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여럿의 웃음소리가 나며 골목이 흑백화하고 사람들로 채워지면, 평화시장 건물 2층 경비실이다. 평화시장 주식회사 업주들과 형사 한 명이 낡은 소파에 앉아 담소를 하고 있었다. 초겨울이라 난로 위에 주전자가 끓고 연통에 검댕과 이물질이 잔뜩 묻어 지저분하고 유리창의 연통 구멍 주변 창호지가 누렇게 빛바랜 채 그을음으로 시커멓다. 다방 레지가 보자기에 싸온 커피를 한 잔씩 따라서 나눠주고 그럴 때마다 짓궂은 축은 이따금씩 그녀 엉덩이나 젖가슴을 만지고, 그러면 그녀가 짐짓 교태를 부리면서도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형사가 화두를 던지듯 말했다. 그래, 요즘 경기가…? 업주1이 실컷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어깨 힘을 내리며 대답했다. 푸우, 최악이죠. 장사도 막장인데, 이젠 공돌이 공순이까지 설쳐대니…. 또다른 업주가 아주 조심스레, 짐짓 화제를 돌리자는 내색으로, 그러나 분명 앞사람의 말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회고조로 나갔다. 옛날엔 좋았죠. 물건이 없어 못 팔았으니까…. 형사는 습관적으로 능글맞았다. 두 사람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주면서, 아주 가볍게, 정말 자기도 모르게,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허허, 괜히 엄살떠는 것 아닙니까? 촌지 내라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하하…. 업주들이 모두 긴장하고, 세 번째 업주가 표 나게 질겁을 했다가 곧 간살을 떨면서, 알아들은 체를 했다. 에이 그거야 걱정 마세요. 그 정도야 되죠, 안 그런가? …. 그, 그럼, 물론이고 말고, 하하…. 업주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를 빼앗긴 것이 아쉽고, 그렇지만 언짢은 테를 냈다가는 오해받기 십상이라 이중으로 어색하고 또 비굴하다. 그러나 형사 태도가 더 비굴하다. 그가 일어나려다 허리를 숙이고 다시 앉는 시늉까지 하면서 말했다. 어, 전 정말 돈 달란 것 아닙니다, 아셨죠? 하하…. 그때 우당탕 열리는 문. 레지가 어맛! 비명을 지르고 안에 있던 몇이 ‘어이쿠!’, ‘뭐야, 이거!’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심지어 혼비백산 할 정도로 문 열리는 소리가, 무너질 듯 크다. 경비실로 태일과 친구 1, 2, 3 뛰어들고, ‘오빠!’ 그렇게 부르려다 멈칫 입을 닫아버리는 레지. 태일이 윽박지른다.
--오형사, 정 이러깁니까?
응? 내가 뭘? …. 오형사가 당혹을 수습하고 예의 그 능글맞은 베테랑 형사로 돌아오는 데는 눈 깜짝할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반면 태일은 분기탱천이 너무 어렸다.
--왜 여태 한 가지도 개선이 안됩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그렇게 간단하게 되나? …. 업주1이 고압적으로 끼어들지만 태일의 기를 더욱 올릴 뿐이고 형사가, 업주1을, ‘어허. 그게 아니고’, 그렇게 지그시 누른 다음, ‘좀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 그렇죠?’ 그렇게 태일 쪽에게 대충 반말을 던지는 동시에 업주2에게 시선을 돌려 묻고 업주2가 찜찜한 채로, ‘그, 그럼요’하니, 삽시간에 분위기를 형사가주도하는 꼴이 되었다. 야, 니들 맘대로 해봐. 신문에 났다고 이것들이 기고만장이야. 야, 이 새끼들아, 니들만할 때 니들보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것 뿐야…. 그렇게 업주3이 끼어들었지만 태일 쪽으로서는 난데없는 뒤통수고 더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사가 또 두 줄 타기 묘기를 부렸다. 어허. 언성 좀 낮추시고…. 자네들. 현실은 그런 게 아냐. 그렇게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라구. 아, 자네들 빨갱이야? 왜 그리 성 질이 급해? …. 되는 겁니까, 안되는 겁니까? …. 태일 친구1이 그렇게 우락부락 나가지만, 이젠 오형사가 거들떠 듣지 않고 유들유들을 노골화했다. 업주들도, 형사 눈치를 보면서도 완연 느긋해졌다. 태일이 단안을 내렸다.
