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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6場> 先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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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6場> 先輩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우산이요, 우산. 지우산이요... 지하도 입구에 우산 파는 여자. 정지 흑백으로 화하면서 앙칼진 여자 음성. 우산!... 국제극장 앞이다. 비가 오고 있다. 어린 태일이 지우산을 팔고 있다. 그가 한 걸음에 3층까지 올라간다. 3층은 당구장이다. 그 입구에, 계단 바로 위에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는 한 여자. 숨을 할딱거리는 태일. 여자가 교만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묻는다. 우산 하나 얼마니?... 35원입니다... 우산을 건네며 허리를 굽신대는 태일. 그 위에 대고 사납게 쏘아 붙이는 여자. 왜 35원이야, 30원이었는데... 아녜요, 30원이면 본전도 안되요... 가당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 치는 여자. 밑지기는 뭐가 밑져, 애들은 왜 곧 죽는 소리야? 기분 잡치게... 우산을 펴서 이리저리 살펴보는 여자. 이거 헌 우산이잖아. 푸, 곰팡이 냄새... 진저리를 치는 여자. 그 앞에 어린 태일이 움츠러들면서도 항변한다. 아녜요. 제가 금방 받아왔는데... 여자, 화를 벌컥 내며 우산을 바닥에 내팽겨 친다. 아니긴! 그렇게 사니까 밤낮 그 모양 그 꼴이지, 거지같은 놈!... 내팽겨 쳐진 우산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 위로 쏟아지는 비. 그 장면 줄어들면 무교동이다. 화자가 청계천 길을 걷고 있다. 흑백이다. 그러는 동안 어린 태일의 음성.
--그래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거지예요. 댁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도도했구요. 내내 도도하십시오... 교만한 여자의 얼굴, 총천연색으로 화하면, 늙어 15년 후의 우산 파는 여자. 줄어들면 1976년 가을 광화문 동아일보사 쪽 지하도 입구. 비가 내리고. 그 여자가 우산을 팔고 있다. 억척스러운, 그리고 세상을 증오하는 표정이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그가 사랑만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증오가, 먼저 이어졌다.
표정 흩어지고, 어둔 밤. 청계천 4가다. 전신주에 붙은 구인 광고. 그것을 쳐다보는 남자, 흑백화하며 구두통을 매고 있는 태일로 바뀌고, 장면 모두 흑백.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태일. 손에 든 이력서. 좁은 계단. 어두운 평화시장 작업실로 올라가는 태일. 봉제회사 입구, 간판 삼일사. 밝은 사무실, 자그만 키의 사장과 태일. 허리를 굽신하는 태일. 말쑥한 차림. 뭔가를 묻는 사장, 대답하는 태일. 월급은 천오백원이고... 그래, 잘해보라... 일어나서 태일 등을 두드려 주는 사장. 작업장으로 태일을 안내하는 사장. 작업실. 태일 눈에 언뜻 비친 작업장. 눈을 감는 태일, 총천연색으로 물들며, 남자로 바뀌면, 구인광고. 그것을 보며 남아 있는 남자. 음침한 청계천 일대.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그의 소원은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 노동자가 되는 것. 하지만 그건 끔찍한 소원이었다. 내 여자는? 그보다 10년 뒤의, 여공... 그래. 선배는 동지가 더 힘들다 했지...
