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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찰라비, 그들만의 ‘해방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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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찰라비, 그들만의 ‘해방정국’

김재명의 뉴욕통신 <12> 미국에 붙어야 산다?

미국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내세운 인물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인가. 55년전 한반도 서울에다 이승만을 우두머리로 한 친미정권을 세웠던 미국이다. 2001년 12월말 아프간에선 친미인사 하미드 카르자이가 과도정부 수반으로 떠올랐다. 이제 이라크에서 부시 행정부는 1-2년 동안 사실상 미군정을 편 다음,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 아흐메드 찰라비를 우두머리로 또다른 친미정권을 세운다는 계획이다. 이라크 민초(民草)들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은 뒷전이다.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 폴 월포위츠를 비롯한 미 매파들의 눈으로는 미국의 석유 이해를 확실히 챙겨줄 인물이 바로 찰라비다.

<사진-1> 4.19 뒤 쓰러진 이승만 동상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미 극동군사령관이자 ‘일본 총독’이던 맥아더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동경을 거쳐 서울에 닿았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의 빠른 귀국 주선을 재촉한 것은 친일파 집단으로 미군정에 빌붙어 권력을 잡으려 했던 한민당 세력이었다. 좌익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하지 중장은 동경으로 날아가 이승만을 맞이했고, 맥아더 장군과 더불어 이승만을 극진히 모셨다. 3년 뒤 한반도에 민족통일의 열망을 무시한 채 남한만의 반쪽짜리 친미정권이 등장한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독재자라 해도 미국의 이익을 충실히 집행한다면, 그를 ‘위대한 정치인’으로 치켜세워 왔다. 그리고 미 CIA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제3국의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친미성향의 독재자를 권좌에 앉히는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해왔다. 미 군부도 마찬가지다. 참고자료로 이를 간단히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953년, 이란 군부 쿠데타에 개입, 석유 국유화를 단행했던 모사데그 총리를 몰아내고 로마로 쫓겨갔던 팔레비 왕 복귀시킴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개입, 아르마스 친미정권 수립 ▷1964년, 군부 쿠데타에 개입, 외자기업 국유화와 농지개혁을 추진했던 브라질 굴라르 정권 전복 ▷196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의 반공 군부 쿠데타 개입 ▷1973년, 칠레 피노체트 장군의 군부 쿠데타에 개입, 좌파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붕괴 ▷1983년, 미 해병 2천명이 카리브해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 침공, 좌파 군사정권 붕괴 ▷1989년, 미 해병대 2만명이 파나마에 침공,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 붕괴 ▷1994년,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아이티 내정에 개입, 군부 쿠데타로 물러났던 아리스티드 복권시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탈레반 정권 몰아내고 하미드 카르자이 친미 과도정부 세움.

***미 석유회사 콘설턴트 출신의 카르자이**

2001년 12월,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뒤 친미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간의 새 지도자로 세웠다. 카르자이(1957년 생)는 미국의 석유회사로 아프간을 관통하는 개스 파이프 라인을 세우려했던 미 석유재벌 유노칼(Unocal)의 콘설턴트 경력을 지닌 친미인물. 영어권인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공부를 한 까닭에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영어가 능통하다. (유노칼은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간-파키스탄-인도를 잇는 총규모 20억달러의 센트개스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98년 미국-아프간 관계악화로 중단했었다.)

<사진 2>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이라크 바그다드 민중들(사진-워싱턴포스트)

카르자이에게 9.11은 기회로 다가왔다. 미 CIA 요원과 연락할 위성전화를 품고 10.7 아프간 공습 다음날 오토바이를 타고 아프간에 잠입했다. 그런 다음 미 CIA가 비행기로 떨어뜨려준 무기와 달러 뭉치로 아프간 부족들을 구워삶아 탈레반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공작에 나섰다. 소수의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늘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탈레반이 무너질 무렵 독일 본에서 반(反) 탈레반 아프간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을 때(2001년 12월) 카르자이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런 카르자이가 아프간 새 지도자로 뽑힌 것은 오로지 미국의 정치각본이었다. 일부 참석자들이 “회의가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가 들러리냐”고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친미인물 카르자이를 내세움으로써 서남아시아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부시의 아프간(탈레반), 이라크(후세인)의 체제전복에는 미 CIA가 큰 역할을 했다. 독자 여러분도 기억하듯, 아프간 전쟁에서 미 CIA는 탈레반 정권에서 등을 돌리도록 군벌들을 구워삶느라 7천만 달러를 뿌려댔다.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 CIA의 역할은 이라크 군부장성들과 부족ㆍ종교 지도자들을 매수하는 것이었다. 부시는 그런 항목으로 CIA의 대 이라크 작전에 2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했다. 이라크 군 저항이 예상 밖으로 약했던 데는 달러의 약발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날 것이다.

