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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3場ㆍ끝> 沈沒하는, 巨大한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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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3場ㆍ끝> 沈沒하는, 巨大한 <에필로그>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울산 현대중공업 앞 백화점 지하 식품점 안의 꽤 넓은 술집, 아니 밖으로 노출된 술터다. 순대국 끓는 솥이 김을 내뿜고 소주와 막걸리 병들이 각 자리마다 여러 병씩 놓여있다. 가스렌지에 고기를 굽는 축도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주된 손님들이다. 사실 이곳은 퇴근한 노동자들이 자주 들리는 단골집이자, 울산의 명소다. 그들은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고 개중엔 몹시 취한 축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거대한 집단성을 내뿜는 것이 타자에게는 위압적이다. 그들의 표정이 어째서가 아니다. 그들의 표정은 찌든 데가 별로 없다. 그럼 작업복 때문에? 그래, 검푸른 작업복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제복이 그렇듯이.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그들은 좀더 본질적인 뭔가 거대한, 이를테면 운동장보다 더 큰 선박을 함께 건조하여 바다로 띄어 보낸 자들의 거대한 동질감을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다. 그 속에 ‘현대중공업’ 작업복 차림의 친구 2와 허름한 양복차림의 남자가 뒤섞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둘의 토론은 매우 진지했지만, 노동자 집단 속에서 완연 왜소하기도 했다. 그럼 노총과 다른 게 뭐야? …. 남자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겠다는 투로 물었다. 혁명적이라는 거지…. 친구2가 답했다. ‘혁명적'이라. 그 말이 남자를, 가슴 설레게 했지만, 그것은 너무 오래된 설렘이었다. 어떻게? 노동조합만 갖고 되나? 노조 이기주의란 것이 분명 있는데? ….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그 완강한 낡음의 기억을 겨냥하여 스스로에게 묻는 거였는데, 친구2는 마냥 느긋했다. 물론, 그걸 넘어서야 해…. 친구2의 말투는, 그답지 않게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어떻게? …. 하나씩, 하나씩, 의식화 시켜가는 거야…. 그의 대답은, 남자로서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되는 걸. 뻔한 것을…. 뭘 묻고 뭘 대답한단 말인가…. 그러나 습관처럼 질문이 이어졌다. 언제까지? …. 백년이 걸리든 천년이 걸리든. 꼭 우리 대에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 그거야, 우리 대에 잘 하고, 그러고도 백년이 걸리는 일이라면 좋지만…. 물론, 쉴 수는 없는 거지…. 그게 끝이었다. 예상대로였다. 대화는 그렇게 일사천리로, 남자에게는 급전직하로 끝났다.
노동자들이 벌써 세상 도처에서 들끓고 있었다. <전노협투쟁가> 흐르고, 86년 민주화 대투쟁, 포클레인을 동원한 노동자 대파업 사진들이 깔리지만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그 거대한 집단성을 배경으로 쓸데없이 누추하거나, 쓸데없이 살기등등하거나 그 둘 다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이 지워지고 원래 장면으로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친구1과 여자도 끼어 있다. 사태가 급박하다. 친구2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안돼. 너무 빨라. 아직 조직도 없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구…. 무슨 소리야. 벌써 노동자들은 저렇게 일어서고 있어.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찬스야. 넌 그것 때문에 포항제철에서 이리로 옮긴 것 아냐? …. 친구1이 목 심줄을 돋워가며 열을 올렸다. 친구2가 이번에는 지지 않았다. 넌, 그러니까 테러리스트 소리를 듣는 거야. 지금 우리에게 뭐가 있니? …. 친구1이 발끈했다. 테러리스트? 이런, 비겁한 자식! 그러면서 니가 무슨 노동운동가라구!…. 친구2가 이를 꽉 깨물고 친구1에게 격한 말을 하려 할 참인데, 여자가 흐느낌을 양 손으로 감싸며 무너졌다. 무서워요, 난. 이건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 너무 엄청나…. 남자의 멍한 얼굴. 정지. 친구1의 음성. 이봐, 자넨 왜 말이 없나? 자네 의견은 뭐야?…. 다시 같은 장소, 흩어지며 커다란, 질타하는 삿대질의 손가락. 두 개, 수십 개, 그것이 박자에 맞추어 들었다 내렸다하는 수백, 수천의 팔주먹으로 변해가고. 그러는 동안. 환호소리. 박수갈채 소리. 최루탄, 지랄탄 터지는 소리. 핸드폰 스피커로 뭐라 왕왕대는, 경찰과 데모 지휘 군중들의 소리가 뒤엉킨 소리.
