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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2場> 憎惡의 監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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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2場> 憎惡의 監獄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흩어지면,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아주 느리게 나오면서 영상들이 겹쳐지고 이어진다. 고층건물 옥상 통풍구에 유인물을 쌓아놓는 친구1.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그. 고층건물 옥상에서 무수히 날리는 유인물들. 정지 ‘독재정권 타도하자’, ‘타도하자 박정희!’ 다락방에 숨어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떠는 남자. 정신병원 환자들, 발광하는, 그 위로 겹치는, 치솟는 고도성장의 빌딩과 공장들. 부잣집 담벼락을 타는 친구2, 담벼락에 유인물. 잠복경찰에 체포되는 친구1. 포항제철에 취직, 고로 앞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친구2. 이글이글 끓는 용광로 쇳물. 그의 장화에 튀는 쇠똥. 정신병원 환자들의 표정, 멍청하고 평화로운. 형사 두 명에게 연행되는 남자. 거의 넋이 나간 상태다. 전면을 채우는 고문의 형광등 빛. 더욱 고도성장한 빌딩과 공장들. 초현대식 설비들.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남자. 볼펜이 끼워진 채 짓뭉개지는 손가락과 발가락,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정신병원 환자들, 그 안에 비실비실 웃고 있는 남자, 빡빡머리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아, 미친 세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므로,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지금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 어느 것도 아는 것이 없으므로 더 많은 고문을 당했다. 나는 무엇보다 나를 증오했다. 증오. 마침내 나의 감옥이 된 나의 증오…. 나의 증오? 그렇다면 그의 무엇이 사랑이었단 말인가? 그래, 전태일. 그때만 해도 벌써 그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는 훨씬 줄어들었다. 아니, 그가 살았던 때에도, 그는 주변으로 밀려난 노동자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육성한 중화학 분야 노동자들은 평화시장 노동자와 달랐다…. 그런데, 왜 그의 죽음이, 이렇게 70년대까지, 아니 80년대까지 앞으로, 그토록 길게 이어지는 것이었을까?
휘발유통. 검은 근로기준법 책자, 그 위로 붙는 불, 그 위로 같이 불타는 박정희 대통령 영정. 그 위로 깔리는 80년 5월 광주 학살 장면, 그 장면 동안. 남자 음성.
--미친 세상이었다. 죽음이 뗏무더기로 쌓여나갔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여럿이더라도 도움이 안 되는 학살의 시대였다. 증오의 시대였다. 감옥이 되어, 남한 전체를 가두어버린 증오. 증오가 스스로 증오를 파먹고 사는 증오의 세상. 미칠 것 같은 세상. 우리들은 모두 그 증오를 배웠다.
광주 시민들 도청 점거 및 집회 사진. 그 위에 남자 음성.
--참혹함 속에 물론 빛의 세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빛에 난 눈이 멀었다. 그래 난, 암흑 속으로 암흑 속으로 도주했다.
정신병원 면회실. 남자 부모와 여자, 그리고 여섯 살 박이 아들도 있었다. 아이는 여자가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멀뚱했다. 그렇다고 여자 얼굴에 괴롭거나 애처로운 표정이 깃들어 잇는 것도 아니었다. 독하다고까진 할 수 없어도 여자 얼굴은 매우 지쳐있고, 그 피로가 굳어 매우 강팍해보였다. 남자가 전태일의 단순작업 동작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품(의류)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희들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삼선 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음미합니다…. 무슨 소린지 귀담아 듣다가 어머니가 ‘어이구, 이눔아야’하고 자지러졌고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 친구 오늘 좀 심한데요? 좀 나은 것 같았는데…. 면회 담당자가 위로 투로 말했다. 병원 밖이다. 아이의 눈이 제 어미를 빤히 쳐다보고, 남자 어머니와 아버지 눈에 어떤 애원의 빛이 반짝인다. 여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끝내 그 눈길을 뿌리치고 등을 돌려 떠났다. 다시 정신 병원 실내. 평화와 발광웃음이 뒤섞인 표정의 동료 환자들 속에 방금 전처럼 전태일의 작업 동작을 계속 하고 있는 남자.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물론 나는 위악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미친 것 아니었을까? 그래. 나는 다시 그녀와 내 아이를 그리고 부모님을 만났다. 서른 다섯 나이에. 하지만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얼마나 변했던 것일까?
정신병원을 나오는 남자. 등 뒤로 닫히는 정신병원 문. 그것이 흩어지면, 1983년. 6월 20일 출간된 전태일 평전. 제목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줄어들면, 그것을 읽고 있는 남자. 그 위를 덮치는 압수--수색 영장. 줄어들면 압수수색 당하는 출판사 사무실. 다시 그것에 겹치는 출판금지 처분 영장. 그러나 그 책은 노동자들 사이에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고 비합법 유통 경로를 통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것을 읽는 노동자 소규모 모임들이 생겨났고 거기서 특히 구로공단 지역의 민주노조 결성투쟁 열기가 불같이 일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 그곳은 여전히 바닷 속이었다.
남대문 시장 입구다. 남자는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시위대가 건너편 화려한 호텔을 점거했다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최루탄이 마구 쏟아지고 삽시간에 거리가 연기로 가득 찼다. 남자는 허둥지둥 길가의 군중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군중들이 데모대에 호응하고 곧바로 그 쪽으로도 최루탄이 수없이 날아들었다. 최루탄은 남자가 피하는 곳마다 와서 터졌고 남자는 마침내 포목점 앞에서 쓰러져 배 안의 것을 모두 토해냈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자가 혼자 기진맥진하여 한참 동안을 기어갔다.
