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에 대한 도전**
근대화, 식민지, 전쟁, 민주화, 산업화와 탈산업화 같은 상전벽해를 겪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가방끈"의 사회적 권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지난 한달간의 상황은 더욱 더 의미심장하다. 학연 빈약한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담론 권력을 독점하여 "우리가 말하면 정론이다"고 큰소리치던 조선일보는 국졸 학력의 홍재희씨의 '말빨'에 만신창이가 되어 끝내 명예훼손죄라는 더티플레이에 호소하고 있다. 여의도의 선량들은 물론 대한민국 최고의 학력을 뽐내는 도올 선생마저 "범인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감정평가를 내렸던 인터넷 살생부는 허탈하게도 고졸 학력의 노동자의 작품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반면, 촛불시위, 대통령선거, 인터넷 담론 부상 등의 일련의 사건에 즈음하여 제도권의 식자들은 여론을 주도할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최근의 연세대 송복 명예 교수의 "언어 폭력 인터넷"같은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비합리에 가까운 적대적 반응마저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가 크게 격동으로 물결친 지난 1년간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생각을 이끌어주었던 제도권 지식인이 있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 여론을 바꾸어놓은 지난 1년의 주역들은 홍재희씨, 피투성이 같은 올망졸망한 그냥 "우리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질문이 나오게 된다. 도대체 "가방끈"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조변석개의 무상한 시속의 담론을 잣대로 저 높은 학문의 산 위에서 순수 지식의 샘을 일구는 이들을 재단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인문 사회 과학자의 연구 주제가 태반이 바로 우리의 "시속잡사"이며, 더욱이 그들 스스로가 그를 활용하여 수시로 속세로 내려와 이름 날리는 것을 업으로 삼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격동기에서 "시속잡사"에의 효용으로 그 "가방끈"의 가치가 평가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브레히트의 연극 <사천의 선인>에서 어느 물장수가 말했듯이, "목마를 때 퍼낼 수 없다면 도대체 샘물이 무슨 소용인가?"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 사회"**
1967년 <문화간 문헌 연구소(CIDOC)>의 에버렛 리머와 이반 일리치는 선진국인 미국과 개발도상국인 남미 각 나라에서 교육 제도의 기능과 현실적 의미를 면밀히 조사한 뒤, "교육 제도가 비대해질수록 사회 전체는 지적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일리치같은 이는 학교라는 교육 제도를 장기적으로 해체해가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의 틀을 잡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이들의 연구는 각각 리이머, <학교는 죽었다>(한마당), 일리치, <탈학교 사회>(한마당)으로 번역되어 있다).
일리치의 이 엉뚱하게 들리는 주장은 다음의 비유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잘 곳 없는 이 누구에게나 친절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로 이름이 높았다. 이는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요 또 덕성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선"이 교회 조직이 공공으로 운영하는 "자선 기구(hospital)"로 제도화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나그네들은 이제 민가를 헤매는 일 없이 제발로 그 "자선 기구"를 찾아 가게 되었고, 기독교인 개개인들도 그 성가신 "자선"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모든 이들이 일상 생활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했던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이제 기독교인들도 이교도들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매몰찬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자선"의 가치를 폐기한 것은 아니다. 대신 사람들이 자선 기구에 큰 돈을 희사하기도 하고 거기서 일하는 성직자들을 성자로 숭배하도록 사회적 차원에서 일종의 제례(ritual)가 조직된다. "자선 제도"는 갈수록 비대해지는 반면 개개인의 품성은 갈수록 자선 정신과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만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있어 지식의 습득과 사고의 확장은 마치 숨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일상의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삶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 일터, 취미 생활 등 모든 영역이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지식의 습득과 사고의 확장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에 오로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테두리가 제도화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학교 이외의 사회 영역은 그냥 모두 시키는 대로, 하던 대로 생각없이 행동하는 영역으로 완전히 "탈교육화" 되었고, 공연히 거기서 생각하고 따지고 배우려 드는 이들은 고문관으로 몰리거나 "학교나 다시 가서 더 배우라"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반면 학교라는 조직과 제도는 엄청나게 비대해지고 사람들이 거기에 묶여 있어야 하는 시간과 기간도 끝도 없이 늘어간다. 