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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적 민주정치로의 과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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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적 민주정치로의 과도기"

쟁점토론 '양김 집권 10년' <1> 정대화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있는 것이라면, 그 자연의 이치는 두 김씨와 양김 정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인수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자산과 부채는 양김 정권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두 김씨는 40년 가량을 반군사독재ㆍ민주화의 지도자로 투쟁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민주화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두 김씨의 상호분열과 구세력과의 무원칙한 타협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두 김씨를 정점으로 수립된 양김 정권은 6월민주항쟁의 산물이면서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한 정권인 동시에 많은 민주적 과제들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민주화투쟁 주역으로서의 양김**

양김 정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김씨의 역사적 궤적을 군사쿠데타 이후의 행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김씨는 박정희 체제 아래서 군사쿠데타 주역이 저지른 4대의혹사건 규탄,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반대 및 유신반대투쟁 등을 통해서 서로 협력하며 민주화를 추진했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최후의 대결이 유신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게다가 전두환정권의 등장으로 두 김씨는 정계에서 추방되었지만 곧 민추협과 신한민주당을 결성하여 대통령직선제 개헌운동을 중심으로 독재타도 투쟁을 전개했으며, 재야민주화세력과 함께 87년 6월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두 김씨의 협력관계를 보면,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과정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두 김씨를 중심으로 새 바람을 일으켰으며, 패배한 김영삼씨가 승리한 김대중 후보에게 깨끗하게 승복하는 좋은 전통을 수립했다. 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재야에서 활동하던 김대중씨가 타협적인 이철승씨 대신 선명야당을 내세운 김영삼씨를 지지함으로써 유신몰락을 앞당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결연한 투쟁의지를 보여주었다.

전두환정권 아래서 김영삼씨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에 호응하여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씨가 지지와 동참 의사를 표명했고, 이를 계기로 민추협이 결성되어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치적 전열을 정비하게 되었다. 민추협이 중심이 되어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선거혁명을 일으켰던 85년 2.12총선의 변화열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열기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양김 정권은 6월민주항쟁의 결과**

그러나 80년 민주화를 향한 소중한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의 5.18쿠데타에 의해 짓밟히는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될 때까지 두 김씨가 보여주었던 정치적 탐욕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있다. 신군부의 5.18쿠데타를 두 김씨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되겠지만, 신군부가 무력을 발판으로 권력을 향한 거대한 음모를 진행하던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권력만을 탐하던 모습에서 많은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억이 87년 직선제 개헌을 전후한 시기에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재연되었고, 결국 김대중씨가 평화민주당을 분리, 창당하는 방법으로 분열하면서 결정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3김씨와 노태우씨가 출마한 상황에서, 민주화를 이끈 두 김씨가 함께 출마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혼란스러웠고, 영ㆍ호남 지역감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 표출되었으며, 승리는 정치초보자 군인 노태우씨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두 김씨의 역사에 대안 몰인식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국민들의 수십년 땀과 피와 눈물을 몽땅 허사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죽쒀서 개 준다"는 속담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후 노태우정권이라는 변형된 군사정권의 짧은 시기를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여기서 이 양김 정권을 80년대 민주화운동, 특히 80년 광주항쟁이나 87년 6월민주항쟁과 분리해서 판단할 수 있을까? 양김 정권은 한국 민주화의 흐름과 무관하게 등장한 것일까? 결코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이다.

6월민주항쟁이 비록 불완전하게 마무리되었고, 그 때문에 노태우정권이라는 군사독재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지만, 양김 정권은 기본적으로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서 등장한 것이다.

때문에 문민정부는 출범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하고 보안사를 기무사로 바꾸어 역할을 축소하는 등 탈군사화를 위한 조치들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기득권세력의 독점과 부패를 차단하기 위해 재산을 등록하여 공개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대중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와도 연관된 것이지만, 재벌개혁을 단행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와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언론개혁 또한 마찬가지다.

***분열, 지역주의, 권위주의의 한계**

그러나 양김 정권은 세 가지 본질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 87년 이후 분열로 인해 민주세력의 분열, 정치권의 분열, 영ㆍ호남의 분열을 자초했으며, 그로 인해 독자적인 집권보다 구세력과의 연합에 의한 타협적 집권의 길을 택했다. 문민정부가 신군부의 탯줄을 타고 태어난 것이나 김대중정부가 구군부인 자민련의 손을 잡고 태어난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 성향과 정책방향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양김 정권의 등장과정이 두 김씨 상호간의 극심한 경쟁과 비판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합된 국민적 역량을 동원할 수 없는 반쪽의 정권이었다. 문민정부의 등장은 호남의 비판을 받았고 김대중정부의 등장은 영남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으로 취약한 정권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민주화된 정부이되 지역주의에 의존하고 지역갈등을 조장하는 정권이 된 것이다.

셋째 양김 정권은 국민과의 관계에서는 국민주권을 존중하는 등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민주적인 정권이었지만, 권력 내부적으로는 과거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속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권위주의 권력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비민주성은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권력의 운용, 정당의 비민주성, 가신그룹의 역할 등에서 잘 드러났다. 말하자면 권력 내부적으로 권력의 사유화가 해소되지 못한 것이다.

양김 정권을 군사독재정권에서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민주정치로 가는 과도기적인 정권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김씨와 양김 정권이 반군사독재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민주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두 김씨가 보여주었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비판할 수밖에 없으며, 문민정부와 김대중정부를 통해서 탈군사화와 재벌개혁 등 많은 개혁을 추진한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지만, 집권기간 동안 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개혁을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과 측근들의 부패추문을 허용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도기의 빛과 그림자 함께 봐야**

따라서 이 시점에서 두 김씨와 양김 정권을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두 김씨와 양김 정권은 우리 역사의 일부이며, 특히 민주화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모든 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두 김씨의 민주적 활동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며 집권기간에 추진한 개혁에 대해서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가장 큰 업적은 민주화 운동에서 이탈하지 않고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후에는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개혁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수구세력들이 몇몇 부분적인 사례를 들어 두 김씨와 양김 정권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과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김씨의 민주화 업적을 인정하되 두 김씨의 방식은 극복되어야 할 낡은 방식이라는 것이며, 양김 정권의 개혁적 성과를 인정하되 합리성과 개방성을 중시하는 21세기 민주정치를 위해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을 끝낸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업적이지만,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면서 형성된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없다.

자연현상에서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처럼 두 김씨와 양김 정권의 공과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스스로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인 동시에 그 역사에서 미래를 위한 소중한 교훈을 얻는 방법이다. 우리는 두 김씨를 인정하되 비판하고, 양김 정권을 평가하되 결국에는 극복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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