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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8場> 疾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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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8場> 疾走2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좆 겉은 세상, 야, 이, 씨팔놈들아!... 길거리다. 취객이 그렇게 삿대질을 하고 남자를 스쳐 지나가고 남자는 스스로 허깨비처럼 거리 속을 스며들듯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만 보였다. 남자가 흠칫, 했다. 그 중 한 등의 외모가 여자의 등을 빼다 박은 듯 닮아 보였다. 남자가 그 등을 따라, 걸음을 점점 빨리 했다. 크게 가까이 다가오는 등. 그 등에 얹히는 손. 얼굴을 돌린 여자의, 얼굴의 의아한 표정. 아, 아닙니다. 죄송해요. 장현의 노래 <미련> 흐르고, 카메라 뜨면 사람들이 번잡하게 오가는 길거리. 그 속에 화자가 서 있고 그녀가 등을 돌려 가던 길을 서두르고, 그 모습을 멍하니 한참 동안 쳐다보던 남자가 그녀 뒤를 쫓는다. 여자가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자 남자는 걸음을 빨리하다가 급기야 달려간다. 카메라 남자의 등을 넘으면 골목길은 여관가다. 오가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자정 가까워지며 네온싸인 간판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그 골목길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남자. 한참을 그러다가 그도 여관을 향해 간다. 그의 등이 점점 작아진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물론 그녀일 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녀도 구로동 공장에 다니고 있다 했다. 하지만 난 그날 밤새, 잘못 했어 제발, 제발, 그렇게 천번 만번 신음을 토했다. 아 내 사랑... 조금만 더 버텨 줘... 다시 만날 때까지...
구로동 하숙집과 술집을 돌아다니는 남자. 여자의 얼굴과 여공의 얼굴과, 창녀들의 얼굴이 뒤섞인다. 미아리 색시집까지 배회하며 스스로 타락에 젖어 버리는 남자. 헉, 헉, 숨 찬 소리 계속되면 저 아래 파업 농성 여공들이 경찰들에게 끌려나오고 있다. 그 안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건너 편 건물에서 상황을 지켜 보던 남자가, 감전된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카메라 뜨면 여공들 아비규환 속에 하나 둘 씩 끌려나와 전경버스에 실려지고 그러는 동안, 남자가 찻길을 마구 잡이로 건너뛰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구경꾼 틈새를 비집고 여공을 연행해 오는 경찰들을 향해 질주했다. 경찰이 그를 쳐다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슬슬 피해 달아나는 반면 유독 그 혼자 그들을 향해 뛰어왔으므로 의당 공장관계자일걸로 알고 그냥저냥 지나쳤다. 끌려가던 여자가 놀라는 것도 잠시 남자가 경찰을 밀치고 여자의 팔목을 나꾸어챘다. 엉겁결에 밀려난 경찰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영문 몰라 하다가 남자와 여자가 양손을 잡고 줄행랑을 치자 그때서야 비로소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어영부영 길을 막아서 둘은 그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달아났다. 골목길 또 골목길.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가자 여보. 우린 더 가야 해, 헉헉.
둘은 골목이 나오면 곧바로 길을 꺾어 돌기를 열 몇 차례 하고서야 벽에 기대어 헉, 헉, 숨을 고르었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여관방이다. 아직 호흡이 좀 거칠고, 쫓기는 불안이 안 가신 채로, 그러므로 더 절박하게 남자가 여자를 와락 덮쳤다. 옷을 벗기는 손이 서툴렀다. 여자가 약간 저항하다가 힘을 풀고 말했다. 아이, 내가 벗을께요. 서로 서툴게 옷을 벗기고, 벗겨주고, 허둥지둥 살을 섞는 두 사람. 둘 다 익숙하게 오르가즘에 도달한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음성. 당신은... 노동자를 잘 몰라요. -그런가?. --그럼요. 그와 그녀가 이불 속에 누어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팔베개한 자세였다. 다시 그가 그녀 위로 오르려 했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그런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가 이불을 걷어내서 두 사람의 알몸이 드러났다. 밑에 깔린 여자가 다리를 주저주저하다가 과감하게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 동작이 전율처럼 그를 흥분시켰다. 그녀가 킥, 하고 웃었다. 그녀 몸속에서 격렬하던 남자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왜 웃어?... 그가 물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하체를 슬렁슬렁 흔들어대며 다시 킥, 하고 웃더니, 그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 다른 여자가 아직 안 생겼구나?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게 대답하고 남자가 동작을 다시 계속했는데, 전보다 더욱 능란하고 편해졌다. 여자는 그의 전신에서 기쁨을 빨아들이려는 듯 제 온 몸을 요동치며 교성을 발하고 그를 물어뜯고 할퀴고 그랬다.
