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은 손석희의 JTBC 사장 취임, 그리고 앵커직 복귀가 그저 상징적, 선언적 의미에 지나지 않으리라 전망했다. 그리고 개편 후 보름이 흘렀다. 뚜껑은 이미 반 이상 열린 상황에서, 여론은 '기대 이상'이라는 게 전반적인 반응이다. 특히나 종편에 비우호적인 여론이 JTBC만큼은 서서히 돌아서면서, '일단은 성공'이라는 평이 나온다.
▲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 ⓒJTBC 갈무리 화면 |
'한 걸음 더 나아간 뉴스', JTBC 메인뉴스 <뉴스9>의 새 슬로건이다. 일선 기자들은 이번 개편 핵심을 "선택과 집중"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같은 말이다. 기존 뉴스처럼 1분 30초씩 구성된 꼭지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대신 소수 이슈를 골라 심층적으로 보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메인뉴스인 <뉴스9> 구성이 달라졌다. 꼭지 수는 기존 25개 이상에서 20개 안쪽으로 줄었다. 여타 종편 방송이 30개 내외로 편성을 하는 데 비하면 적은 수다. 꼭지를 줄이는 대신 10분 내외의 현장 기자 연결, 스튜디오 인터뷰를 추가했다. 그날 핵심 이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는 코너를 신설했다.
여기까진 형식의 변화다. 그러나 형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를 동반한다. '선택과 집중'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 사장이 곧 앵커인 JTBC 보도국 시스템에서, '선택과 집중'은 결국 손 사장의 몫이다.
그렇다면 손 사장은 무엇에 주목하고 있을까. 14년 만에 다시 앵커직에 복귀한 손 사장은 개편 첫 방송에서 '진실'을 앞세웠다. 그는 첫 방송인 지난달 16일 <뉴스9> 오프닝에서 프랑스 <르 몽드> 창간자 위베르 뵈브메리의 말을 인용해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또, 방송 복귀 직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는 '팩트(사실)', '공정', '균형', '품위'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공정하고 균형 있는 보도가 무엇인지도 정의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그가 추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균형 있는 뉴스가 무엇인지는 뉴스 편집을 통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다. 분명한 건 지난달 16일 이후 JTBC의 보도 행태가 과거와 다르고, 또 다른 종편사인 TV조선, 채널A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최근 JTBC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JTBC 화면 갈무리 |
채동욱 보도 '최대한 다양하게', 이석기 보도 '최대한 적게'
손 사장이 앵커석에 앉은 이후 여타 종편과의 가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에 대한 보도다. TV조선과 채널A 등은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여부를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JTBC는 채 총장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공인의 사생활 문제를 어디까지 보도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물음을 던지는 한편, 청와대 개입 여부 등도 다루며 사안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했다.
특히 지난달 27일 채 전 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진상규명 결과 발표 당시 종편 간 보도 양상은 판이하게 갈렸다. TV조선은 무려 8개의 꼭지를 통해 법무부 발표 내용을 분석하면서, 법무부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반면 JTBC는 첫머리 기사를 통해 법무부 발표 내용 전달과 동시에 "하지만 혼외아들로 의심된다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물증은 제시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는 점을 꼬집었다.
정쟁 이슈를 자제하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공약 수정 의사를 표명하자, TV조선과 채널A는 이에 대한 '정치권 후폭풍'을 주요하게 다뤘다. 정치평론가 인터뷰 등을 통해 "민주당이 신이 난 것 같다"며 기초연금 문제를 정쟁 이슈로 다뤘다. 반면 JTBC는 정치권 논쟁을 생략하면서 사태의 핵심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JTBC 화면 갈무리 |
불필요하게 '색깔 논쟁'으로 비화할 소지가 큰 보도도 최대한 배격하는 모양새다. 지난달 26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죄 혐의와 반국가단체 찬양 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타 종편은 이를 대대적으로 다뤘다. TV조선은 3건, 채널A는 6건의 꼭지를 통해 구속 기소 내용, 이 의원 자택 등에서 압수한 이적 표현물 목록, RO 실체, 이 의원 구속기소에 대한 네티즌 반응까지 세세하게 보도했다. 반면 JTBC는 기소 사실을 간략하게 전하면서, 타 종편에서 언급하지 않은 "반국가단체 구성혐의나 북한 자금과의 연계 혐의는 오히려 기소내용에서 빠졌다"는 점을 짚었다.
'송전탑', '삼성 백혈병'… 진보 이슈 끄집어 낸 보수 언론
기사 내 양적 균형을 맞추는 데에서 나아가 이슈 선정에도 '파격'을 선보였다. 그동안 진보 진영의 의제로 치부해 묻어둔 이슈를 끌어올렸다.
대표적인 보도가 지난달 23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국정원 시국미사 건이다. 타 종편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다루지 않은 주제였다. JTBC는 아울러 이날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판장에서 국정원 직원이 시 경찰 조사 시 허위 진술을 했다고 증언을 한 사실도 전했다. '국정원 댓글 공작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정부와 국정원 측에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보도였다. 지난달 30일에는 밀양 송전탑 문제와 관련, 송전선로 주변 주민에 대한 암 발생 실태 조사 결과, 유의미한 증가세가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후 산업통상자원부는 해당 보도에 대해 "보고서는 추가 인과관계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지 전자계가 암 발병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반박문을 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5일엔 삼성전자 작업장에서 재해를 당한 이들을 돕는 단체 '반올림'의 활동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30초 분량의 짧은 보도였지만, 대다수 여론은 종편에서 해당 이슈를 다뤘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워하는 분위기다. '선택과 집중'을 위해 보도 개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보도가 나온 것 자체가 사안을 다루려는 보도국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삼성과 특수관계에 있음에도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건 의외라는 반응이다.