신촌 로터리다. 이한열 장례식을 겸한 대규모 집회가 벌어지고 있다. 한 가운데 이한열 꽃상여가 보이고 사람들이 로터리를 꽈악 메웠다. 카메라 그들을 비추다가, 연세대 입구 쪽 전철 역 지붕 위에 서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가면, 애인이다. 그녀가 팔을 하늘로 뻗으며 구호를 외쳤다. 노동해방 쟁취하자, 쟁취하자! 자본가세상 때려 부수자! …. 그렇게 외치고 여자가 다시 전철역 지붕에서 내려와 로터리 군중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카메라는 형사의 시선이다. 여자를 계속 추적하지만, 여자는 끝내 대중의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위로 겹쳐지는 노조 지도파업회의 장면, 권양 성고문사건 장면, 박종철 고문치사 장면, 그런 것들을 규탄하는 국민대회 장면, 연세대 철야집회 민주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 장면 등이 겹쳐지고, 순서가 혼동되고, 그 사이 사이로 80년대식 고도성장, 특히 현대자동차의 공정과 삼성전자의 반도체 등 부가가치 산업 공정이 끼어들며 대비 되었다. 그 중 파업회의장 장면이 현실화 되면, 친구2가 애원조로 만류했다. 글쎄, 내 말은, 우리 힘이 아직. 그리고 이것은 분명 음모란 말야. 우리가 깽판치게 놔두었다가 민심이 돌아섰을 때, 한 몫에 없애버리자는 음모라구…. 그리고 복작대는 연세대 학생회관 휴게실. 학생 및 시민참가자들이 오가며 웅성대고 그러는 와중에 진행되는 민주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 사진이 현실화되면 친구1이 열변을 토했다. 밀어붙입시다, 여러분. 죽기를 각오한 노동자의 정신을 우리는 보았지 않습니까. 그 정신으로 맞서면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비디오다.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노동자들이 모여 파업결의 대회를 열고 있다. 함성소리. 경찰과 대치하며 묵중한 철근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노동자들. 그 중에 친구2가 섞여 있었다. 그가 여러 노동자들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쌓다가 그 중 한 사람을 옆으로 끌어내어 말했다. 모처럼 급박하게. 그러면 차라리, 우리 모두 죽을 각오로 공장시설을 점거하세. 골리앗은 도망이야…. 친구2 얼굴 클로즈업, 그 위로 친구1의 음성. 그, 그건, 말도 안돼…. 아직,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투쟁 중이라구. 사회주의? 말도 안돼, 그건. 그걸 지금 어떻게…. 난, 사회주의를 다 믿지도 않고….
암흑. 암흑이 뭉쳐 형상 지어내는 검은 실루엣의 골리앗 크레인. 그것이 현실화하면, 골리앗 계단을 내려오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추위와 주림에 지쳤지만, 패배조차 뭔가 거대하고 웅장하다. 이 모든 장면에. 메이데이, 11. 13전태일 기념대회 장면 사진이 묻어나고 현실화하면 그 안에 전태일 어머니, 그의 친구 1, 2, 남자, 그의 친구1, 2, 여자가 따로 따로 보였다. 시위를 막기 위해 동원된 경찰병력들, 그리고 이리저리 두리번대며 누군가를 찾는 형사들도 보였다. 사진 하나가 현실화하면, 여자가 유인물을 돌리다가 노동자들 자신에게 쫓겨나고, 남자와 전태일 어머니가 그것을 망연자실로 보고 있었다. 왼팔을 한껏 추켜올리며 구호를 외치는 지하철 노동자를 그린 대규모 걸개그림을 배경으로 ‘전노협의 깃발 아래’ ‘노동자도 인간이다’ 등의 플래카드, 만장 혹은 깃발이 펄럭였다. 태일 친구1, 2는 연단 주변을 돌며 부지런히 행사준비를 챙기고 있었다. 전노협 구호를 외치는 청계피복 노조원들. 그 중 한 명은 전태일과 같이 공장을 다녔던 여공이었다.
