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초기,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과 길어진 보급선으로 위기를 맞던 미군은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평을 들었다. '수렁(quagmire)'이라는 단어는 10년여의 전쟁 끝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해야만 했던 베트남전의 악몽을 떠올려 미국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미군은 그러나 3주만에 보란 듯 바그다드를 무너뜨렸고 지난주에는 군사작전의 종결을 선언, 초기의 전황분석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미국 앞에 놓인 '정치적 수렁'**
그렇다면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한 미국 앞에 놓인 길은 탄탄대로뿐인가. 미래는 미국의 의도대로 펼쳐질 것인가.
전후 복구에 관한 국제사회와의 갈등, 유전 독점에 대한 비난, 발견되지 않는 대량살상무기 등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머뭇거리게 한다. 더 큰 문제는 미군 철수, 이라크인들의 자결을 주장하며 이라크 정국의 핵으로 부상한 '시아파의 힘'같은 이라크 내부의 정치적 역동성이다.
미국의 유력 부르킹스연구소 동북아 전문가가 미국은 아직 베트남의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라며 미국의 앞날을 경고하고 나섰다. 부르킹스 동북아정책연구소의 캐서린 달피노는 23일 '또하나의 베트남 신드롬(The Other Vietnam Syndrome)'제하의 글을 통해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잘못을 네가지로 제시하며 현재 이라크의 상황도 이를 재현시킬 수 있음을 주장했다.
<사진: 캐서린 달피노>
캐서린 달피노는 베트남 민족주의에 대한 과소평가, 종교적·민족적 분열 조장, 국내적 지지기반 없는 정치지도자의 '수입',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미국의 실수였다고 지적하며 현재 이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어 미국에게 또다른 수렁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군사적 수렁'이 아닌 '정치적 수렁'이 도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달피노는 미국의 실패가 현지 실정도 고려치 않은채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했던 편의주의적 발상때문이라며 미국인들을 '어설픈 민주적 제국주의자'라고 평했다. 그는 이라크의 정치를 18개월만에 재건하겠다는 계획도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부르킹스연구소 홈페이지(www.brook.edu)에 게재된 달피노의 논평 전문이다. '이승만-찰라비 비교'에 이어 '이라크-베트남 비교'를 들어 보자.
***또하나의 베트남 신드롬**
<사진: 베트남전>
미국은 지난주 이라크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정치 체제와 제도 수립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있어왔던 해외에서의 군사 개입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중에 미국은 소위 '베트남 신드롬'에 직면했다. 해외에서의 전투, 특히 현지인들이 미국의 우월한 군사 기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곳에서는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바로 베트남 신드롬이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다른 타입의 베트남 신드롬이 있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널리 확산돼있다. 이같은 인식은 남베트남과 '민주적 제국주의자(democratic imperialists)'로서의 미국이 빠졌던 정치적 수렁, 이 두가지 관계를 목격한 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역점을 두지 않는다면 (베트남 신드롬이) 이라크에서 또다시 재현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1. 민족주의 과소평가**
미국과 남베트남의 연합은 불안하고 모호했다. 남베트남인들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을 사로잡겠다는 캠페인이 실패한 데에는 베트남땅에서 외국인들을 추방하겠다는 북베트남의 결의 못지않게 (남베트남에 팽배한) 민족주의도 한몫을 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보호자라고 여겼으나 많은 남베트남인들은 점령자로 여겼다. 미국인들은 초기의 수많은 위기의 징후들을 무시했다. 사이공의 대다수 거리들에는 1천년에 달하는 외세(중국, 프랑스,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베트남을를 해방시킨 영웅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이 남-북 베트남 통일의 찬반을 묻는 투표에 반대한 것은 남베트남에서 호치민이 승리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호치민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그의 이념적 성향(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를 덮어버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한 인식상의 부조화가 이라크에서 나타나고 있다. 모술과 그밖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미시위는 그 증거가 된다.
