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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1場> 藝術의 獨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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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21場> 藝術의 獨白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환상을 깨며 철문 열리면 골목길이다. 골목길에 물고기가 들어차고 골목길 변하여 수족관, 그것이 줄어들면, 아주 고급스러운, 실내가 밝은 레스토랑이다. 카메라가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비추면서, 친구1의 음성. 그거야 맨날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어울려 노니 되나? 지금은 그들이 운동을 대표하지 않아. 지금이야 단연, 대기업 노동자들이지. 길게, 오래 봐야지. 대기업 노동자들을 봐야 해…. 친구1과 친구2, 그리고 화자가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친구1은 수감생활을 마악 마치고 나온 상태로 머리가 짧았다. 감옥생활을 아주 강인하게 한 듯, 얼굴 표정에 검은 근육질 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친구2가 제 혼자, 그러나 분명 친구 1을 겨냥하며 말했다. 바다에 떠있는 고도 같으니, 너는?…. 이 친구 또 염불 시작이군…. 친구1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친구2를 도외시했다. 그러나 남자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친구2가 여전히 중얼거리듯, 이번에는 친구1을 딱히 겨냥하지는 않고 말했다. 대중은 헤엄칠 바다, 혹은 같이 헤엄칠 물고기떼다? 아주 은밀하게 포섭해야 할 대상이다? 언제든 나를 고발할 수 있는 위험분자다? 아니지…. 그것만이 아니지…. 무엇보다, 사람은 물고기떼가 아니다…. 나 이거, 미치겠군. 근데 이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냐?…. 어항의 물고기들이 변하여 어물전 진열대, 줄어들면, 친구1은 갔고 남자와 친구2 둘이서 영등포 어물시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생선들이 묘한 살기와 생기를 발하고 암울한 시대의 어떤 광기의 육체마저 상징했다. 남자가 친구2를 깨질세라 감싸 안는 투로 말했다. 정말, 소설을 쓴단 말야?…. 으응. 왜 못 믿겠어?…. 친구2는 그렇게 감싸 안기면서도 매우 섭섭하다는 응석투였다…. 어떤 얘긴데?
--한 사람이 있었다. 고요히 죽어간다. 그 친구가 있었다. 그도 고요히 죽어간다. 그의 애인이 있었다. 그녀도 고요히 죽어 간다….
좀 우울한데?…. 남자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안 되나…. 그런 남자를 마치 위로하듯이 친구2가 말했다. 좀 단순하지, 응? 그럼 이건 어때?…. 그가 뭘 외는 자세로 걸음걸이를 조정하며 말을 이었다.
--비--1은 기성세대. 혼란기 속에서 형성된 에고이스트. 비--2는 기성세대 사고방식에 항의하는 내성적 휴머니스트…. 현 사회는 비--2를 멸시하고 비--2는 인간으로써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몰수당한다….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멈추었다. 그, 그건, 전태일이 쓰려했던 거잖아?…. 그렇게 망치로 얻어맞은 듯 몸이 굳은 남자를 친구2가, 위로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 그가 차렷 자세로 말했다.
--옛!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생선들, 정지. 그것이 알몸의 포르노테이프 광고로, 고문의; 알몸으로 다시 알몸의 포르노로 뒤바뀐다. 계란 껍질을 까는 가녀리고 흰 손.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누나가 계란을 사주었지. 빈 깍지를 기념으로 두려고 그랬는데 누가 그 귀중한 것을 깨어 버렸다.
와지끈 구둣발에 짓밟히는 계란껍질. 장면 흩어지면, 공상. 창녀가 된 여자. 여자를 겁탈하려는 남자. 격렬하게 저항하는 여자. 안돼, 제발. 안돼!…. 그렇게, 고개를 완강하게 가로 저으면서도 겁탈을 계속하는 남자. 그 위를 다시 겁탈처럼 덮치는 평화시장 작업장.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그 사이에 보이는 태일 모습.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무의미하게. 내가 아는 방법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무아지경이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도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에 알아야 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작업장 사라지면 겁탈 장면. 육체가 따로 놀아 악마처럼 여자를 능욕하면서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남자가, 절규했다. 아아, 제발. 용서해줘요. 다신 안 그럴께요, 다시는…. 그 뒤로 이어지는, 태일 음성.