상급 학력으로의 진출은 모든 청소년의 성스러운 의무가 되고 그 끝도 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고학력자'들은 떨어져 나간 보통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숭배'된다. 결국 이 "학교 제도"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보통 사람들은 점점 더 탈교육화되는 모순적인 두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리치가 옳다면, 결국 "가방끈" 숭배 풍조는 그 "가방끈" 담지자들의 출중한 지적 능력이 검증받아서 생겨난 풍습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가 탈교육화되면서 빚어지는 웃지 못할 사회적 제례(ritual)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가방끈"의 담지자들이 과연 그 숭배의 아이콘으로서의 합당한 내적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을 검증할 논쟁이라는 장치가 기존 지식계에서도 제도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판이 좁고 서로 다 빤히 아는 사이인 우리 나라의 환경에서 그것이 정말로 깔때기 역할을 해준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그 실제 능력 검증의 지표로 외국 어느 유명 대학의 학위를 땄다든가 유명 저널에 글을 냈다는가 하는 것이 대안으로 쓰이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외국 지식계는 무언가 우리와 다르려니"하는 우리 평민들의 환상에 편승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리치의 연구가 미국을 대상으로 나온 것임을 기억하라.
그래도 지식과 여론이 유통되는 채널의 수와 볼륨이 제한적일 때에는 그러한 "가방끈" 하나만으로도 권위를 재생산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일단 그 반론자가 유명 인사가 아닐 경우엔 출판, 매체, 방송 어디에서도 목소리 자체를 낼 수 없으니 청중이라야 호프집의 동조자 두 셋과 북어대가리가 고작이다. 또 상대가 유명 인사여서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진검 승부'의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너무 명사들인지라 되도록 논쟁의 방향을 '실력 차이'가 아닌 '견해 차이'로 이끌어 간다. 그렇게 논쟁이 용두사미가 되어도 논쟁을 주관하는 해당 매체는 "역시 범인들을 뛰어넘는 고담준론"이라며 어쨌건 양쪽 모두 빛나는 지성임을 선포한다. 비유를 허락한다면, 강호가 평안하고 모든 무술가들이 5대 정파 산하에 엎드린 상황에서는 소림사 방장 스님의 무공을 짚어볼 기회가 많지 않다. 오직 무당산 장문인 정도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주 드물게 그 둘이 붙는다 해도 피터지는 진짜 승부는 벌어지지 않는다. 자칫 한쪽이 무너질 경우 무림 전체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움이 시시하다고 투덜거리는 무지렁이가 있으면 누군가 꿀밤을 먹이며 윽박지른다. "네놈이 고수들의 세계를 아느냐. 스님의 저 1식은 평범해보여도 36초의 수를 숨긴 엄청난 것이니라!"
***인터넷과 새로운 지식 환경**
그런데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무림이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게시판에서 국졸이건 서울대 교수건 "계급장을 뗀 채" 글로만 승부를 내는 전투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드름을 피우며 숨으려 해도 구경꾼들이 우 달려들어 그 숨은 동작이 "36초의 초식"인지 "36계"인지를 금방 탄로내고 만다. 게다가 이 현상은 한국에만 나타날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프랑스, 캐나다, 멕시코 친구들에게 한국 웹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니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한글도 못 읽는 그들에게 몇 개의 대표적인 토론 싸이트와 웹진 몇 개를 보여주었더니, 그 조횟수와 댓글 쪽글의 부피만을 보고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지만 잠시 후 냉정을 찾은 이들은 이 같은 현상이 조만간 도처에서 나타날 것을 이구동성으로 예견한다. 지구화라고 하는 초유의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처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기존의 제도권 지식인들의 지적 권위가 실추되는 일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리치가 말한 물신화된 현대 사회의 교육 제도의 한 축인 "가방끈" 숭배가 지금 한국의 네티즌들을 필두로 전면적 도전에 처하기 시작한 것일까.
