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명단 발표'의 불똥이 정치권으로 번지고 있다. 이번 명단 발표의 적절성에 대해 여야간, 그리고 당내 의원 성향에 따른 공방이 계속되고, 한편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부친과 김대중 대통령의 친일 시비도 덩달아 가열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작 명단을 발표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 측은 "정쟁의 소재로 삼지 말고 초당적으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번 명단 발표가 여야 '저질 비난전'의 소재로 전락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여야, 환영과 우려의 반응 엇갈려**
지난 달 28일 명단이 발표되자 여야는 각각 환영과 우려의 반응을 나타냈다. 이낙연 민주당 대변인은 "곡절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여야 국회의원들의 노력이 첫 결실을 맺은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환영했다.
반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명단에 민족사에 족적을 남긴 분들이 포함돼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남경필 대변인이 전했다. 자민련 정진석 대변인은 "김성수나 김활란 등은 우리 근대사의 선각자인데 그들까지 '친일'이라는 잣대를 일률적으로 들이대 재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여당 대선주자 가운데도 환영과 우려의 반응이 미묘하게 엇갈렸다. 김근태 후보는 "공이 있다면 정상 참작은 될망정 친일행적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다"며 가장 명확한 찬성 입장을 밝혔고, 노무현, 정동영 후보는 "명단 발표를 주도한 의원들이 충분한 검토와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일 것"이라며 찬성했다.
반면 유종근, 한화갑 후보는 "사실관계를 더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며 평가를 유보했고, 이인제 후보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며 다소 우려 섞인 평가를 내놨다. 김중권 후보는 "광복회 입장을 고려해 좀더 심도 있는 사전심의가 필요했다"는 반응이다.
***'마루야마', '도요타' 시비 더 뜨거워**
이처럼 여야간, 의원 성향에 따라 환영과 우려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정작 여야가 뜨겁게 맞붙은 것은 이회창 총재 부친과 김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였다.
민주당 정동영 고문은 보도자료에서 "일제하 이 총재 부친이 창씨개명하고 조선총독부 검사보를 거쳐 검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것은 명백한 친일행위"라고 공격했고, 민주당은 논평에서 "이 총재는 알량한 변명보다 솔직한 고백과 참회를 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또 장전형 부대변인은 "이 총재 부친과 (이번 명단에 포함된) 최돈웅 의원 부친의 일본 이름이 공교롭게도 같은 '마루야마'(丸山)라고 알려진 것은 기가 막힌 우연"이라며 비난했다.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일제 때 공무원을 했다면 전부 친일파라는 인민재판식 논리는 척결돼야 한다"고 반박했고, 특히 "김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일제 때 은사를 찾아가 창씨개명인 '도요타'를 자랑스럽게 자처하지 않았느냐"며 "'도요타 정권'의 중상모략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친일파 명단 발표와 그 후속 작업에 대한 논의보다 이 총재 부친과 김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대한 상호 비난과 반박에 훨씬 더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의원 모임', "정쟁 소재 삼지 말라"**
이러한 정치권 공방에 대해 정작 이번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 측은 '본말이 전도됐다'는 반응이다.
의원모임의 대표인 민주당 김희선 의원은 성명을 내고 "명단 발표가 각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쟁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한다"며, "흠집내기를 중단하고 초당적으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의원 모임' 측은 "이번 발표는 문제 촉발의 성격"이라는 입장이다. 이번 명단 선정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한나라당 서상섭 의원은 "이번 명단 발표는 1차 발표이며, 앞으로 추가 자료 조사를 통해 2차, 3차의 발표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16가지 기준을 현재에 적용, 친일파 선별작업을 하다보니 부실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서장급 이상 경찰과 소대장급 이상 군속들에 대해서는 조사를 더 진행, 추가로 명단에 포함시키도록 하겠다"며 구체적 조사대상까지 거론했다.
또한 "명단 발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일을 계기로 일제하 반민족행위자 선정 및 평가와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국민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피력했다. 김희선 의원도 "이번 1차 명단 발표는 일제 잔재 청산작업을 해 나가는 불쏘시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의원 모임' 측은 앞으로 ▼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 제정 ▼ 500원 주화에 독립애국지사의 초상을 문양으로 채택하는 사업 ▼ 독립운동 유적지를 대학생들과 함께 순례하는 (가칭)'독립군 따라 대행진' 등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사업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중 핵심은 법률 제정에 모아질 전망이다. 법률에는 친일반민족행위의 범주, 진상규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과 관련한 세부사항들이 규정될 것이며 민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적절하게 지원하기 위한 근거조항들도 포함시킬 계획이다.
과거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던 것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다수 의원들의 뜻을 모아 공동발의하고 통과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재 여야의 반응이 이번 명단 발표와 후속 조치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도외시한 채, 대선을 앞둔 이 총재 및 김 대통령 흠집내기 식의 상호비난전으로 흐르고 있어 '의원 모임'의 계획대로 국회내 법률 제정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지 지극히 불투명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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