이었다면 발리는 그 테러가 '우리'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9.11은 국제관계 측면에서도 크나큰 변화를 초래했다. 9.11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은 미국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 발전이 더디고 인권침해가 만연해 있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취하거나 정치·외교적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해당 정권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어 지만 9.11 이후부터는 어느 여타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미국은 줄곧 동티모르 사태 관련자 처벌을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9.11 이후부터는 군사적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말레이시아도 관계 정상화를 위해 마하티르와 바다위 총리가 재임 중 연이어 워싱턴을 국빈 방문했다.

이 모든 지역연합의 심화 과정에서는 미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채찍'보다는 군사·경제 원조라는 '당근'을 주로 사용해 지역 내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각국 정부의 '친미화'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2004년 8월의 협약에서 미국은 향후 5년간 인도네시아에 총 4억65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는 그 안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원금액 중 최대 규모다. 동티모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진하다는 이유로 다양한 제재를 가했던 9.11 이전과는 전혀 상반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인도네시아는 아직도 동티모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대테러 동맹은 그 이전 권위주의 시기에 국가안보라는 논리로 수많은 인권탄압을 자행했던 독재자의 '제도적' 귀환이다. 수하르토, 마르코스, 마하티르 등 사적 개인으로 상징되는 인권탄압의 주체가 이제는 국가간 동맹이라는 제도적 기구로 전화했을 뿐 인권침해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은 동일한 것이다.

대테러 동맹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
▲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예방적 조치'가 갖는 극단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테러에 찬성하느냐'라는 질문만큼 무식한 질문도 드물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테러'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악'이다. 따라서 테러라는 용어를 동원한 순간 모든 행위는 정당화된다. '테러에 대한 예방적 조치가 필수적이다'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예방적'이라는 용어가 초래하는 결과는 상상을 넘는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마하티르가 국내보안법과 카문팅 수용소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논리도 바로 이 '예방적 조치'였으며, 우리의 국가보안법도 다를 바 없다. 비록 할리우드식으로 각색되긴 했지만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주는 교훈도 바로 이 예방적 조치가 갖는 극단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굳이 홉스의 딜레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하며 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개인의 자유가 제한당할 수 있다는 점은 인간 공동체의 숙명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인류에게 준 유일한 교훈은 이 자유의 제한을 위해서는 최소한 절차적 정당성만큼은 획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테러 동맹은 예방적 조치라는 이름으로 그 절차적 정당성을 폐기하고 있다. 인권침해는 은밀한 방식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모든 비판을 완전히 빨아들이는 '테러'라는 담론적 블랙홀을 제거해야 한다. 지역 내 시민사회의 연대가 더욱 절실해 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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