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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7場> 유토피의 監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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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7場> 유토피의 監獄2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기록필름이 완연 흑백화되면서, 태일의 음성.
--그렇게 재미있게 같이 듣던 전축의 째즈곡이 아무런 음향을 나타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같이 이 상태로 같이 살 수는 없을까? 누님이 나의 아내가 되는 길은 없을까? 그 하얀 손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잡히면 나는 어떡하란 말인가? 아, 미칠 것만 같다. 행복하여라 내 사랑아 아베마리아, 마음속의 상처는 나--아--아--를 우울려도 행복하기를 나는 비네...
아줌마 여기, 국밥 하나!... 예에 갑니다... 그런 소리가 뒤섞인 중에 남자 음성.
--그래, 그 친구는 만났어?
뭔가 시뻘겋고 둥근 것, 윤곽지어지면, 시뻘건 감자국 국물, 줄어들고, 감자국집, 감자국솥, 먹다 남은 소주와 감자국물을 감자국 솥에 도로 쏟아 붓는 아줌마. 손님들 북적대는 영등포 시장 감자국집의, 도로 쪽으로 기인 나무 탁자를 낸 자리다. 남자는 평상심을 대충 회복한 상태고, 친구2는 중간중간 히죽히죽 웃었다. 다른 손님은 가게 안 쪽으로 앉아 있었다. 아줌마가 가끔씩 흘끗 흘끗 둘을 쳐다보았다. 응. 뭐... 친구2가 친구1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는 듯 '뭐'에 억양을 높였다. 자긴 할 일 다 하고 들어와서 후회가 없데나... 미친놈... 그렇게 대꾸하고 남자는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친구가 양팔을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여러 모양을 해보였다. 감자국집 아줌마는 눈이 똥그래졌지만 남자는 그리 놀래지도 않았다. 그의 정신상태에 익숙해진 자신조차 놀랄 것이 없었다. 반갑다, 라는 뜻야. 수화지. 좋은 거 배웠네. 주인아줌마가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다시 국물을 퍼담고, 친구2가 느닷없이 주먹으로 이마를 툭, 쳤다. 이건 간수떴다, 통방 그만하자, 는 뜻이고, 저쪽 사방이 이쪽에서 다 보이니까. 저쪽 간수 뜬 걸 이쪽 사방에서먼저 보는 거지. 형씨 고생 많이 했시다... 어깨를 건들거리는 사내 한 명이 국물을 후르륵 마시다가 말했다. 험상궂어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도 징역 살았다고 과시하고 싶은 투가 겹쳐 매우 불량해 보이기는 했다. 남자는 내심 불안했고, 친구2는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재밌네... 그래 몸은 괜찮구?... 남자가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랠 겸 그렇게 물었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문제였지, 나는?... 그, 그렇지. 그래, 하면서 남자는 그 사내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친구2의 그 말이 탁효를 발했다. 대꾸가 전혀 없는 것에 좀 불쾌해지려 했던 표정을 거두고 사내가 제 머리 위로 손가락을 뱅뱅 돌렸다. 또라이군?... 뭐, 그런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남자는 긍정도 부정도 안하고 고개를 돌렸다. 뒤통수가 좀 가려웠다. 그러나 악이 받치기도 했다. 에이 씨팔. 한 판 붙으면 붙지, 뭐...
이젠 좀 나은 거야, 그... ?... 정신병 그래... 정신병, 친구2는 남자를 무척 편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남자 자신이 이미 미친 지경 속에 든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고개를 흔들었다. 수배생활과 수감생활을 어영부영 대등하게 생각하는 일은 친구2에 대한 모독일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편하다, 그가... 친구2가 아주 성의 있게 말했다. 정신병이란 게 원래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닌가? 거기선 마음이 편했는데... 다시 들어가 있고 싶어... 그곳에선 평화롭거든. 남자는 친구2가 소설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을 싹둑 잘라버렸다.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태일도 소설을 쓰긴 썼었다. 아, 전태일은 또 왜... 친구2가 왜 전태일을 연상시키지?. 남자가 아무 말을 안 하는 동안 친구2도 별 말이 없었다...