하지만 그 다른 한 축인 보통 사람들의 "탈교육화"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최근의 사태는 더욱 큰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일리치의 연구는 발표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이상을 실현시킬 방도가 만만치 않아 현실 변혁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노동조합이나 철거촌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대학생들의 학회조차 사라져버린 현실이 아닌가. 그런데 인터넷이 게임, 채팅, 포르노 말고도 바로 그러한 일리치의 "전 일상의 교육화"라는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피투성이라는 분은 막노동과 철공소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인터넷 토론을 통해 한국 정치에 대한 관점과 견해를 정립하였고, 그 견해의 탁월함과 문장력으로 인해 엉뚱한 방법으로나마 1급의 정치 논객으로 인증받고 말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인터넷 세상에서는 그리 특이한 경우도 아니며, 또 이러한 현상이 정치 논쟁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 한국 상고사 관련 싸이트에 모인 사람들의 논의의 수준은, 한단고기 진위여부 논쟁 정도에 머물던 10년전과 달리 고고학과 금석학의 최근 논의 성과가 운위되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90년대 초 몇몇 자칭 "평론가"들이 쥐고 흔들던 음악 영화 등의 문화판의 지형도 급속히 바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인터넷 동호회들에서 놀라운 속도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일리치의 이상인 "일상 속에서의 전면적 교육"인 것이다.
***지식 기반의 작업**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탈학교 사회"의 실현을 이루기 위한 조건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웹 공간의 지식 인프라가 될 양질의 콘텐츠를 국가 차원에서 공급해야 한다. 고도의 지식 산업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 등의 수사가 난무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지식 사회"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정책은 몇몇 대학에 독점되어버린 소위 "두뇌 한국 21"이라는 것 말고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국민 모두에게 고급 지식에의 접근도(accessibility)를 극대화하여 그 비용을 거의 제로로 만드는 것이 지식 인프라 구축의 요점임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누구나 근처 대학 도서관에 가면 영화사의 거작들과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 비디오부터 시작하여 조선왕조 실록이나 중국 미술사 CD, 블룸버그나 데이터스트림 같은 비즈니스 정보 들까지 쉽게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 싸이트 같은 곳은 한국 국민이면 누구나 이를테면 주민등록번호로 로그인하여 그러한 지식들을 웹에서 구해 볼 수 있도록 범위를 최대한 넓혀야 한다. 이러한 양질의 인프라가 없으면 우리 웹 문화의 발전도 금방 한계에 부닺히고 곧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상업화와 광고의 홍수에 묻혀버리고 말지 모른다.
둘째, 우리 네티즌들 스스로가 호기심과 정보의 장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동안 웹 공간과 거리를 유지해온 식자 분들에게 글 좀 쓰시라고 정말로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우리 2천만의 네티즌들은 지금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가르치는 문화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 내각제 파문에 어리둥절한 이들은 정치학 공부한 이들에게서 관련된 정보와 지식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관공서에서 일하는 분들은 민영화 문제로 토론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경험을 전해 줄 수 있다. 뜻 있는 분들 배운 분들이라면 더욱 서로가 서로의 빈 머리를 채워준다는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할 때이다.
사족이지만, "탈학교 사회"의 전망은 이상주의적 목표가 아니라 21세기의 지식 사회를 일구기 위한 지상 과제임이 분명하다. 첨단 지식의 유통 주기는 극도로 짧아지고 인간사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기존의 지혜는 고갈되고 있는 현재,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학교와 일상을 오고가야만 하는 체제라면 시간에서나 비용에서나 결코 경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생활의 현장에서 일상 활동과 교육 활동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일리치의 생각은 그래서 낭만주의이기는커녕 미래 지향적 지혜인 것이다.
***필자 소개**
필자 홍기빈은 현재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소장학자로, 외국에 체류중이면서도 국내외를 넘나드는 다양한 이슈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여러 온/오프라인 매체에 보내며 많은 반향을 얻고 있다. 프레시안 연재글의 제목 '현미경과 망원경'은 정치와 경제, 국제와 국내의 이분법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자 하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와 논문「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등이 있으며 역서로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外>(책세상) <자본론을 넘어서>(백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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