검은 법전. 줄어들면 남자의 방안. 그가 마르크스--레닌 원전을 공부하고 있었다. 클로즈업 되는 원전 페이지. 그 위로 남한 및 서구권의 고도 경제 성장 사진, 그 사이 간간히 무너지는 레닌--마르크스 동상, 덮어주는 사람 없이 그냥 언론 플래시 앞에 나뒹구는 불덩이 육체들. 동독인의 베를린 장벽 철폐, 동구권의 대탈출, 챠우체스쿠 처형, 호네커 망명, 동구권 붕괴, 고르바쵸프--부쉬의 정상회담, 신문의 냉전 해소 헤드타이틀. 맞아 죽는 강경대. 지랄탄 가스에 질식해 죽는 김귀정. 클린턴에 패하는 부쉬, 옐친에게 쫓겨나는 고르바쵸프 사진. 그 사이, 노태우--고르바쵸프 수교 김영삼 대통령 당선 등 한국사진이 이어지고, 눈에 띌 정도로 위축된 집회사진이 이어지며, 현실화하고, 그 안에 남자, 여자, 친구2, 어머니, 태일 친구2 등이 보였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이상하게도, 내겐 80년대가 순식간에, 그냥 덧없이 지나간 듯 보인다. 그렇다. 격정이 있었고, 거대한 멸망이 있었다. 열광적이었으나 너무도 아련하게, 패배를 예감했던 시대. 그렇다.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 대륙만이 아니었다. 선한 것, 더 나은 것, 인생의 의미를 찾는 행위 그 자체가, 해체되고 있었다. 내겐 모든 것이 변절이었고, 아픔이었다. 신문은 그 모든, 거대한 죽음을 부추겼다. 그리고 내겐 신문 자체가 아나키요 죽음이었다.
선거와 민중운동과 정치권의 삼겹 사진들, 인물들 클로즈업. 그 중, 유세장 마이크 앞에서 친구1이 온갖 제스츄어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해, 통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암흑. 친구2의 음성. 전태일 영화를 만들려는데 말야….
암흑이 갑자기 밝음으로 뒤바뀌면서 1993년 신촌의 신세대 카페다. 실내가 밝고 우아하고 표 나지 않게 고급스럽다. 손님 대부분이 ‘물 좋은’ 신세대 청춘남녀들이다. 그들이 구티나는 남자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그리고 턱수염이 더부룩한 친구2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지들끼리 시시닥대고 그랬다. 친구2는 여유만만이었다. 영화? 전태일을? …. 그래, 전태일…. 의아해하는 남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2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 글이, 너무 어렵단 말야. 대중적이질 않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친구2에 대해 크게 낙담하는 남자 얼굴. 전인권이 부르는 <사노라면> 흐르고, 느리고 고요하게 그러나 찢긴 상처를 동반하며 키우듯 흐르고, 남자 얼굴 흩어지면 광화문에서 경복궁 올라가는 길목 건너편에 있는 카페 전인권 연습실을 그대로 카페로 개조해서 손님들은 마주 보지는 못하고 공연장을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오른쪽엔 배우 허장강 사진이 오른쪽엔 문정숙 사진이 크게 그려져 있다. 분위기가 그렇게 회고적이고 우중충하지만 손님들은 ‘음악과 연예인을 좋아하는’ 신세대가 대부분이고 그 중간 중간에 간혹 ‘전인권 노래를 좋아하는’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이 끼어있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 등 다른 연주자들은 물러나고 전인권이 혼자 기타를 치며 <사노라면>을 부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한쪽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여자가 젊은 축들을 둘러보다가 몸을 휘영청 가누며 말했다. 참, 좋다, 정말. 더럽게 좋네…. 후회하는 거야? …. 조금 취한 듯한 남자가 무척 가볍게 말했지만 역시 우울했다. 