레스토랑이다. 퀴퀴한 장마비 곰팡내가 일년 내내 배어있고. 조명이 값싸게 화려한, 그리고 테이블보가 지저분한. 그냥 헤어지기가 뭐해서 커피 한 잔을 더하려 한 거였다. 그런데 친구2의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그는 내내 남자와 있으려했던 걸까? 남자는 가슴이 아프고 고마웠다... 하지만 비좁은 벌집 방으로 그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래. 매우 오래된 시간을 잇듯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식구들이랑 있는게... 고문이지. 고문? 남자가 놀라 묻고, 친구2는 아주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를 고문한 데가 꼭 우리집 안방 같은 데였거든. 불 끄면 잠을 못 자겠어. 왜? 좌악 소름이 끼치는 것을 참고 남자가 물었는데, 스스로는 그게 외마디 비명처럼 느껴졌고, 어찌나 그랬던지 친구2의 답이 오히려 위로 같았다. 늘 켜고 잤거든. 무엇보다, 무서워. 지켜주는 사람도 없고... 넌, 어때? 뭐, 그냥 그렇지... 암흑. 똑. 똑. 수도꼭지. 거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그 물방울에 패이는 바위, 그것이 친구2의 머리통으로 바뀐다. 수건에 얼굴에 씌어지고 고추가루가 주전자 물에 풀어지고 주전자 물이 수건 덮인 얼굴에 부어진다... 형광등이 빛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며 극단적으로 밝아져 잠을 파괴하고, 침대가 칠성판으로 바뀐다. 그러는 동안 내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영등포 아주 누추하고 누추할수록 지독한 환락가 거리다. 남자와 친구2가 걷고 있다. 남녀의 알몸들이 뒤엉킨, 오래된 포르노 테이프 광고가 남자의 눈을 사로잡고 그것이 벌거벗고 당하는 고문장면으로 뒤바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싸이키 조명. 그 아래 마구 흔들리는 추한 살덩어리들. 그 위로 겹치는 007영화의 스릴과 서스펜스 장면... 급박해지면서 흑백으로 바뀌면 따르르릉... 영화 끝을 알리는 종소리. 60년대 오줌 지린 영화관이다. 화면에 '감사합니다' 자막. 실내 밝아지고 몇 안 되는 극장 손님 중 태일이 보인다.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다 긋고 나면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짜르는 것이다. 누가 짤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야 비로소 내가 있다. 그제서야 내가 나다. 그래, 내가 짤랐다.
강 위에 밤이다. 철교 위로 전철이 지나간다. 온갖 자동차며 거대한 콘테이너 화물차들이 또 한강 대교를 건넌다. 그것들은 강과 어둠과 함께 거대하게 흘러간다. 헤르라이트들이 기승을 부리지만 결국은 어둠과 동류(同類) 로 흐른다. 전철 안은 다소 한적하다. 비인, 드러난 초록색 의자 바닥이 많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깨있는 사람들도 표정이 피로로 똘똘 뭉쳐있다. 총천역색 남자가 흑백 전태일로 언뜻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온다. 다시 바깥 야경이다. 영등포로 진입하는 전철. 깔깔대며 치솟는 음모의, 그러나 어딘가 지쳐버린, 어둠의 위세에 눌린 '불야성'의 건물들. 천연색이 흑백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천연색. 그 광경이 저 아래로 떠나간다.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그렇게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 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으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감방. 보안과 지하다. 고무호스로 강제급식을 당하는 친구2. 저항하는 친구2. 발길질과 몽둥이세례를 던지는 보안과 직원들. 그리고 독방. 퍼져 누운 친구2. 식구통으로 들어오는 가다밥. 그것이, 태일과 태삼이 먹던 팥죽 한 그릇으로 변한다. 감방 안 뺑기통 문, 평화시장 여공들이 줄을 서서 발을 동동 구르던 평화시장 변소로 변한다. 세면대, 평화시장 세면대로 변한다. 감방용 종이박스 독서대, 그 위에 놓인 책, 태일이 끙끙대며 읽는 법전으로 변한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유토피아. 이 지상에는 없는 곳. 친구의 감옥은 전태일의 유토피아였다. 고문도 그랬을까? 전태일의 삶은 친구가 당한 고문이었을까? 고문. 유토피아. 갇힌 자의 괴로움과 몽상. 아아, 꿈의 감옥이다. 하긴, 전태일에게는 죽음도 유토피아였을까?