***2. 종교적·민족적 분열 확대**
프랑스가 베트남의 통치권을 장악했던 19세기,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식민 법령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일을 그만둔 베트남 지도자들을 대신해 정부의 여러 조직에 가톨릭 신자들을 앉혔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가톨릭 신자들은 베트남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치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시작한 미국 역시 가톨릭 엘리트들에 대해 가장 큰 호감을 보였다. 많은 불교 지도자들은 억압적인 남베트남 정부와 그 후원자인 미국을 같은 세력으로 보았고 반미주의의 초기 모태가 됐다.
그와 너무도 유사하게, 이라크에서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비율은 1950년대 베트남에서 불교신자에 대한 카톨릭 신자들의 비율과 대략 같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가까웠고, 일부 시아파 그룹은 전후 정부구성에 미국이 개입한다면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반대로 일부 수니파 그룹들은 과거에 당한 박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미국이 시아파를 등용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미군의 이라크 주둔을 반대하고 있다.
베트남과 이라크 두 나라에서 미국은 소수 종족들을 용병으로 기용했다. 베트남 몬타그나르드족(라오스의 흐몽족 역시)과 이라크 쿠르드족이 그들이다. 미국의 이같은 전략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종족 갈등을 악화시켰고 그 파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8년 후인 지금까지 몬타그나르드족은 베트남 중앙 고원지대를 탈출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미국의 승리로 자신들의 위상을 분명 향상시켰고 북부 이라크의 질서 유지를 위해 재기용되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 군사적 일익을 담당케 하는 것은, 미국은 모든 이라크인들에게 최선의 이익을 주기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나머지 이라크인들을 설득하기 어렵게 한다.
<사진: 이라크 시아파>
***3. 정치지도자의 수입**
베트남 분할에 합의한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미국은 사이공에 정치적 동맹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카톨릭계 망명 정치인인 고 딘 디엠을 천거했고, 베트남으로 돌아온 그는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됐다. 미국에서 몇 년을 보낸 디엠은 베트남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부활한 조지 워싱턴" "아시아의 처칠"로 명명됐다. 디엠은 그 말이 다 틀렸음을 증명했다. 정치적 지지자도, 민초들의 후원도 없던 디엠은 서구적 민주주의 규범을 버리면서 점차 부패해갔고 억압적인 대통령이 됐다. 그는 1963년 미국의 사전 묵인하에 단행된 쿠데타에서 살해됐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지금, 이라크 과도정부 수반이 될 기회를 잡은 이라크국민회의(INC)의 지도자 아흐메드 찰라비에 대한 논쟁이 부시 행정부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찰라비는 이라크로 돌아간 최근까지 40년도 넘게 이라크에 살지 않았다.
***4.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만들기**
미국의 남베트남 정책은 초기부터 정치 현실과 민주주의적 이상과의 충돌을 빚었다. 존슨 행정부가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본 것은 미국이 선택한 지도자를 선거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구엔 반 티우는 1967년 '허울뿐인 선거'에서 35%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2위를 차지한 트루옹 딘 단은 북베트남과의 휴전을 지지할 것을 공약했는데, 선거 직후 티우는 단을 감옥에 보냈고 이는 사이공에서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해 폭동 수준에까지 이르게 됐다.
전후 이라크에서 나타나는 초기 징후들은 이라크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에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새정부 구성 논의를 위해 지난 15일 나시리아에서 열린 회의에 초대된 75명의 인사들은 미군에 의해 선정됐다. 선정의 기준은 정치적 정당성이나 지지도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협조 여부였다.
미국인들은 어리숙한 제국주의자들로 비춰지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불편한 역할을 맡고 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가장 편한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18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이라크를 정치적으로 재건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미국 혼자 이라크의 정치적 전개를 지휘하려 한다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이라크를 위해, 그리고 미국을 위해 이라크 문제를 국제사회에 맡겨야 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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