우울함이 그의 뼛속까지 사무친 듯 했다. 아니? 뭐, 그냥 처량한 거지…. 여자는 말 내용에 비해 오히려 여유와 발랄함이 있었다. 하, 나도 음악이나 다시 할까 봐…. 남자의 말을 기다리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여자가 말을 이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해도 먹곤 살겠지…. 저 새끼들 죽여 버릴까? …. 남자가 아주 힘없이 그러나 살기를 번득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여자는 딴청을 했다. 오늘, 왜 보자 그랬어요? …. 뭐 그냥 보고 싶어서…. 여자가 시답잖은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윽박조로 나왔다. 그냥 보고 싶으면 안 되나? …. 쓸데없는 소리. 모두 거덜난 청춘인데, 뭐…. 그 소리가 어찌나 쓸쓸한지 남자가 멈칫했다. 한참 뒤에 남자가 다시 말했는데, 톤이 딴판이었다. 아니 동전의 양면이랄까. 통금 해제한 인왕산 좋다더라. 김영삼 문민정부가 그거 하난 잘했어…. 으흥….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투다. 남자 말투로 보아 설령 관심이 있단들 그것을 내색하면 좀 어긋날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이번에는 절박하게 인왕산을 들먹거렸다. 밤엔 특히 좋데…. 여자는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려 했다. 뭐, 좋겠지. 밤에 데이트라. 인신매매범에 인육살해범만 없으면….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지금, 가자구? …. 응…. 남자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이 그녀의 가슴을 예리하게 베고 지나갔다. 에이 설마. 정말 지금 정말 가자구? …. 으응….
경복궁 돌담을 따라 삼청동 올라가는 찻길. 간혹 오르내리는 택시들. 전체적으로 반짝이는 것은 모두 죽음을 상징한다. 암흑. 어둠 속이다. 어둠이 참으로 명징하게 두 사람의 발에 묻어난다. 발에 밟혀 바스락대는 잎새와 몸을 굽히는 풀들에서도, 눈을 때리는 나뭇가지에서도 촉촉한 어둠이 묻어난다. 장중한 음악이 깔린다. 두 사람의 윤곽이 어둠 속에 반짝였다. 고요. 이슬의 검고 축축한 고요. 나무에 풀에 잎새에, 땅에, 육체에, 신발에, 그 모든 것에 묻어 반짝이는 촉촉한 어둠의 고요. 어둠 속에 더욱 검은 산의 윤곽. 어둠의 액정처럼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 이슬방울. 이 모든 것이 죽음의 긴장과 응축된 평화. 음악 잦아들면서 태일음성.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1970년 8월 9일
검은 산 음악 다시 차오르고, 다시 산, 거대하고 검은, 어둠이 깊고 명징한 산. 지친 발걸음의 어둠 속 뒤엉김. 포옹의 뒤엉김. 음악 갑자기 끊어지고, 시계, 시침과 초침. 채깍 채깍 소리. 암흑. 터질 듯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어둠의 고요. 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전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여자 음성. 아악! 이 개새끼야! 죽지마, 죽으면 안돼! …. 놔, 이거. 난 도저히 쓸모가 없는 놈이야…. 엉엉. 안돼, 이젠 안돼. 엉엉, 사랑한단 말야. 내가 너를 사랑한단 말야, 개자식아. 우린 더 가야 해. 흑흑. 사랑해…. 거대한 산. 거대한 어둠의 안온함.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 다시 떨어지는 물방울. 태일 음성.
--무수히 많은 순간들은 시간이라는 유형의 너울 위에 많은 측의 물, 물, H2O. 아름다운 것을 보았느냐고요. 네 보았습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았습니다.
