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언론, 학계가 완강한 보수의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조건의 내각제에서는 이들 보수네트워크가 (시민) 정치를 압도할 것이다. 한국정치는 재벌과 언론의 영향력이 넘쳐나고 국가와 시민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수준으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연립정부) 발언으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논의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 일각의 내각제 개헌 구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문이 나와 주목된다. 특히 정치권이 주도하는 개헌 논의에 반발하며 개헌 과정에 시민사회가 주체로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내각제, 5번 모두 실패한 헌정 대안"**
15일 '창비'와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공동 주최한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 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 심포지엄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 헌법과 민주주의-무엇을, 왜,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논문에서 우선 내각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 교수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내각제는 한국에서 실현가능한 헌정 대안이 전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박 교수는 "현재의 정당 배열에서 수많은 사회, 경제, 이념 문제들은 정당을 통해 내각과 정부에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며 "정당과 시민사회의 관계가 고도로 자율적이고 분리된 한국적 현실에서 내각제가 실현되면 시민사회와 유리된 정당들 사이의 정치협상과 주고받기에 따라 국가 및 사회의제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고 참여민주주의의 측면은 더욱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민주화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당의 해체와 생성, 이합과 집산은 내각제 주장의 근거를 박탈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오늘날 한국정당과 의회의 문제 해결 능력은 형편없이 취약하다"며 "부패에 취약하게 노출된 무능한 정치사회가 국정 전반을 장악할 때 무슨 문제가 생길지는 자명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한국에서 내각제는 건국 이후 끊임없이 추구된 헌정대안이었지만 1948년, 1960~61년, 1987년, 1990년(3당합당), 1997년(DJP 연합) 등 5번 모두 실패한 역사를 보여줬다"며 "특히 최근 세 차례의 실패와 현재의 상황에 비춰 현실의 변화 없이 추구되는 내각제 논의는 정치공학적 발상이 아니라면 수용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마지막으로 "인민주권 및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사회와 유권자의 강력한 열정, 욕구, 의지가 존재한다"며 내각제는 참여 민주주의라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헌, 정치권ㆍ권력구조 중심의 논의 넘어서야"**
박 교수는 이어 우리 헌법의 문제로 개헌을 이끌어낸 주체인 시민.민중이 실제 개헌 과정에는 배제된 '민주화와 헌법화의 극적인 괴리와 단절'을 꼽았다. 1960년 4.19, 1987년 6월항쟁 등이 개헌을 촉발했지만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헌법화(constitutionalization) 국면에서는 엘리트 주도, 폐쇄적 논의구조, 보수적 이념지형, 비포괄적 의제 한정, 탁상정치(卓上政治, Round Table Talks Politics) 등으로 인해 정치엘리트 간의 협소한 제도권 협약으로서 헌법이 탄생했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따라서 "한국의 헌법체계는 거시적 민주헌법체제의 구축보다는 당시 시점의 헌법제정세력 또는 협약참여세력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의 교환의 산물이었다"며 "6월항쟁 헌법 역시 당면과제였던 장기집권 방지라는 구헌법 체제의 극복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3대협약 세력의 이해의 교환의 산물이고, 이런 단기적 이해의 교환은 항상 정략성, 불완전성, 불안성을 내포한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박 교수는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헌법 수준에서 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 원인이 됐다"며 "바람직한 헌법체제의 형성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대표가 어느 규모의 헌법개정회의를 구성하느냐가 핵심적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박 교수는 최근의 개헌 논의에 대해 "주체가 정치권이고, 주제가 권력구조라는 점은 심각한 문제"라며 "헌법논의 주체는 정치권을 넘어 시민사회로 확장해야 하며, 내용은 권력구조의 문제를 넘어 미래 만들기로서의 헌법 만들기, 즉 헌정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과 개선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요자 중심의 '3중 헌법 제정' '4권 분립' 필요"**
박 교수는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수요자 중심의 헌법 논의 구조'를 위해 3중의 헌법 제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5~48년에도 무려 17개의 정당, 시민사회의 헌법안이 존재했고, 이들을 검토한 뒤 국회에서 건국헌법을 마련했다"며 "시민사회 수준, 정당 수준, 그리고 국회 수준(및 다시 국민)에서 논의를 결합하는 3중의 헌법 개혁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또 "고전적 헌법주의에 바탕한 3권 분립 체계는 참여와 민주의 측면보다는 질서와 안정의 측면에 무게중심이 놓인 틀"이라며 권력 분립 체계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 시민·다중·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이들의 참여를 억압하는 기제로는 민주주의와 정치안정를 모두 확보할 수 없다"며 "국가-대표체계-시민사회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3권분립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입법-행정-사법의 3권분립 체계를 넘어 검찰, 헌법재판소,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금융 및 경제감독기구, 인권기구 등 권리·권력과 이익 체계 등을 구성·감시·감독하는 기구들을 독립시켜 제4부, 예컨대 감독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헌법, '남성국민'의 관심사인 권력구조 조항 과도"**
홍윤기 동국대 교수도 "국민헌법에서 시민헌법으로-대한민국 헌법개혁의 아젠다 설정을 위한 시론"이란 논문에서 '87년 헌법'의 문제점으로 "국가 소속원인 시민에게 자기 생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한 기본권을 보유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거나 가장 단순한 의사 표출과 최저생계 유지 정도에서 보장되는 노동의 권리 선에서 조정됐다"며 시민사회가 배제된 헌법 개정 과정을 문제 삼았다.
한편 정희진 서강대 강사는 "헌법의 탈식민화와 '현실화'를 위해-한국헌법의 남성성과 국가주의의 문제"라는 글에서 우리 헌법의 성별성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성원권은 결국 '국민'을 의미하는데, 국민의 범주는 계급과 젠더의 제한을 받는다"며 "헌법은 '남성 국민'의 관심사인 권력구조에 대한 조항이 과도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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