종이박스 독서대가 변하면, 편지를 쓰고 있는 태일. 돈 3천만원. 편지를 쓰는 태일. 제가 기증하겠사오니... 운운. 태일 눈이 클로즈업 되면서 척출된 안구로 변했다가 줄어들면 모범회사 설립 계획서.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된 편지.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그가 내 눈 대신 자본을 대준다면... 주문은 3시간 이내에 어느 곳이든 배달한다. 장학금, 오토바이, 피아노 등 경품제도 실시한다. 미싱 대당 1일 수입 4천원. 1개월 25일 작업. 1대당 수입 1십만원. 50대 5백만원. 시간의 흐름을 잘 기억하라. 경제 성장에 유의하여...
일상--고문--독방--유토피아로 이어져온 이제까지의 상징--장면들이 거꾸로 돌아가고 태일의 음성이 계속 이어진다.
--넌링샤쓰는 구멍이 마치 벌집처럼 뚤린 것을 입고 오른 손은 목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은 다섯개가 다 나오고 손바닥 만 장갑구실을 하는 것일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위인 머리에서 감독하고... 지금 삽질을 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작업장이다. 미소를 머금은 금희의 얼굴. 그 위로 무의미한 단순작업을 부단히 하고 있는 태일이 겹쳤다 사라지고 금희얼굴이 여자 얼굴로 바뀌며 아악, 비명을 지른다. 그녀를 겁탈하려는 남자. 으억, 하는 남자의 비명소리. 악몽에서 깨어 벌떡 몸을 일으킨 남자. 정지. 그것이 서서히 암흑화 하는 동안, 남자 음성.
--소설. 그래, 소설을 쓰면 좋겠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소설 또한, 죽음 못지않은 출구였으니까....
Otis Redding의 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 가 흐르고 방안이다. 감방 안인지도 모른다. 더 초췌해진 모습의 남자가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노래는 습관이 된 고통처럼 이어진다... 친구1의 통방(通房) 음성. 응, 그래그래. 그래도 난 원 없이 일하다 들어 왔지, 하하. 자네보단 나아, 아암, 낫지, 하하. 이 정권 오래 못가네·.똑똑. 노크 소리. 남자가 귀를 기울이다가 언뜻 옛 생각이 떠올라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자가 아니고 선배와 친구2였다. 정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 그 남자의 표정이 아찔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선배가 고개를 푹 꺾고 말했다. 그 뒤로 소식이 없네... 친구2가 멍하니 말했다. 잘 있겠지, 뭐. 그러나 남자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혹,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면... 선배가 그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가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응? 사고? 무슨 사고?... 친구2 는 무척 태평했고, 그렇게 그가 공포의 엄습을 받은 두 사람의 의지처로 되었다. 사고는 무슨? 별 일 없을 거야. 원래 똑똑한 여자 아닌가... 남자가 대뜸 선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이, 개새끼야. 후배 애인 가로 챘으면 건사나 잘 해야 할꺼 아냐. 이 씹새끼! 나가기만 해봐라, 때려죽인다!... 선배는 계속 고개를 떨군 채 남자의 욕설을 뒤집어쓰며 남자가 흔드는대로 마구 흔들렸다.-싸우지마, 싸우지마... 잉잉. 친구2가그렇게, 정말 주먹으로 눈물까지 훔치며 울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선배를 짓밟아 죽였을 지도 몰랐다. 친구2가 그렇게 칭얼대자 남자의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고 그런 채로 친구2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울지 마,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지켜줄께.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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