ⓒJTBC 화면 갈무리 |
손 사장의 앵커 멘트도 주목받고 있다. 메인뉴스의 앵커이자 보도국 최고 책임자의 그의 멘트는 달라진 JTBC의 보도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이다.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문제인데 안일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9월 17일,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한국사회는 이른바 권력기관장이 관련된 진실 게임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진실 게임은 게임의 정당성 자체를 미처 생각해보기도 전에 모든 이들이 이미 빠져들어 버린다는 것이 문제이지요."(9월 24일, 채 전 총장의 정정보도 청구소송 보도를 전하면서)
"진상규명 결과를 내놨는데, 감찰 결과가 아니라 진상규명 결과입니다. 왜일까요.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9월 27일, 채 전 총장에 대한 법무부 진상규명 결과 발표 보도를 전하면서)
"이 정부에선 그만두기도 어렵다는 농담이 나오는데, 농담만으로 풀기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9월 27일. 진영 장관 사퇴 첫 소식을 전하면서)
"누군가에게는 힘들었을,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웠을, 누군가에게는 억울했을지도 모를 9월이 끝나가고 있습니다."(9월 30일, 클로징멘트)
신뢰가 곧 전략…"우리는 TV조선과 가는 길이 다르다"
보도국 개편 이후 JTBC에 대한 호평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시국미사 건, 반올림 활동 보도 등이 연쇄적으로 나가자, '어둠의 자식'이라며 종편을 한데 묶어 비판하던 여론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TV조선-채널A와 현격하게 다른 방송이라며 구분 짓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민주당 내에서 '종편 저격수'로 알려진 최민희 의원은 지난 1일 "지금 한 종편은 뉴스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기초연금 관련 보도, 인사 난맥상 보도, 방송 3사도 외면한 밀양송전탑 대치 격화 보도 등을 심층보도하고 있다"며 JTBC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지상파 방송 관계자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입사 7년을 넘어선 문화방송(MBC)의 한 기자는 "지상파 방송이 종편을 은근히 얕잡아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JTBC는 개편 이후 존중할 만한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고 총평한 뒤, "손 사장 체제로 들어서니, 지상파 방송이 종편 개국 이후 처음으로 긴장하고 지켜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지상파 방송국 기자는 JTBC의 변화에 대해 '예상 가능한 생존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는 "방송 뉴스에 유의미한 시청률 변화가 생기기는 어렵다. 일단 방송 뉴스를 보는 사람 자체가 적다. 어떤 전략을 써도 시청률을 더 높이기는 쉽지 않다"며 "지상파 방송은 매일 그 벽에 부딪히고 있다. 종편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몇몇 방송은 우익의 향수를 자극하거나 사생활을 건드리는 식의 선정적 보도를 하지만, 오판이다. 자극적인 예능은 보지만, 자극적인 뉴스는 보지 않는다"며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JTBC가 전략을 잘 짠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선정성 경쟁으로도 괄목할 만한 시청률을 올리지 못할 바에야 장기적 관점에서 '신뢰'라는 명분이라도 쌓으려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JTBC 기자는 "우리는 애초부터 다른 종편과 보도 방침이 달랐고, 이번 개편을 하면서 더욱 차이가 나게 된 것 같다. 특히 TV조선은 '황색 저널리즘' 같아, 우리와는 가는 길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 종합편성채널 JTBC, MBN, TV조선, 채널A 4개사와 보도전문채널 뉴스Y가 일제히 개국한 지난 2011년 12월 1일 오후 서울 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언론노조가 주최한 종편 채널 출범 반대 및 미디어랩 입법 촉구 기자회견 장면. ⓒ뉴시스 |
"JTBC의 진정성? '4대강 찬양' 반성부터…"
관건은 앞으로도 이같은 전략이 통할 것인가이다. 현재로선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손석희 효과'를 통해 당장의 이미지 쇄신에는 성공했지만,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한 노력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언론 단체 활동가는 "최근 JTBC 개편 이후 지상파 방송도 하지 못하는 심층성이 강화되는 부분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그 때문에 JTBC가 훌륭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법적으로 얻은 특혜를 통해 한 것(변화)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기업인 CJ에서도 <SNL>을 통해 종북 등을 코미디로 풍자했지만, 다른 형태의 압박으로 얼마 가지 못했다. (언론을) 흔들려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저널리즘 강화라는 건 힘들다"고 의견을 내놨다.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권민수 대표는 JTBC가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성역 없는 보도'를 주문했다. 권 사무총장은 "결국 콘텐츠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권 사무총장은 "종편이 4대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획을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동안 4대강 사업 찬양해온 걸 반성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면서, "그런 성역 없는 비판을 하면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JTBC 역시 종편의 '보수적인 이미지'를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JTBC 내부적으로도 '좌향좌' 변신에 대한 고민이 깊다. 보도국 내에서는 개편 후 '달라진 위상'에 만족하는 입장과 함께 '너무 나간 것 아니냐'는 시선이 혼재해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JTBC 기자는 "사장이 처음 올 때부터 <중앙일보>의 논조, 삼성과의 관계와 별개로 가겠다고 했고 그런 얘기도 맞지만, 송전탑 보도나 첫날부터 안철수 의원, 전병헌 의원 등 야권 인사를 주로 섭외하는 등 오히려 예전과는 반대로 치우친 느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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