--끝남이 인생에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Jazz 음악 흐른다. 흑백의 금희 얼굴 클로즈업 되었다가 작아지면 작업장.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는 태일. 허리가 결린다. 손바닥이 부르텄다. 그 장면 위로 시계가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열번이고 백번이고 부르고 싶은 희 누나. 누님이 나의 아내가 되는 길은 없을까? 그 하얀 손이 다른 사람 손에…. 아, 미칠 것만 같다.
오후11시 45분을 가리키는 시계. 금희와 함께 시아게를 하는 태일. 금희를 바라보는 태일.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화이트 빠꾸사 같은 부르조아는 불쌍한 샐러리들의 기름을 짜내고 짜내고.
남자 음성이 헉, 하며 끼어든다.
--아, 이 증오의 목소리는…. 뭐지?
작업장이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지면 다시 작업장. 늦은 밤이다. 태일 혼자 청소를 하고 있다. 사장이 들어온다. 그는 작업장을 둘러보러 왔다가 그런 태일을 보고 표정이 사나와진다. 아니, 어제 일껏 주의를 주었는데…. 죄송합니다. 하도 피곤해 하길래 애처로워서…. 제가 대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 임마? 시다 버릇 나빠진다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엉?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검은 법전. 줄어들면, 청계천 헌 책가게다. 빽빽하고 무질서하게 책이 꼽힌 서가에서 가게 주인이 법전을 꺼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드는 태일, 꼬깃꼬깃 접힌 돈으로 책값을 낸다. 너무 허름한 행색에, 순박할진 몰라도 배운 게 없는 몰골이라 주인은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눈이 멀뚱멀뚱하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 음성. 그예 사달라카는 거라…. 돈도 한 두 푼이라야제. 하지만 께름직한게 더 했다…. 다시 법전 클로즈압, 책이 펼쳐지고, 어려운 한자마다에 연필로 새카맣게 빙빙 그어놓은 표시. 그게, 좁아들면 태일 방. 법전의 어려운 한자를 해독하느라 끙끙대는 태일 너도 이젠 학업을 계속해야 되지 않겠니. 너, 법관 할 수 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누구지? 남자 아버지다. 아버지 얼굴이 흐릿하다가 흑백으로 분명해지면 임종의 태일 아버지다. 어머니와 식구들이 그 주변에 모여 숨죽여 울고 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 음성. 정말 무서웠다, 그 책이. 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때 태일이는 벌써 노동운동하느라고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설마 그를 죽일 줄이야…. 아버지가 괴로운 몸을 끙끙대며 돌려 베겟잇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꼬깃꼬깃 접혀진 5백원짜리 지전 몇 장이다. 어머니가 그것을 부여잡고, 무턱대고 운다. 아이고, 여보오, 아이고!…. 식구들도 모두 따라 운다. 아버지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흐르고, 아버지가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한다. 그 어린 것이 뼈가 휘게 번 돈을…. 술 처먹을 수가 없어…. 여보…. 당신…. 남편은 잘못 만났지만 아들 하나는 잘 둔 것 같애. 그놈 하는 일 너무 말리지 마오…. 숨을 거두는 아버지. 가족들이 그를 부르며 절규하는 동안, 아버지 얼굴 영정으로 변하고 줄어들면 청계피복 건물 앞 태일과 태일 친구3. 친구 손에 들린 석유통. 태일 손에 들린 법전, 클로즈업. 그것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그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대구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였다. 아,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왔던 것일까? 흘러온 것만 보이고, 흘러가는 것은….
화면이 거꾸로 돌아간다. 법전을 읽느라 끙끙대는 태일. 흩어지면 총천연색으로 애인과 함께 살던 남자 방. 전태일 일기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쓰다가 머리칼을 두 손으로 헝클어트리고, 다시 책상 위 원고를 거칠게 치워버리는 남자. 그 장면이 놀랍게도 여자를 겁탈하는 장면과, 겹치고,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시간의 흐름에 유의하라…. 하지만 나는 증오 때문에 형편없이 낡아갔고 그 낡음의 무게에 스스로 지쳐갔다. 그렇다. 참혹 한 피눈물과 찬란한 전망의 관계…. 불가능한 관계…. 아니, 비극적인 관계…. 나도 갈수록 혁명을 증오의 과학으로 읽었다. 적들이 원했던 바로 그대로. 치열한 사랑의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죽창을 든 눈 뒤집힌 빨갱이로….
