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팀이다."
FIFA(국제축구연맹)의 스탠리 라우스 회장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북한 축구를 이렇게 평가했다. 라우스의 회장의 경고처럼 북한은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올라 세계를 경악시켰다. 하지만 북한 축구는 1982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의 심판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국제축구계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몇 차례의 부침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근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한 북한 축구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열린 동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북한팀이 나름대로 인상적인 경기를 보여주었고, 14일에는 다시 서울에서 남북 통일축구를 선보인다.
이를 계기로 북한축구, 영욕의 40년을 돌아본다.
***빗장수비 무너뜨린 박두익의 골**
지난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격돌했을 때 세계 주요언론들은 40년전 북한 축구를 떠올리며 붉은악마의 '어게인 1966'이란 카드섹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66년 7월 19일 잉글랜드 미들스버러에서 북한은 이탈리아를 꺾는 기적을 연출했다. 자만심에 가득찬 이탈리아는 초반부터 북한을 몰아 부쳤지만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북한의 이찬명 골키퍼는 이탈리아의 맹공을 온 몸으로 막아냈다.
이탈리아는 전반 30분을 넘긴 상황에서 무릎 부상이 악화된 수비수 불가렐리를 더 이상 뛰게 할 수 없었다. 교체선수를 허용하지 않던 당시 월드컵 규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10명으로 경기를 치러야 했고 이때부터 경기상황은 급변했다. 북한은 11대10의 숫적우세를 놓치지 않고 전반 42분 박두익이 결승골을 뽑아냈다.
***"무명의 북한 선수들은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것 같다"**
경기장을 찾은 약 2만명의 팬들은 북한 축구에 경악했고 <BBC> 방송 아나운서는 "로마 제국이 무너졌다. 무명의 북한 선수들은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것 같다"며 북한의 승리를 육성으로 타전했다.
미들스버러에서의 기적을 지켜봤던 팬 3000명이 북한과 포르투갈의 8강전을 보기 위해 잉글랜드를 가로질러 리버풀에 위치한 구디슨 파크에 응원을 갔고 <BBC>가 2시간 동안 북한 축구 특집을 마련할 정도로 북한 축구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폭주 기관차처럼 측면을 돌파하다 코너 플래그에서 부딪쳐 깃대를 부러뜨릴 정도로 빠른 북한 선수들의 스피드, 크로스가 올라오면 공격수들이 시간차로 점프하며 헤딩슛을 노리는 '사다리 전법' 등은 잉글랜드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공격축구를 선호하는 잉글랜드 팬들은 '카테나치오(빗장수비)'라고 불리는 수비 위주의 축구를 1960년대에 완성한 이탈리아의 패배에 더욱 큰 박수를 보냈다.
이탈리아 선수단은 제노아 공항에 내렸을 때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았고 북한전에서 결정적 득점기회를 놓친 페라니를 포함한 3명의 선수들은 그 뒤 두번 다시 이탈리아에서 뛸 수 없었다.
충격에 휩싸인 이탈리아 언론들은 박두익을 '치과의사'로 불렀다. 이를 치료할 때 겪어야 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탈리아 축구가 박두익으로부터 느꼈기 때문이다. 북한전의 굴욕적 패배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이탈리아 축구는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자국 프로리그에서 외국인 선수가 뛰지 못하게 하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할 정도였다.
하지만 북한 축구의 월드컵 8강은 선수들의 철저한 희생에 의해 이뤄진 피와 땀의 산물이었다. 1963년 기관차 팀, 모란봉 팀 등 13개 축구팀에서 가장 우수한 30명을 선발한 북한은 평양 모란봉 아래 새로 지은 숙소에 선수들을 수용하고 매일 아침 6시부터 쉴새 없는 지옥훈련을 강행했다. 북한 선수들은 밤 10시 이후엔 외출이 금지됐고 21~31세의 선수들은 결혼까지 금지당했다. 축구선수라기보다 '혁명전사'로 탈바꿈한 북한 선수들은 월드컵 전까지 약 30회의 국제시합을 치르는 동안 1패만을 기록했다.
***북한 축구의 동면기**
1966년 월드컵 8강의 기적을 이룬 북한은 16년이 지난 뒤 또 한번 세계축구계의 화제가 됐다. 쿠웨이트와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축구 준결승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태국인 주심 비지트 씨를 집단폭행해 FIFA로부터 2년간 국제대회 출전금지의 중징계를 받았던 것. "비지트 씨가 쿠웨이트로부터 1만5000달러의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정을 했다"고 심판매수 의혹을 주장했지만 FIFA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2년.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한국, 일본에게 패한 뒤 북한은 1998년까지 국제무대에서 종적을 감췄다. 외부에선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잇따른 자연재해의 영향이 북한 축구의 동면기를 만들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한국, 일본에게 모두 패한 데 격노한 김정일 지도자가 대외시합의 금지를 명령했고 몇몇 선수를 공장 등으로 추방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동면기를 끝낸 북한은 올해 40년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골절상에도 계속 뛰는 정신력과 체력을 앞세워 돌풍을 예고했지만 국제무대에서의 경험부족과 기술부재로 고개를 숙였다. 1974년 월드컵에서 동, 서독이 나란히 출전한 이후 처음으로 분단 국가의 두 팀이 함께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2001년 박두익은 35년간의 침묵을 깨고 외부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에게 천리마 축구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우리는 체력과 스피드를 갈고 닦는 데 주력했다. 우리는 모두 신장이 작았지만 매우 민첩했다." 그의 회상이 서방세계의 신문을 장식했다.
북한 축구의 화두는 박두익의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스피드를 활용한 역습작전이다. 언제 다시 북한 축구가 그들의 특기를 살려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재등장할 수 있을지 점치긴 힘들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북한 축구가 세계를 향해 먼저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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