여관에서 나와 둘은 가리봉 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둘의 태도는 다정스럽지 않고 뭔가 엄숙한 데가 있었다. 그렇다. 그 행위는, 격렬한 사랑은 이별을 전제로 한 거였다. 그도 그녀도 그것을 알고 동의한 바였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싫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 그녀에게서 그런 냄새가 어딘가 모르게 났다. 아니, 그가 그렇게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음습한 환락의 술집들, 스텐드빠, 여관들, 그 사이를 둘은 한참 걸었다. 여자가 약간 톤을 높이며 부인했다. 아네요. 그 분은 좋은 사람이예요. 다만, 내가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나날이 고문이니까. 남자는 그 얘기를 별로 계속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여자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하마터면... 어떻게 눈에 띄었기 망정이지 공치사와는 거리가 먼 어투였다. 그녀를 얼마나 찾아 헤매었던가... 그녀도 그렇게 들었을 거였다. 그런데, 그녀가, '뭐 다행이랄 것도 없죠. 몸이 만신창이니까. 이 거리처럼요.' 그렇게 애써 못 알아들은 척 말을 내뱉았고 그 말이 남자를 가슴철렁하게 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이,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꿰뚫을 듯 형형한 눈빛으로. 그런 그의 눈빛을 그저 멍하니 받더니 여자가 힘없이 픽, 웃었다. 후훗. 당신은 정말 여직 순진한건지 아니면 너무 많이 타락했군요. 그런 얘기가 아닌데. 우린, 누구보다도 도덕적이예요... 그녀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따라 걸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다만... 나 때문에... 그녀가 걸음을 좀더 빨리 했고 좀더 단호하게 말했다. 천만에, 당신 때문이 아녜요. 난 그 분과 헤어져서 다시 공장엘 취직했죠. 나 자신한테 후회는 없어요. 지쳤을 뿐이죠. 노동자들이 이것 밖에 안 되나, 실망했을 뿐이고. 아, 나도 자살하고 싶어, 정말... 그렇게 퍼뜩 서서 그녀는 손으로 이미를 감싸고, 휘청했다. 뒷장서 걷던 남자는 섬뜩한 느낌으로 몸이 굳는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했다. 여자가 걸어가고 남자는 한참 동안 그런 그녀를 그냥 서서 쳐다 보았다. 여자가 꽤 멀어져서야 남자는 앗차, 하고 여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걸음이 빨라지는 듯해서 그는 뛰어가고 그녀도, 달아나려는 듯,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뛰기를 포기했다. 남자가 여자를 곧 따라잡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따라 걸었다... 여자가 걸으면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정말. 그러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획 돌리고는 남자를 가로막듯 서서 발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왜 당신한테 항상 미안하단 말만 해야 되죠?... 내 잘못이야... 못나기야 내가 못났지... 둘은 아무 말 없이 다시 한참을 걸었다. 여자는 아마 자기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것을 알았고 여자도 남자가 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랬다. 여자는 그와 별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벌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 어귀에서 여자는 발을 멈추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여자 말은 무척 부드러워져 있었다. 집이나 좀 알면 안될까? 남자가 용기를 내어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여자는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제 곧 옮겨야 되요. 그건 거절한 것이 미안해서 덧붙인 소리였는데, 남자가 지푸라기를 잡으려 들었다. 어디로? 모르죠, 뭐. 다시 Otis redding, 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 흐르고, 여자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초라한 가로등 빛에 여자 그림자가 뒤로 길어지다가, 줄어들다가, 다시 뒤로 늘어졌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손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여자가 길을 꺾어 사라졌다. 암흑. 다시 그 골목길. 여자가 사라진 그 골목길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잠시 실갱이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고 닫혔다... 계속 그 골목길. 남자도 여자도 없는.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난, 그날 비로소, 오티스 레딩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노래, 흐느낌의 극한을 넘긴 자의 노래를...
그리고 여자 음성.
--애가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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