두 남녀의 희미한 윤곽. 턱을 괸 남자, 그 몸을 껴안은 여자. 어깨가 흔들린다. 울고 있다. 금희와 태일의 음성.
--정말 불행한 사람은 난 수도원의 수녀라고 생각해요, 오빤?
--왜 수녀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산. 오두마니 앉아 산 아래 사람 사는 곳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여자. 그 위로 산 아래 활기차게 이어지는 대낮의 삶. 남자와 여자 모습 흐려지고, 저녁에 어스름에 젖는 산 아래. 아스팔트, 산동네 불빛. 이 때부터 산이 다시 어두워지고 깜깜해질 때까지, 산과 사람 사는 동네가 아주 느리게 대비되면서, 산을 내려오는 두 남녀. 그러는 동안 윤선애가 부르는 <하산> 흐른다. 노래는 아주 청아하게 그러나 인생살이의 간고한 깨달음을 구석구석 유구하게 빛내면서 흐른다.

저 아래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상가
아스팔트길 건너 산동네 불빛
멀수록 아늑하게 반짝이는데
그래 약속 하는 거야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그냥 빛일 뿐이지
스스로 간절한 줄을 모르고
그래 약속하는 거야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에필로그

더운 여름날 토요일 오후. 시청에 솟는 분수. 시청 앞 전광판 시계. 만발한 꽃. 화사한 차림으로 유쾌하게 걷는 대낮의 군중들. 정지. 다시 빛바래짐. 그 위로, 전태일 분신 장면. <그날이 오면> 깔리고, 그 불 속에, 길에 버린 순덕을 향해 언덕을 넘어 달려가던 태일의 마라톤, 그 위로 그의 생애의 가난한 장면과 그의 죽음 이후 증오의 장면들, 즉 운동권의 다툼과 권력의 잔인한 폭력이 겹쳐진다. 불이 그것들을 태우며 빛바랜 군중에 다시 살아있음의 총천연색을 부여한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그래,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름 하나…. 전태일…. 아, 역사란 그토록 잔인한 것을. 그가 명징한 정신으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난 비로소 그의 죽음에서 벗어났다. 그렇다. 나의 죽음, 내 안의 시대의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유토피아적 한계를 벗고, 현실의 예술세계와 같아질 수 있을까? 있어야 한다.
남자는 소비에트가 망한 90년대의 허무감 까지도 감싸 안는 새로운 변혁운동의 모양을 어렴풋이, 벅차게, 느낀다. 군중들 광경 위로 오케스트라 속에 자리를 잡은 비올라주자. 여자다. 그러나 음악은 마렝 마레…. 처음의 음악이고, 실내악이다. 여자는 비올라 주자가 되었다. 남자는 컴퓨터 회사를 차렸다. 자본주의가 남자에게 허용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니 아직 남자가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남자는 이따금씩 은밀한 경로로 태일 친구들과 ‘접선’하며 묻는다. 전태일이 삼각산에서 뭘 했다고 그러더냐…. 태일 친구들은 그런 그를 귀찮아 한다. 이 시절에 그 정도 질문을 쉬쉬해가며 하는 그가 우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그 행위가 소중한 추억 때문에 생긴 기벽인지, 그가 아직 미쳐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음악은 마렝 마레, ‘tableau de l'operation de la taille’ 연습곡? 담석 수술대 위에 마취 상태로 놓인, 혼미한…. 무표정하고 매가리 없는 의사의 목소리가 끝없이, 한없이 가라앉는, 마치 모든 것이 가라앉음 뿐, 밑바닥은 없다는 듯이…. 아, 그렇다. 사람은 없고, 온기도 없고, 기억만 있다. 텅 빈 강의실에 잉잉대던 연습곡, 교수의 목소리, 악기, 소리의 기억만. 시장통 소음 속에…. 그것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음악을 닮은 타자 자막.
--친구1은 현재 국회의원이다. 친구2는 소식이 없다. 그가 전태일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일 것이다. 선배는 소식이 없다.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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