--좋습니다. 자, 우리 나가자구. 친구들이 기다려.
태일이 휙, 돌아 나가려 하고 그 통에 친구1이, 무의식중에, 평소 실력이 나왔다. 에이쌍, 좆겉은 거. 한판 붙자구…. 그게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태일 쪽들이 밖으로 우루루 몰려 나가려 했고 오형사가 덜컥 긴장을 했다. 어, 잠깐. 잠깐만 기다려…. 뭐요, 또? 우리 시간 없어요…. 좋다. 11월 7일까지는 내가 선처해주겠다…. 오형사는 판단도 단안도 빨랐다. 태일과 태일 친구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머뭇댔다. 친구2가 애써 험상궂게 물었다. 그 말 믿어도 됩니까? …. 하지만 그게 형사의 자신감을 더 높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아암…. 안 되면? …. 친구3이 덧붙였다. 오형사는 노골적인 반말로 나갔다. 믿어…. 당신을 믿어? 이제까지 속아왔는데두? …. 친구1이 그렇게 다시 반전을 노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태일이 말했다. 좋소. 이번 한번만 더 믿지…. 태일 쪽들이 모두 무언가 힘 빠져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러자 마자 오형사가 본색을 드러냈다. 미친 새끼들! 카메라 창 밖으로 빠져나가면, 종로 5가 국민은행 앞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거리던 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괜히 나왔네, 젠장.’ 뭐 그런 소리가 들린다. 그 위로 겹치는, 달력 하루씩 넘어가고, 흩어지는 노동자 장면 사라지고 그 대신 들어서는 2류급 색싯집. 여급들을 하나씩 끼고 질펀--음탕한 술판을 벌리는 업주들과 오형사. 오형사 옆에 앉은, 불편한 표정의 다방 레지. 정지. 태일 음성.
--11월 13일. 오후 1시다. 휘발유통 하나를 준비해.
걍악하는 태일 친구3의, 얼굴이 말했다. 뭐하게? …. 심각하면서도 안심을 시키는, 태일 음성.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 책을 불태워 버리자구.
줄어들면, 평화시장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있는 태일과 그의 친구3. 서서히 암흑. 그 동안, 남자 음성.
--죽음, 노동자의…. 아, 어디까지 그와 거꾸로일 것인가…. 나는 죽음의 강박을 이기기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암흑이 뚜껑열리면, 검은 솥. 그 안에 검은 법전. 그것을 끄집어내는 어머니의 거칠지만 흰 손. 그것을 건네받는 태일의 심줄 굵은, 기름때 번들거리는 손, 줄어들면, 1971. 11. 13일 새벽 태일네 집 방이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태일의 대화. 음성
--글쎄 내가 태워버렸다카이. 이제 제발 그 책 좀 그만 갖고 다녀라.
--어무이, 그러지 말고 주이소. 정말 중요한 일이라예.
--내가 무서워서 그래.
--이 일 만은 안돼요. 다른 건 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여도….
--…….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라면으로 아침을 떼우는 식구들.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부엌의, 헌 검정바바리 코트 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한 태일과 어머니. 정지. 라면을 후루룩 삼키는 순옥의 음성. 오빠…. 15일까지 돈 좀 안될까? …. 태일 집 방이 바뀌어 골방이다. 플랭카드 주변에 둘러 선 태일과 태일 친구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햇빛을’ 그 위로. 태일 음성.
--며칠만 기다려, 곧 월급을 타올 테니…. 그리고 순옥아.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라도 어머니께 돈 때문에 졸라대지 않도록 해….