암흑. 흑백으로 새겨지며, 진주알처럼 희고 고른 치아. 그렇게 입술이 움직인다. 재단사요. 식사하세요. 식기 전에 빨리요... 노래가 흐른다. Harry Belafonte, cu cu lu cu cu la paloma. 노래는 풍상과 열정을 탁하게 또 단정하게 다스린, 핸섬한 흑인성(黑人聲)이 사랑 감정 고백의 계단을 촘촘하게, 아주 치열하게 쌓아 올라가다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야'의 절제된 절창의 절정에 이르러, 그 절정을 여러 차례 즐길 때까지 이어진다. 한미사 간판이 붙은 옷가게다. 태일이 손님과 옷값을 흥정하고 있고 그 옆에. 대학 초년생 풍의, 맑고 청초한 얼굴의 금희 이모가 일을 거들고 있다. 한 번, 태일 얼굴이 남자 얼굴과 금희 이모 얼굴이 여자 얼굴과, 교차된다. 다시, 희고 고른 치아. 입술이 달싹댄다. 어쩌나 형부가 잘 해드리라고 했는데... 줄어들면 장미꽃 무늬가 박힌 3층 찬합. 뚜껑이 열리고 갖은 반찬, 줄어들면, 머쓱하고 또 황송한, 그리고 찬탄스런 눈으로 밥을 먹는 태일. 얼굴 흩어지며, 금희 음성. 재단사요, 세수하시겠어요. 잠바는 벗어주세요...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 줄어들면, 아담하고 제법 값나가는 자게 장롱이 있는 방안. 눈치를 보면서도 허겁지겁 먹어대는 태일. 자상한, 그리고 재밌다는 눈초리로 그 모습을 보는 금희. 그것을 보고 금새 움츠러드는 태일. 상냥하게 웃으며 금희가 말한다. 물 드세요... 태일, 금희 시선을 피하며 물을 마신다. 화사하게 웃는 금희의 새하얀 치아, 흩어지면 동대문 가는 길. 밤이다. 전기 불에 반사되어 곱게 반짝이는 싸락눈. 행인들의 발바닥에 눌려 부서져 버리는 고운 결정체. 창신동 채석장 못 미쳐 넓은 운동장 평지 한가운데에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양옥. 빨간 기와지붕의 경사가 아주 급한 호화로운 집. 그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태일의 등. 현관문을 노크하는 태일. 금희 음성.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급히 방안을 정리하는 소리 들린다. 집안 수돗가가 있는 마당이다. 대야에 물을 받아 얼굴을 다 씻고 양말을 벗고 발을 씻는 태일. 다시 앞의 밥상이 차려진 방안이다. 금희 이모가 방싯 웃으며 말한다. 재단사는 어찜 그렇게 맛있게 잡수세요. 보고 있는 사람이 먹고 싶을 정도예요... 참 같이... 태일이 흠칫 놀라 말했다. 네, 먹었어요. 너무 맛있게 잡수시니까 괜히 해본 소리예요... 그럼 그렇지 나 같은 놈과, 그런 실망과 자괴감으로 얼굴 표정이 뭉그러지려다가 금희 이모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냥함에 안심하는 태일. 금희 얼굴 흩어지면서, 어렸을 적 익사할 뻔 했던 광경. 그 때 풀빵을 팔던 파는 어린 소녀의 교복 하이칼라. 그것이 변하여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의 짝사랑 예옥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다시 금희 얼굴로 바뀌고, 정지. 그 위로 태일 음성.
--끝남이 인생에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가게 . 새벽이다. 아침밥을 가지고 오는 금희. 머뭇대는 태일.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태일이 말한다. 이모, 실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들어주시겠어요?... 태일 얼굴 정지. 금희 음성. 무슨 부탁인데요. 재단사가 나한테 부탁할 일이 다 있어요?... 얼굴 흩어지면 작업장.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는 태일. 결리는 허리. 부르튼 손바닥. 그러는 동안 태일 음성.
--하루 15시간 일을 하지만 누나만 있으면 괴로움을 몰라요.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 열번이고 백번이고 부르고 싶은 누나. 누나, 희 누나. 나의 사랑 나의 행복 마음에 평안이여 언제까지나 떠나지 마오. 나에게 누나가 떠나면 누나, 희 누나. 누나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누나를 백 곱 천 곱 더 생각합니다.
23시 45분을 가르키는 시계. 금희와 함께 시아게를 하는 태일. 그것이 금희 이모의 희고 고른 치아로 바뀌고. 입술이 달싹거리며, 태일 음성.
--누나가 만약에 나를 두고 다른 동생을 또 정한다면 나는 누나를 죽일거예요.
아, 안돼!... 금희 얼굴이 총천연색으로 화하며 여자로 바뀌면, 수술대. 포르말린 냄새 코를 찌르고 핏솜뭉치며 거즈가 여기 저기 나뒹굴고, 그러나 간호원도 없는 수술대 위에서 여자가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있었다. 마취가 덜 됐는지 아니면 악몽을 꾸는 듯 여자가 잠꼬대를 했다. 못 해, 난. 애기라도 있어야 살 거야... 개새까!... 의사가 '개새끼!'소리에 멈칫 했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여자 뱃속을 긁어낸다.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그녀. 구로동 술집에서 다른 여공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그녀.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난 곧장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녀도 서둘러 몸조리를 끝내고 여공으로 취업했다. 중절 수술 이후 우리 사이는 급속히 냉각되고 악화되었다.