***금융사기범이 이라크 새 지도자?**

미국은 아프간에서처럼 이라크에 그들이 점찍은 인물을 지도자로 세우려 하고 있다. 아흐메드 찰라비(1945년생)다. 이라크 인구의 60%쯤을 차지하는 시아파 출신의 찰라비는 한마디로 논쟁적인 인물이다. 만주의 무장투쟁운동가들과는 달리 이승만이 미국에서 ‘입‘(외교노선)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30년 세월을 보냈듯, 이라크 왕정 고위관리의 아들이었던 찰라비도 12살 무렵(1958년 아랍민족주의 성향의 카셈 장군이 쿠데타로 영국의 꼭둑각시 노릇을 하던 파이잘 왕정을 전복하기 얼마 앞서) 이라크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주로 미국에서 지냈다 (미 MIT와 시카고대학 출신의 수학박사).

<사진 3> 아흐메드 찰라비(사진-로이터)

찰라비는 1975년 레바논 베이루트로 건너가 그곳 어메리컨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나, 레바논내전을 피해 1977년 요르단 암만으로 옮겨갔다. 당시 후세인왕의 친동생 하산 왕자의 지원 아래 찰라비는 페트라(Petra)은행을 세웠다. 그러나 1989년 은행이 파산, 찰라비는 차 트렁크에 숨어 시리아로 도망을 쳤다. 그때 그가 은행 투자자들과 예금주들에게 끼친 손해액은 3억 달러쯤으로, 당시 요르단 GNP의 10%에 이르는 규모였다. 1992년 요르단 법원은 그에게 횡령과 사기죄를 적용, 궐석재판에서 ‘22년의 중형과 강제노동’을 선고했다. (찰라비는 지금껏 “페트라 은행이 파산한 것은 이라크의 후세인이 요르단정부에 압력을 넣었던 탓”이라고 주장해왔다. 1차 걸프전 당시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이라크 편에 섰다).

1991년 걸프전쟁은 찰라비에게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페트라은행 파산 뒤 시리아를 거쳐 런던으로 도망간 찰라비는 이라크 국민회의(INC)를 창설, 그때부터 미국 CIA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됐다. 찰라비는 CIA에게 “내게 자금을 대주면, 이라크 북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후세인 정권 안에 내부 협력자들이 들고일어나도록 일을 꾸며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겠다”고 설득했다. 당시 미 CIA는 걸프전 뒤 찰라비의 이용가치를 눈여겨 보고 매달 32만5천달러를 INC에 지급했다. 1995년 CIA의 자금 지원 아래 찰라비가 주도한 봉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찰라비가 장담했던 내부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라크 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쿠르드족을 중심으로 한 1천명의 전사들은 다수 희생자를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그때부터 미 CIA와 국무부는 찰라비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고 재정지원을 끊었다. 생존력이 강한 찰라비는 클린턴 행정부를 흔들어대던 미 의회 매파(the hawkish) 정치인들을 부추겼다. 그래서 1998년 ‘이라크해방법’이 통과되자, 국무부는 어쩔 수 없이 찰라비에게 활동자금을 대줘야 했다. 그러나 회계장부의 불투명성은 끊임 없이 문제가 됐고, 2001년 미 국무부는 INC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었다. 파월 국무와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이라크해방법‘에 따라 지원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찰라비가 착복해왔다고 여긴다.