섬뜩한 예감을 느끼는 어머니 얼굴, 정지. 총천연색으로 화하여 줄어들면, 허름한 집 뒷마당이었다. 20년 가까이 늙은 어머니는 집 목간통에 물을 받아 목욕중이었다. 형사들이 그녀 주변을 에워쌌다. 무, 무슨 일고….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머리채를 형사 한 명이 쥐어틀고 그녀를 길바닥에 내팽게 쳤다. 시끄러, 이 쌍년! …. 놔, 놔라 이 새끼들아! 옷이나 입고…. 억! 아이고 나 죽네! …. 형사들이 알몸의 그녀에게 달겨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다른 형사 하나가 그녀를 특히 잘근잘근 밟으며 이를 갈았다. 이 쌍년, 그러게 누가 장기표 같은 놈하고 붙어먹으래? …. 뭐야? 이런 호로 자식들. 아이고, 아이고…. 벌거벗은 채 몰매를 당하는 중에도 너무 기가 막혀 그렇게 발악했지만 더욱 잔인해진 몰매질에 파묻혔다. 또다른 형사 하나가, 이번에는 좀 이치를 따지듯이, 그러나 마찬가지로 거칠게 내뱉었다. 아니면 니가 왜 장기표를 사사건건 두둔하는 하는 거야, 너 겉은 개잡년이, 엉? …. 그가 마치 자기 말의 헛점을 그렇게서라도 메꾸려는 듯 그녀를 엉금엉금 발길로 찼고 어머니가 그 틈에 악을 다시 세우고 외쳤다. 아고, 아고. 나죽네. 사람 살려! 형사 새끼가 사람 잡는다, 사람 살려! …. 끌고 가…. 첫 형사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좀 전의 흥분상태는 씻은 듯 없었다. 어머니가 더 악을 세웠다. 어딜가? 난 못가, 죽어도 못가. 놔, 이거 놓으라니까, 개새끼들. 우리 태일이 죽인 새끼들…. 우루루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그렇게 알몸의 어머니를 그들은 질질 끌고 갔다. 집밖에서도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차에 실어…. 형사의 그 음성은 좀 당황한 기색이었고, 나 못 간다, 이 개새끼들아, 으악! …. 그녀의 외마디 비명이 오히려 기세등등, 하늘을 찢었다.
검은 법전. 그것이 바뀌어, 조악한 학습용 문건으로 된다. 그게 줄어들면 구로동 한 연구소의 회의실. 학생출신 여성노동자 몇을 앞에 놓고 학습을 하는 남자. 여자도 학승생 중에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레닌의 약한 고리론은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한 곳에서 오히려 혁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우리나라죠, 바로.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고…. 똘똘 뭉치기만 하면.
여자였다. 남자 얼굴에 못 마땅한 표정이 떠올라, 스치려다가 그냥 굳어버렸다. 여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다른 학습 생들이 금새 사태를 알아차리고 어색해하면서도 크게 어리둥절해 하지는 않는 것이 처음 벌어진 사태는 아닌 듯 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한게 아냐…. 조직이란 것은. 그건 무모한 선동일 뿐야…. 남자가 결기를 달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경고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늘의 강사 선생님께서는…. 여자가 그렇게 대뜸 공식적인 존댓말로 그를 능멸 했다. 도대체 노동자의 증오란 걸 이해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죠, 불쌍하다며 변죽만 올리고, 본인은 아무 것도 못하고…. -증오? 이봐, 전태일은 사랑의 전태일이야! …. 아, 이건 무슨 반복이지? 이성을 잃고 막소리로 나갔지만,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여자를 누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왜냐면, 그 말을 뱉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여자의 말은 예상보다 더 표독스러웠다. 그러니까 회색분자 소리를 듣지….
경악하는 남자의 얼굴, 정지. 그것을 찢는 여자 음성. 난, 손떼겠어. 구로공단도 이젠 지긋지긋해! 탕탕! 문 두들겨대는 소리. 다급한 여공의 절규. 큰일 났어요. 어머니가! 오빠들이! …. 1977. 9. 9. 일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이소선 여사 석방’과 ‘노동교실 반환’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노동자들. 전태일 영정 클로즈업 되었다가 줄어들면 노동자들 사이 태일 친구1, 2가 보인다. 문을 두고 몸싸움. 문을 밀고 쳐들어와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기동경찰들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간절한 음성이, 들렸다.
--왜? 네가 안하면 안 되니? 제발 설흔살 될 때까지 만이라도 좀 참아라. 이 에미가 불쌍하지도 않니?
태일의 음성이 아주 서툴게 엉너리를 치면서, 답했다.
--허 참, 어쨌든 안 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요번 13일날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꼭 구경하세요. 어쩌면 아들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되실지도 모르니….
뜨아하다가, 갑자기 공포에 질리는 어머니의 음성.
--그게 또 무슨 소리냐? 잡혀 간단 말이냐? 아니면 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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