구로동 벌집방이다. 둘이 있으면 꽉 차고 답답한 방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보다 더 궁핍해졌다. 애인은 강팍하고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주장이 길고, 머뭇거리는 데가 없었다. 남자는 정 반대였다. 도대체 당신은 노동자의 증오란 걸 이해 못해요. 지식인이죠, 불쌍하다고 눈물만 흘리고, 본인은 아무 것도 못하고... 증오? 이봐, 전태일은 사랑의 전태일이야!... 사랑? 흥! 그런데 왜 당신은 전태일을 내팽게쳤죠?... 그, 그건... 말이 막혀서가 아니라, 여자가 그의 모든 것을 그렇게 단 한마디로 꿰뚫으며 정말 내팽게쳐 버렸고 남자가 왈칵 낭패감에 더듬댔다... 여자가 톤을 바꾸었다. 당신은 증오가 없이 무슨 운동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남자는 답이 없고 여자가 내처 질렀다. 전태일에게 증오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눈엔 사랑만 보이나요? 그러니까 회색지식인 소리를 듣지... 이게, 말조심하지 못해!... 남자의 손바닥이 또 여자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아니 그리고 이번에 둘 다 알았다. 이것이 두 번째라는 것. 그리고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둘은 그런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위로 남자의 음성이, 깔렸다.
--여자, 사랑, 증오, 운동...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럴수록 전태일은 다가왔다. 복수처럼. 여자, 그래. 주인집 처제였던 금희 이모. 그래, 난 이미 질투에 휩싸여 있었던 것일까?
방이다. 여자는 없다. 남자는 멍하니 앉아 책상을 바라보고, 그 책상 위에, 전태일 일기장이 놓여있는 듯 착각. 남자가 놀라 벌떡 일어나지만, 텅빈 책상이다. 그 위로, 태일 음성.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고 제주도의 화이트 빠꾸사 같은 부르조아는 기름기계에 집어넣은 불쌍한 샐러리들을 짜내고 짜낸 기름을...
그리고 남자 음성.
--그리고, 나도 증오에 휩쓸려 갔다. 그녀보다 더 가혹한 증오에...
다시 지하도다. 노점상들이 바닥에 펼쳐놓은 장난감, 신문, 가방 등을 거두며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걸인들이 누더기로 누워있고, 그 모습이 서서히 바뀌면, 알몸으로 엉겨 붙은 여자와 선배. 둘은 호텔방에서 정사를 즐기는 중이다. 둘 사이가 처음은 아닌 듯 여자도 적당히 적극적이다. 그러는 동안 선배 음성과 남자 음성. 결혼은 좀 있다가... 집안에서 좀 반대해서... 야, 이 개새끼야!... 정사장면 흐트러지면 무교동 낙지집이다. 장현의 노래 <미련>이 깔린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노래는 그렇게 같은 톤으로, 약간의 리듬을 동반하며, 좀 지루하게, 그러나 애절함을 쌓아가는, 그렇게 긴급조치 시절을 닮았으되 그게 유일한 탈출구일 것 같은, 그런 분위기로 흐른다. 선배와 여자, 남자, 그리고 완연 초췌한 친구2가 앉아 있었다. 술집 분위기는 소란하고 왁짜하지만 네명의 분위기는 묘했다. 선배와 여자는 바싹 붙어 앉아 있고 그 둘과 남자 간에 형성된 분위기는 어색하고 심지어 뭔가 공식적이었다. 그런데 그 셋이 모두 그런 채로, 친구2에게는 될 수 있는 데로 말을 안 시키려는 내색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2는 그런 상태가 별로 불편하지 않은 듯 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그냥 주변을 둘러보다가 술잔을 들이키다가 그랬다. 여자는 단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고, 어떤 과장된 허름함을 풀풀 풍겼다. 선배는 여전히 점잖은 양복차림에 모든 동작과 표정이 능수능란했다. 다만, 남자의 눈초리를 피하는 듯 하기는 했다. 남자도 그랬다.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심쩍은 표정과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려 하는 기색이 좀 두드러져 보였다. 남자가 다소 몸을 곧추 세우며 여자에게 말했다. 그래, 아직도 그, 오티스, 뭐냐... 오티스 레딩... 억지로 웃으며 여자가 말했다. 그래, 그 오티스 레딩. 아직도 좋아해요?... 그럼요 내 애인인데... 둘 다, 존댓말이 거북하고 '애인'이라는 말은 당혹스러웠다. 여자가 곧 말을 이었다. 왜 이상해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대화 내용에 안심이 되는지 선배가 빙그레 웃음을 흘리는 참인데, 여자가 난데없는 소리를 했다. 호호. 지식인들은, 노동자를 너무 우습게 봐... 남자와 선배 모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자도 그걸 눈치 챘는지, 좀 설명투로 어조를 낮추었다. 노동자들도요, 팝송 듣고 다 그래요. 흘러간 유행가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그, 그렇겠지. 물론... 남자는 그렇게 경악을 수습했고 선배는 벌써 빙그레 웃음을 부러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에게 다소 경쾌하게 '그래, 뭘 하세요? 소식은 가끔 이분한테 듣지만' 그렇게 물으며 선배를 손으로 가르켰고 그 행동이 선배를 다시 표나게 놀래켰다. 뭐, 그냥. 도망다니는 게 일이죠. 사실 찾지도 않는데... 남자의 대답은 상당히 겸손을 떨었지만 다소 시니컬하고 뭔가 악이 받쳐있는 투였다. 선배는 다시 불편한 눈치고, 대끔 친구2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조심해야지... 그리고 그는 다시 허공을 보았다. 