***"석유 민영화가 민주화다”**

2002년1월 부시 미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하고 이라크를 아프간에 이어 첫번 손볼 대상으로 꼽기 시작하면서 찰라비는 다시 기회를 맞이했다. 찰라비의 강력한 후원자가 바로 부시행정부 내의 매파인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 그리고 폴 월포위츠 국방 부(副)장관이다. 이들의 판단엔 찰라비가 미국의 이라크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적임자다. 이해관계란 독자 여러분도 짐작하듯 석유다. 부시행정부에서 에너지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딕 체니 부통령의 구상은 “이라크 석유를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지난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자마자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던 조치가 석유 국유화였다. 후세인 몰락으로 이라크 석유를 민영화할 경우 석유이권은 미국 석유 메이저들에게 돌아갈 참이다. INC의장 찰라비는 이들 미 강경파들의 이해를 확실히 챙겨줄 인물이다. 찰라비는 지난 4월 4일 미 국무부 지원 아래 런던에서 열린 ‘석유ㆍ에너지 실무그룹’의 정책토론장에서 “석유의 국가 독점체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찰라비가 내세우는 석유 민영화의 논리는 부시의 이라크 민주화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석유의 민주적 지배를 위해서 민영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석유자원의 국가독점을 풀고, 외국인 자본가들의 직접투자를 통해 이라크 석유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결과적으로 그 이익은 이라크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이른바 글로벌 경제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 행해진 자본시장 개방이 제3세계의 경제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들이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너무 뻔한 얘기다. (이를테면, 필자가 지난 2001년 후지모리의 3선을 둘러싼 페루의 정치위기 취재로 리마에 갔을 때 그곳 지식인들은 국영 전기회사와 통신회사의 민영화로 터무니 없는 엄청난 전기료와 전화료를 물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라크석유 민영화로 배를 불릴 자들은 곧 미국 석유 메이저들이다.

찰라비에 대한 이라크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알려진다. 한마디로 찰라비는 ‘침략자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정치적 도구(political instrument)’라는 시각이다. 부시에 대한 반감은 곧 찰라비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 이어진다. 찰라비는 그 출신배경인 이라크 남부 시아파 종교지도자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읽고 있는 찰라비는 “나는 정권장악에 뜻이 없다”고 연막을 피운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듣던 말이다.

지금껏 라이벌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과 더불어 그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해가며 미국의 눈길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려고 뛰어왔던 찰라비다. 그런 야망의 찰라비가 이라크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으려면, 미국이 이라크를 식민통치하는 길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이라크에 사실상의 군정을 펼 채비다. 찰라비는 이를 이용, 미국의 도움 아래 자기 세력을 넓혀나가려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승만이 이른바 해방정국(1945-48년) 아래서 남북분단만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이라 여긴 것과 마찬가지다.

***친미파 득세(得勢)의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뜻있는 이라크 지식인들이 석유 민영화론을 비롯한 찰라비의 매국행위를 비판하듯, 우리 민족의 영구분단을 막아보려고 많은 지사(志士)들이 이승만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분단 쪽이었고, 이승만은 그 흐름을 타고 대권을 잡는 쪽으로 움직였다. 친일파들이 날뛰던 그 시기에 ‘해방’은 허울뿐이었고, 민족상잔의 분단시대(分斷時代)를 여는 서막이었을 뿐이다. 식민지시대 내내 민족을 배반하며 자기 한 몸의 편안함을 구하던 무리들은 새로운 점령군에 빌붙어 여전히 기득권을 누렸다.

영국 식민통치, 왕조 전복의 군부 쿠데타(1958년), 잇단 전란으로 지새운 이라크의 현대사처럼 한국현대사는 굴곡과 비극의 역사다. 주로 미국에서 일생을 보낸 찰라비와 이승만과는 달리, 멀리 만주ㆍ시베리아 벌판과 중국 본토에서 고난의 투쟁을 벌였던 양심적인 지사들은 민족자존과 통일을 추구하다가 끝내는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그들은 일본, 미국의 외세와 타협하지 않은 채 순난(殉難) 속에 하나 둘씩 숨져갔다. 반면 친미파들은 지난 60년 동안 워싱턴으로 가 눈도장 찍기 바빴다. 석유자원을 국유화했던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이라크의 21세기 현대사도 찰라비와 같은 친미파 득세로 기록될 것인가.

(필자는 최근 해방정국에서 친미적인 이승만과 그에게 빌붙은 친일파들의 극우 정치노선을 비판했던 양심적인 지사들에 관한 책을 하나 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이다. 극좌ㆍ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려 했던 이들 지사들이 그려갔던 궤적을 오늘의 의미에서 새롭게 조명해본 것은 그들의 비극적 삶 자체가 지금도 귀중한 반사경이란 시각에서다. 아래 관련 링크는 <중앙일보>에 실린 필자의 책 소개기사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할 따름이다.)

관련 링크 http://www.joins.com/et/200304/15/200304151856551001600060106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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