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후 복구 주도권과 무기 사찰단의 복귀 등 몇가지 사안에서 국제사회와 갈등하면서도 점령국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 순조롭게 이라크 질서를 재구축해온 미국이 예상치 못했던 '복병'을 만났다. 24년간의 후세인 철권통치에 억눌려온 시아파 교도들이다.
<사진: 시아파 집회>
워싱턴포스트,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후세인의 몰락으로 시아파들의 욕구가 갑자기 분출되면서 시아파의 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미 정부를 당혹케 하고 있다고 23일(현지시간) 일제히 보도했다.
반미와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시아파는 이라크의 권력 공백을 이용해 지방 조직을 정비하고 반미 시위를 조직하며 이라크인들의 자결권(自決權)을 주장 이라크 정국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 찰라비에 ‘현혹’돼”**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그동안 후세인 정권의 축출에만 초점을 맞춰왔을 뿐 시아파의 대망(大望)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시아파-이슬람 근본주의 정부 연합의 탄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미 행정부가 이라크내 종교적·정치적 역동성에 무관심해 왔다는 것인데, 미 행정부 일부 인사들이 세속적 민주주의 옹호자인 아흐메드 찰라비에게 ‘현혹(dazzled)’돼 왔다고 이 신문은 평했다.
미국이 당황해하는 또다른 이유는 미국이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이라크내 최대 시아파 단체인 이라크 이슬람혁명 최고평의회(SCIRI)를 배후 지원하는 이란 정부의 목표와 의도를 알지 못해 곤란을 느끼고 있다고 레바논의 신문 걸프데일리뉴스가 전했다.
이에 미국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지난 21일 미 국방부에서 열린 군 장성급 회의에서는 시아파 문제와 이슬람 근본주의 봉쇄 등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도 “이란이 시아파 교도들에게 침투해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며 견제에 나섰다. 미군은 또 이란 공작원 등 적대적 행위가 의심되는 사람들의 이라크 입국을 차단하기 위해 이라크-이란 국경에 대한 순찰 활동에 나섰다.
***“후세인도 나쁘고 부시도 나쁘다”**
시아파의 힘은 일단 숫자가 많다는 데에 있다. 시아파는 이라크 인구의 65%를 차지한다. 바그다드 함락 후 시아파 성지인 카르발라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순례자들은 이미 1백만명을 돌파했다. 이들은 종교 집회와 반미 시위를 벌이며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치적 욕구를 분출시키고 있는데, 수적 우위에서 나오는 힘을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시아파들은 내부 조직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아파들이 이란과 같은 신정(神政) 국가를 추구할 수도 있다고까지 분석하고 있다.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면서도 대규모 순례를 조직한 시아파 성직자들의 보이지 않는 힘도 무시못할 요소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사진: 시아파 집회 장면>
시아파들은 현재 조속한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교리 충실도를 기준으로 최소 3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 미군의 장기 점령에는 한목소리로 반대한다. 시아파 과격파들은 같은 시아파라 하더라도 해외에서 활동한 친미 시아파 지도자를 거부하고 있다. 찰라비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에 대한 거부감이 그것이고, 최근 런던 망명 시아파 성직자 압둘 마지드 코에이가 살해당한 사건은 미국에 대한 거부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르발라에 온 한 순례자는 “후세인도 나쁘고 부시도 나쁘다”며 “이라크 국민을 대표하는 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원한다”고 말했다. 성지순례 조직위원회의 라에드 하이다리는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제 족쇄에서 풀려났지만 억압받았던 민족이며 반미시위는 그들을 억압하려는 어떠한 세력에도 반대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이라크인들과 시아파들의 자결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통치 능력 증명에 초점**
한편 시아파의 힘과 이란 배후 의혹으로 미국의 견제가 시작되자 역풍을 우려한 시아파 지도자들은 속도조절에 나서는 모습이다.
시아파내 영향력이 가장 높은 아야톨라 모하메드 바키르 알-하킴 SCIRI 의장은 카르발라의 순례 행렬은 이라크인들의 정부 운영 능력을 보여준다면서도 “우리는 이라크에 이란식 혁명을 이식해서는 안 된다”며 이란과의 연계를 부정했다. 그는 또 미군과의 싸움은 이라크 국민의 이익을 저해한다며 “나는 이라크의 안정을 위해 미국 등 어떤 세력과도 같이 일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시아파들은 지방 위원회를 조직, 재건 사업에 대한 기금 투입, 약탈된 자산 환수, 병원·발전소 등 주요 시설에 대한 민병대 파견 등으로 통치 능력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미군에 이어 이라크의 제2세력으로 급부상한 시아파들이 이라크 재건과 정부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고조돼고 있다. 국제사회의 저항과 반발은 무마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애초의 구상대로 이라크의 판을 짤수는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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