남자가 비밀 학습방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남녀 학출 노동자 여러 명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있다. 레닌의 약한 고리론은 우리나라에 딱 들어맞죠. 남한이야말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거든요. 남한 정권은 해방 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고…. 요는,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게 바로 레닌이 한 일이다. 이겁니다. 자, 우린 어떻게 해야죠?…. 똑같은 장면이 오버랩되고 학습생이 한 두 명 줄고 남자가 다시 말을 반복하고, 말투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끝이 구호화 한다. 그러니까, 레닌의 약한 고리론은 바로 우리나라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죠.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고…. 여러분 이 증오, 혁명적인 증오야 말로…. 다시 오버랩. 학습생이 점점 들고, 드믄드믄하다. 남한 지배체제는 해방 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정권은 곧 망한다구. 지식인 명망가들, 쁘티들! 다 필요 없어. 노동자 세상을, 노동자만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대기업 노동자? 그거 다 소용없어! 너희들뿐이야. 혁명적인 증오, 미칠 것 같은 증오 가 있지 않으면….
정지. 탕탕, 소리. 암흑. 다시 정지된 장면. 그게 풀어지면 탕탕탕, 바깥으로 난 창문을 매우 긴박하게 두드리는 소리. 잔뜩 긴장하여 팜플렛 문서들을 정리하는 남자와 학습생들. 그 중 한 명에 이끌려 허둥지둥 장롱 속으로 숨는 남자.
--누구세요?
여자 한사람이 될 수 있는데로 침착하게 물었다. 접니다. 아, 저, 친군데요, 급한 일입니다…. 친구1이었다. 그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서둘렀다. 자네 빨리 피해야겠어…. 장롱에서 나오는 남화자의 팔을 잡아끌며 친구1이 말했다. 왜?…. 남자가 거칠게 팔을 빼며 말했다. 마치 친구1이 자신을 연행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처럼. 친구1이 그런 저런 걸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렀다. 선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지금 정보부에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 한다는 거야…. 선배. 그자가 왜? 아니, 그런데…. 남자가 그렇게 더듬거리며 방안 사람들을 훑어보고 나서 말했다…. 간첩단? 내가 무슨?….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피신시켜야겠다는 투로 친구1이 화자를 호되게 나무랐다. 무슨이라니! 지금, 자네 제 정신이야?…. 그리고 그도 방안 사람들을 한번 휘둘러보고 나서 스스로를 조금 누그러트리며 보다 주장적으로 말했다. 무슨이라니! 자넨 지금 가장 노출된 상태야…. 그제서야 방안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방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자자, 자네도 어서 짐 챙겨!…. 남자가 엉겁결에 이것저것 챙기려하자 친구1이 말했다. 아, 아냐. 그냥 나와. 내가 돈을 좀 가져왔으니까…. 암흑, 호루루기 소리, 점점 많아지고, 그 속에 ‘저쪽이다, 저쪽!’ ‘놓치지 마 절대!’ 등의 고함 소리가 뒤섞였다. 어둔 산동내 골목길, 갈수록 가파라지는. 헉, 헉, 신음소리.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일은 환상처럼 되지 않았다. 사실 난 그만 잡히고 싶었다. 아니, 죽음이다, 드디어. 난, 그렇게 외쳤는지 모른다…. 어둠 속 산동네 골목길이다. 아무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주 고요하다. 어둠이 이슬 맺힐 듯 하다. 태일과 금희의 목소리.
--희야. 사람들은 흔히들 자기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실지로 불행한 사람은 극히 적어. 제일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빤?
--내가 먼저 물었으니까 희야가 대답을 해야지.
그러는 동안, 위의 소설 메모가 적힌 전태일 일기장 오버랩. 정지. 암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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