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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가 투기꾼? 한푼 두푼 아낀 노후자금인데…"

[현장] 동앙 피해자들 대규모 집회 "온가족 거리에 내몰릴 판"

"2억 8000만 원, 노모와 아이들과 함께 집을 옮기기 위한 자금이었습니다. 정말 안전한 거라는 설명만 듣고 돈을 넣었습니다. 저는 계좌이체 수수료 1000원이 아까워 바로 집 옆에 있는 동양증권과 거래한 사람입니다. 투기자가 아닙니다. 이제 10월 30일 자로 입주금을 내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거리에 내몰리는 상황입니다. 가슴이 미어터집니다."

한 참가자가 마이크에 대고 자신의 사연을 풀어냈다. 담담한 어조로 시작했던 그는 이야기 말미로 갈수록 흐느끼기 시작했다. 발언 도중, 한쪽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나쁜 놈들아, 내 돈 내놔라."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여성을 부축하던 이들도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마당 앞은 울음바다였다. 최근 법정 관리를 신청한 동양 그룹 계열사의 회사채와 기업어음에 투자한 피해자 3000여 명(경찰 추산 1800여 명)이 이날 대규모 집회를 열고 동양 그룹과 금융 당국을 규탄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피해자들은 손에 '현재현, 이혜경 부부사기단', '현재현 살인마', '금감원의 직무 유기가 부른 참상' 등의 내용이 적힌 손 피켓을 들고 있었다.

발언에 나선 이들은 하나같이 투자 결정 당시 직원으로부터 동양 그룹의 부실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서류 한 장 읽지 못한 채 구두 계약을 한 경우도 있었다. 힘들게 모은 돈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된 터라, 피해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자'라고 소개를 하니, 피해자들은 모두 "제발 도와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 9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동양채권자 비상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정부의 피해 보상 대책 발표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이들은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혜경 부회장 등 관련자 전원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노후자금 날리고, 해외에서도 사기… "'보이스피싱' 당했다"

경기도 파주시에서 온 62세 여성 김모 씨는 남편과 이혼한 후 30여 년간 노후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날렸다. 간신히 집 한 채를 마련했지만 잔금을 못 치러서 전세를 내줬었다. 얼마 전에서야 겨우 잔금을 치르고, 4500만 원이 남아 동양계좌에 넣어놨다. 만기일이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동양 그룹의 파산 소식이 들려왔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나이도 들었으니 원금 보장할 상품을 소개해주겠다며 직원이 각종 감언이설을 했어요. 동양 그룹 중 제일 탄탄한 회사에 투자하는 건데, 7.3% 금리를 쳐준다고 했어요. 어떤 회사인지는 정확히 안 알려 줬죠. 바로 집 앞에 있는 지점이고, 이전에도 몇 번 거래를 했기 때문에 그냥 믿고 맡겼습니다. 9월 말 사태가 터지고서야 담당 직원이 내가 투자한 곳이 '동양 레저'였다고 하더라고요. 이름도 못 들어본 곳이었어요. 왜 이런 곳을 추천했느냐 따졌더니, 자긴 그런 적 없다면서 억울하면 고소하라 하더라고요.

수면제 먹고도 잠도 못 잘 정도로 너무 억울합니다. 남편과 이혼한 이후 평생을 아끼고 생활했습니다. 1000원, 2000원이 아까워서 신발도 길에서 5000원짜리 신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다 날리다니. 난 이제 환갑도 넘어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네요."


이날 시위에 참석한 피해자 가운데는 해외 거주민도 있었다. 30대 후반의 여성 이모 씨는 마스크로 눈만 가리고 있었다. 이 씨는 이번 사태로 1억 넘는 금액을 날릴 위기에 처했지만, "절대 가족한테 알려져선 안 된다"고 했다. 이 씨는 지난 1일 가족들 몰래 귀국했다. 본인도 2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데 이 씨의 아버지도 4년 전 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이 알려지면 충격을 받으실 거라고 걱정했다.

그 역시 전형적인 '불완전 판매'의 피해자였다.

"해외에서 전화로 거래했습니다. 금융 지식도 없고, 해외에 있으니 상황을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래서 '망할 리 없다'는 직원 말만 믿고 7월에 돈을 넣었습니다. 금리도 따지지 않았어요. 1년 내에 찾을 돈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건지 그것만 수십 번 물어봤습니다. 직원은 안전하다면서, 오히려 너무 경쟁률이 치열해서 투자를 원하는 금액의 3배는 더 넣어야지 접수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어요. 그만큼 경쟁률이 있다는 얘기였으니 믿었죠.

구두로 알겠다고 했고, 직원은 서류를 우편으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형광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사인만 하고 빨리 보내주셔야 처리가 완료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인해서 보냈습니다. 9월 23일 문제가 생긴 걸 확인하고는 직원에게 우편이 도착하지 않았으면 취소해달라고 했어요. 근데 직원은 서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미 구두로 계약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서류가 없으면 곤란하다더니, 말을 바꾼 겁니다. 고객 피해는 생각 안 하고, 망하는 회사에 돈부터 넣게 한 거죠. 직원은 이렇게 될 줄 자기도 몰랐다고 했어요. 직원이 모르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아나요. 모른다는 게 더 큰 죄 아닌가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10년 알고 지낸 직원 믿고 푼돈 넣은 우리가 '투기꾼'?"

피해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서로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투자를 했을 리 없다", "사기를 치려면 재벌한테나 치지. 서민들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어 자신들을 '투기꾼'으로 묘사한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가 다 투기꾼이라면, 저축은행에 투자했던 사람들도 다 투기꾼이었느냐", "다들 5년씩, 10년씩 거래해왔던 사람들이다. 직원들 믿고 한푼 두푼 모은 돈 넣어놨는데 이걸 투기라고 표현하다니 황당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융 당국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을 주장했다. 피해자들은 "언론에서도 이미 다 징후가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융감독원이 과연 동양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발행하도록 승인해준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4월 금융위가 투자 부적격 기업의 회사채와 기업어음 판매 금지를 했을 당시 동양그룹에 6개월의 유예기간 준 데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때 동양의 신용등급을 하락시켰다면, 지금처럼 많은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이같은 이유로 이날 동양채권자 비상대책위원회 이경섭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각 지역 투자자 대표 10명은 최수현 금감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 원장 대신 나온 정준택 분쟁조정국장은 면담에서 "피해자 손해를 최소화하고 동양증권에 대한 감사를 철저히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차원의 해결도 촉구했다. 이 위원장은 "이 사태는 동양그룹의 문제가 아니고, 정부가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라며 "특별법을 만들어 피해 시민을 보상하라"고 주장했다.참가자들은 "우리는 개미가 아니라 이 나라의 주인이다", "기업이 살아야 국민이 살고 국가가 산다는데, 이제 누가 기업을 믿고 투자를 하려고 하겠느냐"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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