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세계체제, 동아시아, 분단체제, 그리고 남북한 사회 각각의 수준에서 변동의 폭이 커져가는 시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위험과 기회가 다 같이 커져가는 시대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행동의 몫도 커지고 있다. 커다란 변화에 직면해 빠져들기 쉬운 체념의 태도를 떨쳐낸다면 80년대 민주화운동이 품었던 지향점에 접근할 길이 막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족해방과 통일 그리고 민중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해 왔던 민주화운동의 바람은 얼마나 실현됐는가. 1987년 민주화 이행을 통해 형성된 '87년 체제'를 발전적으로 극복할 역량을 우리 사회는 갖고 있는가. 창비와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87년 체제 극복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공동 심포지엄을 열어 이 간단치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발언에서 촉발된 정치권의 개헌 또는 정치권력구조 재편 논의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다각도로 제기돼 관심을 끌었다.
***"87년 체제의 미래, 낙관적으로 전망하기 어렵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분단 체제와 87년 체제'라는 글에서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우리 사회가 성취한 것이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어렵다"며 "그럴수록 사태가 악화되어가고 있는 원인을 추적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날 심포지엄의 의미를 밝혔다.
김 교수는 "87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우리 사회 체제를 87년 체제로 명명할 수 있는 1차적인 근거는 87년 개정된 헌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라며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는 지난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명료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87년은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그는 "민주화 이행으로 국가-은행-대자본 연합과 민중 부문의 배제를 결합한 박정희식 발전 체제도 변화를 겪었다"며 "국가가 금융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는 것은 쇠퇴했으며 노동 또한 국가의 억압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벌과 노동은 87년 민주화 이행이 낳은 골리앗과 다윗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87년 체제는 박정희 체제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해간 것"이라며 "하지만 이 87년 체제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도 '민주적인 대안적 경제체제'로 전환해나갈 가능성 또한 잠복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87년 체제는 두 가지 경제체제의 방향 가운데 어느 것도 사회적 합의를 얻어 선택되지 않은 채 존속하는 긴 이행 또는 교착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87년 체제, 보수 세력에게 더욱 넓은 공간 제공해"**
김종엽 교수는 특히 박정희 체제와의 대비를 통해 87년 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짚었다.
김 교수는 "87년 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정한 선거 경쟁과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체제로부터 탈피한 체제"라며 "하지만 이 체제는 박정희 체제 그리고 그것의 지연된 형태인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대한 과도한 반응의 측면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 단임제나 총선 주기와 대통령 선거 주기가 어긋남으로 인해 책임정치에 어려움을 낳은 점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은 제거했지만 의회에는 대통령 탄핵권을 준 점 등의 문제가 그 예"라며 "이것은 선출된 정부의 책임정치를 저해했고 정부의 정책적 무능력을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87년 체제에서는 경제적으로 박정희 체제를 탈피하면서 정부의 은행 지배를 통한 재벌 통제가 약화됐다"며 "박정희 체제의 관치금융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국가의 정책이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는 외환위기가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시도는 확실히 박정희 체제에 대한 과도한 탈피였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물론 87년 체제에서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은 다른 방향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민주화 세력의 힘이 약했다"며 "보수 집단은 87년 민주화 이행으로 국가로부터 (계속) 밀려났지만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속에 진지를 구축해 재벌을 필두로 보수 정당, 보수 언론사, 대학과 연구소, 관료집단 등에 폭넓게 포진해 정부 정책을 유리한 쪽으로 비틀었고, 민주화된 사회와 헌정 체제의 문제점은 이들에게 넓은 활동 공간을 안겨주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김 교수는 특별히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박정희 체제를 탈피하지 못한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는 '잘 살아보세'라는 집합적 지위 상승의 추구와 교육 경쟁의 형태로 나타난 개인적 지위 상승의 추구가 강했다"며 "특히 전자와 관련된 대중적 열망은 박정희 체제는 물론 민주화된 정부에게도 큰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압력으로 민주화된 정부 역시 경기 후퇴와 자본의 투자 스트라이크 그리고 보수 언론의 공세 앞에서 언제나 손쉽게 심층적인 구조 개혁보다 경기 부양책을 동원하고 보수층과 화해하려는 제스처를 내보였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남한 사회 양극화 심화, 분단체제 극복 역량도 침식"**
김종엽 교수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분단체제론에 기대 현 시점을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시대'로 파악했다.
김 교수는 "분단체제의 동요를 야기한 첫 번째 요인은 남한 사회의 민주화"라며 "민주화 이행은 분단을 체제로 고착시킨 중요한 요인인 남북한 지배층의 적대적 상호의존을 무너뜨린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두 번째 요인은 냉전의 해체"라며 "남한 사회는 탈냉전으로 인해 레드 콤플렉스를 떨어낼 수 있었으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영향에 더욱 심하게 노출됐고 북한은 탈냉전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국제 교역을 잃고 결국 심각한 식량 위기와 에너지 위기를 겪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87년 이후 민주 정부가 남북관계 및 국제정치에서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던 데 비해 국내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며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악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화로 나타난 사회적 양극화는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 토대를 잠식해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필요한 남한 사회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자원 또한 침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결국 어떤 형태의 통일이 이루어지든 한반도에서 더 나은 사회체제를 형성할 가능성이 축소됨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사회적 논의 거친 새 헌법, 그리고 헌법 자체를 민주화하는 과정 필요"**
김종엽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지속가능한 경제 체제를 창출하고 한반도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체제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87년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 헌정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이고 노무현 정부 아래서 그것이 어떻게 의제로 형성될 수 있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며 "그러나 2년 뒤가 87년 이후 처음으로 대선 주기와 총선 주기가 일치하는 대회전의 시기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이미 87년에 형성된 체제가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다양한 형태로 체험했기 때문에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갈등의 해결책을 최종적으로는 민주적으로 형성된 헌정체제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적 논의를 거친 새로운 헌법, 헌법 자체를 민주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개헌 논의의 지형이 진보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종엽 교수도 "삼성의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새롭게 주목 받게 된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 부분이 개헌 논의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며 "현재 논의의 지형은 결코 진보적인 진영에 유리하게 짜여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어떤 구상을 하고 보수층이 어떤 구상을 하든 이제는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삼아야 할 때가 됐다"고 논의의 절박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국가, 재벌에 더 민족적일 것 요구해야"-"평등주의 에너지를 정의·연대와 접속시켜야"**
김종엽 교수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우선 국가에 더욱 민족적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며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도록 요구하는 것이 지구화 시대에는 더욱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국가는 박정희 체제 이래로 시민에 대해 별달리 해준 것 없이 오직 경제성장의 지속을 통해서만 시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며 "이제 국가는 성장의 과실을 공공 인프라와 복지를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 국민을 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재벌과 전체 사회 간의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그 자체가 국민적 노력의 소산인 재벌의 성장 뒤에는 여전히 자유로운 정리해고, 내부하청을 통한 노동 통제와 분할, 하청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의 그늘이 있으며, 취약한 지배구조와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가 있다"며 "이런 기업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이 더욱 민족적일 것을 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평등주의적 에너지를 정의와 연대에 접속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환 위기 이후 집합적 지위 상승에 대한 기대가 약화된 대신 개인주의적 지위 상승 내지는 지위 방어는 더욱 강화됐다"며 "사회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시장을 사회 안에 다시 품어 넣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저류에 있는 평등주의적 에너지를 공정과 연대 규범에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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