아무하고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아니, 그는 전혀 무관한 얘기를 그냥 던진 것 같았다. 그랬건만, 선배가 그의 말을 받아, 남자를 달랬다. 이제 막바지야. 조금만 참아... 난, 이 암흑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데요?... 그건 분명 부인 혹은 거부의사를 명백히 담고 있는 거라서 선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가 있나... 다시 친구2였다. 그는 전처럼 허공을 보고 있었다. 표정도 멍했다. 남자가 그 쪽으로 눈을 두지는 않은 채 말했다. 아냐. 난 말야, 사실. 일제 식민지 시대 말기에 변절한 사람들이 이해가 갈 정도야... 무슨?... 친구2가 모처럼 감정을 섞었다. 그랬다. 그는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와 대화를 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남자조차도. 남자가 누구에겐지 어정쩡하게 말했다. 끝이 안 보여. 그냥 터널일 뿐야... 그 말투가 친구2와 너무 비슷해서 남자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선배가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많이 약해졌구만. 하긴, 벌써 몇 년째야. 일도 못하고... 아무래도 이상한 걸?... 다시 친구2였다. 좌중에 갑자기 긴장감이 돌았다. 뭐가?... 선배와 여자가 거의 동시에 그렇게 물었고, 친구2가 이번에는 즉각 대답했다. 이 친구가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누구?... 남자가 물었다. 아주 절박하게. 그래, 친구2는 친구1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감옥에 있는 그를. 친구2의 정신상태가 그렇게 백일하에 드러났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채로 뭔가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선배와 여자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두 사람 또한 대경실색하기는 했지만, 이미 불안에 감염된 상태였다. 남자는 뭔가 욱하고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가 유들유들 하게 말했다. 그런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라면서. 아, 앉아요, 선배님. 이 친구 말 신경 쓰지 말고... 그럼, 그럼... 친구2가 또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선배와 여자가 머뭇거리다 재차 독촉을 받고서야 다시 앉았다. 의자 모서리에. 킥, 하고 노골적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남자가 말했는데, 이번에는 말투가 좀 잔인했고, 유창했고 끈질겼다. 이번에도 그가 스스로 놀랐다. 선배님. 그런 얘기 들으셨어요? 군대 안 끌려가려고 후배들이 정신병원을 들락거려요. 전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선배가 완연 긴장했으나 남자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돌아버린 사람이 있단 말이죠... 정말 미쳐버린 세상이야... 어둡고 깜깜한, 전혀 희망이 없는... 확실히 남자의 상태는 위험했고, 선배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말을 잘못했다가는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여자가 발끈했으나 선배가 그녀 손을 잡으며 꾸욱 눌렀다. 그때 친구2가 말했다. 우리 자릴 뜨죠... 그건 선배에게 구원의 소리 같았다. 응, 그래. 그래야겠네... 선배가 그렇게 말했고 여자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2는 예의 표정으로, 그러나 분명 남자 쪽을 보았다. 그런 친구2를 비슷한 망연자실로 쳐다보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발작하기 시작했다. 나도, 정말. 잡혀가 버렸으면 좋겠어. 야, 이 새끼들아. 나 잡아가라 잡아가. 차라리 징역사는 게 낫지. 나, 웁!... '수배중인 사람이다'. 그렇게 외치려 했지만 순식간에 어떤 손아귀가 그의 입을 막았다. 그 손아귀는 크고 매우 완강했지만, 부드럽고 따스하기도 했다. 그건 친구2의 손바닥이었다. 너로구나. 그래... 그렇게 아예 정신을 놓아버리려는데 여자의 앙칼진 소리가 그의 남은 고막을 아주 멀게 찢었다. 에잇, 지식인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여자 얼굴 클로즈업. 그게 줄어 들면, 대규모 파업 현장이다. 경찰이 농성 여공들을 질질 끌고 나오고 있다. 똥물을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고,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는 경찰들. 나뒹구는 브래지어들. 알몸시위를 벌이는 여공들. 그 속에 여자 얼굴. 카메라 위로 올라가면 전체 광경이 보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 광경을 목격하는 여공 가족과 행인들. 그 속에 선배의 얼굴. 이 모든게 무성(無聲)으로, 기록필름처럼 벌어진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그날, 난 노동자가 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된 선배에게 그런 식으로 뭔가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그래, 좌절은 벌써, 앙심의, 증오의 표현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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