남자는 공개운동 단체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잡무를 도왔다. 정신 병력이 있는 그를 아무도 회의에 끼어주지 않았지만, 농성이 벌어지면 그가 꼭 밤샘을 했다. 가끔 전태일 흉내를 내는 것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 그를 동정했을 것이다. 당시 어느 날 남자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 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우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남자가 공개단체 일을 지루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개운동단체의 단순반복 행사와 사무가 전태일의 그것처럼 뭔가 운명적이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레 체득하기는 했다. 남자가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였다. 노동자 박영진이 다시 분신자살을 했고 운동권이 그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더 온건해진 공개운동권과 더 과격해진 비합운동권이 그의 장례식을 둘러싸고 일전불사의 대립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남자가 우연히 들른 민통련 사무실이다. 어지럽게 진열된 찌라시와 포스터들, 그 중 제일 크게 걸린 박영진 열사 장례준비위 포스터. 여자와 태일 어머니, 태일 친구1과 2, 그리고 남자의 친구1이 탁자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분위기가 살기등등하다. 태일 어머니도 여자도 거의 표독스럽다. 카메라는 남자의 시선이다. 그들의 격한 토론 광경이 갈수록 크게 잡힌다. 어머니가 아예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말한다. 글쎄, 난, 그렇게 못해. 내 아들은 그런 과격분자가 아냐…. 여자가, 달래는 투는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 그러나 독기를 굳이 감추지 않고 말한다. 전태일은, 어머니만의 전태일이 아녜요. 모든 노동자 계급의 전태일입니다. 태일 친구1이 하, 하고 어이없어 하다가 다시 결기를 돋구어 탁자까지 손으로 치며 삿대질을 해댈 듯 고함친다. 노동자 계급? 당신들이 지식인이지, 노동자야? 난, 태일이 친구야. 내가 노동자라구. 그런데 뭐 우리한테 노동자 계급이 어째? …. 그런 얘기가 아니라…. 친구1이 그렇게 끼어들었지만 목소리나 거동에 중재 의욕은커녕 경멸이 묻어났고, 그 기미를 눈치 챈 태일 친구1이 더 언성을 높히면서, 막말로 나갔다. 아니고 밖이고. 당신네 배운 사람들이 노동자를 뭘 안다 그래, 엉? …. 여자도, 친구1도 발끈할 참인데, 어머니가 더 화를 내며, 그러나 잘근잘근 씹는 투로 끼어들었다. 우리 아들은 그런 거 몰랐어. 우리 아들은 빨갱이가 아냐…. 여자가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아녜요. 어머니가 모르신 거죠. 그래요. 어머니는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의 어머니가 아녜요!….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태일 친구2가 어머니를 위해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나려 했지만, 어머니는 피해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주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래, 난 아녀. 난 죽은 내 태일이, 고생하는 걔 친구와 어린 후배들의 어머니지, 니 놈들의 어머니 아녀…. 어머니, 그건 잘못하시는 말씀입니다.
친구1이 그렇게 정색을 하며 뭔가를 돌이키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어머니, 어머니 하지 말어. 난 니들 어머니 싫다…. 그렇게 어머니가 아예 말을 짤라 버렸다. 그때였다. 여자가 눈에 이글이글 증오를 불태우더니 몸을 일으키고 책상을 탕탕치며 어머니를 노려보는 채로 말했다. 하지만 전태일은 우리 노동자의, 역사의 전태일이란 말입니다, 아셨어요? ….아니 근데 이 여자가? …. 태일 친구1이 아예 멱살 드잡이로 나올 기세였고 여자가 ‘뭐요? 이 여자?’ 그렇게 지지 않을 참이었지만, 순간 그녀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경악으로 가득찼다. 어머. 어머, 어머나!…… 그 표정 정지. 그 위로 친구1의 음성. 자네, 언제 나왔나? …
야경. 밤이다. 자동차며 거대한 콘테이너 화물차 등이 흐르는 강의, 어둠과 헤드라이트. 야경이 몇 년 전처럼, 그러나 몇 년 전보다 더 화려하게 저 아래 떠가고 다리 위로 지나가는 전철. 그 유리창 속으로 카메라 들어가면 다소 한적한 전철. 의자에 앉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친구1. 여자는 지친 듯 머리를 꾸벅대며 졸고 남자와 친구1이, 다소는 어색하게,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전철 안은 무표정한, 피곤에 지쳐 귀가하는 사람들. 달라진 것이 있다. 스포츠지들의, 음란한 만화와 사진들. 다시 바깥 야경. 깔깔대며 치솟는 모습의, 그러나 어딘가 지쳐버린 불야성의 건물들. 이것도 전과 같지만 전보다 더 화려하고 그만큼 더 지쳤다. 카메라 다시 전철 안으로 들어오면. 남자가 말했다. - 자네도, 전태일에게서 증오만 배웠군…. 친구1은 대답이 없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내가 아직 미친 것 같애? …. 미치겠는 건 나야…. 친구1이 진저리를 쳤다. 자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 남자가 물었다. 왜 이리 반복이 많지?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고, 절망적인 기분에 일순 사로 잡혔다. 친구1이 대답했다. 뭐 되는 일도 없고. 하긴, 안되는 일도 없지만…. 여자가 무심코 남자 어깨에 머리를 기대려다가 멈칫,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 사람은? …. 남자가 그렇게 물었고, 친구1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우리 그루빠 활동가일세. 대단한 활동가지. 얼마 전에 만났네. 고생 많이 했더군…. 선배는? …. 나도 몰라. 통 소식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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