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허둥지둥 내려오다가 후문에 이르러 옷매무새를 갖추고 가까스로 태연을 가장했다. 그 앞에 놓인 길은 멀고 막막했지만, 터벅터벅 대는 걸음걸이보다 정적이 더 무겁고 무서웠다. 차라리 나도 잡혀갈 것을... 남자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 길을 택한 터였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 친구1처럼 관악산을 넘기에는 애당초 무리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다리는 차라리 잡히는 게 더 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잡히기를 은연중 바랄 정도로 마구 덜덜거렸다. 워낙 불의의 습격 같은 데모였으므로 후문에 진치고 있는 형사들은 없었지만, 그게 다행이라기보다, 더 많은 형사들이, 무수한 경찰들이, 숲 속에 매복하여 어느 한 순간 그를 덮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소주 있어요, 오징어 땅콩 있어요... 웬 중년 아줌마가 숲 속에서 그렇게 불쑥 튀어나왔다. 몸 전체가 허름하면서도 좀 느글느글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기절했으리라. 아저씨, 한잔 할래?... 중년여자의 유혹은 징그럽고 추하고 디룩디룩 살쪘지만, 그게 그의 질겁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아, 아뇨... 그렇게 대답하면서 화들짝 놀란 것보다 더 큰 경악을 수습하기도 했던 것. 중년여자는 숲 속으로 들어가는 시늉을 하며 은근짜로 말했다. 이리 들어와. 더 좋은 것도 있어... 숲길이 갑자기 거대한 침묵의 심연을 품고, 아뜩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남자가 물었다.
--그 쪽으로 나가는 길이 있습니까?
길은? 아무도 안 와 거긴. 학생, 나랑 연애 한 번 할쳐?... 그녀가 눈꺼풀까지 두껍게 감으며 윙크를 했고 그게 또 남자를 질겁하게 했다. 아, 아닙니다... 그가 용수철 튀듯 낙성대 방향의 내리막길을 밟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구역질이 그를 지탱해주기도 했다. 구역질이 없었다면 그는 그 막막하게 내리뻗은 추락의 길을 가지 못했다. 쳇 고잔가, 중늙은이 같은 게?... 멀뚱한 표정을 짓던 중년여자가 그렇게 뒤통수를 치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풀이 다시 무서운 정적 덩어리로 변했다. 다리가 또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서, 마치 광목 폭을 굴러 내리듯 택시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택시는 남자를 지나쳐 후문 쪽으로 올라갔다. 그래... 그제서야 남자는 힘든 이유를 알았다.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택시를 따라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얼마 후 낙성대 입구에서 택시 한 대가 나오고 있었다. 앞자리에 안경을 쓰고 점잖은, 교수 차림 한명이 타고, 카메라 뜨고, 택시는 우회전을 하고도 한참을 더 가서 한적한 곳에 멈추어 섰다. 운전수와 앞좌석 교수차림이 황급히 문을 열고 나와 뒤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속에 든 남자. 운전수와 교수 차림이 그를 끌어냈다.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조금 부축을 받고서야 바로 섰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남자가 아직 휘청거리는 채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교수 차림, 아니 교수가 손을 가로세로 휘저으며 사양했다. 아닐세. 나도 경찰놈들이 연구실을 때려 부수고, 조교 뺨까지 쳤대서 서둘러 가는 길이네만... 그랬답니까?... 교수가 좀 격앙되고 남자는 좀 죄송하고 고마운 시늉을 하는 그 광경은 곧 깨졌다. 그래, 이놈들. 하지만 우리들이 뭘 하겠나. 자네들만 믿네... 그렇게 교수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고, 다시 택시에 올랐는데 긴장이 풀린 등이 한 뼘이나 쳐져 있었다. 남자가 운전수에게도 고개 숙여 절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 어서 가슈, 아 험한 세상 자중자애해야지...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자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도 택시를 잡아 탔다. 잡히지 않으면 이대 앞 그 다방으로... 그렇게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화자는 가지 않았다. 아니, 집으로, 그녀에게로 가는 일만도 힘에 겨웠다. 그녀는 집에 있었지만,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은 나한테 의논이란 건 하나도 안 하고... 그녀가 오늘 일을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몸이 너무 무겁고 그 무거움이 의문부호를 그냥 짓눌렀다. 미안해... 그렇게 넘어가는 게 편할 거였다. 그러나 한참 화난 표정이다가 입술을 깨물고 나서 여자가 내뱉은 말이 그의 무지근한 두뇌를 때렸다. 나도 노동운동하겠어요... 응? 무슨 소리야?... 그가 누워 있다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는 누그러들기는 커녕 더 또랑또랑한 어조로 말했다. 여공 생활 다시 하면서 노조 만드는 일을 하겠단 말예요... 그건 안돼... 왜 안돼요? 당신 선배는 도와주겠다고 하던데... 기세 좋게 나가던 여자가 어마, 하며 자칫 자기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러나 더 당황한 것은 남자 자신이었다. 그녀 입에서 뱉어진 '선배'라는 단어가 자신을 그토록 광포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담했다. 선배를, 만났나?... 그가 어느새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기어들고, 있었다. 아뇨, 그냥. 무슨 일을 좀 해보라고... 웃기는 사람이구만. 정작 요번 일에선 손 떼 놓고... 온갖 의심과 질투를 짓누르고,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까지 그가 그렇게 넘기려 했다.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자가 기어들던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말을 디미는 거였다. 그거야, 노선이 다르니까 그런 거죠... 응? 노선?
노선?.... 아니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분명 그런 투로, 아니 그런 투를 덧씌워 가리며 그가 말했다. 그래요, 운동에 대한 생각요... 그녀가, 대들지는 않았지만, 분명 바늘로 콕콕 쏘듯이, 공격적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맞는 소리더구만요... 더구만요? 그 말투에는 비아냥이 언뜻 비쳤다. 씩씩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멱살드잡이를 할 듯 으으렁대며 그녀에게 말을 쏟아 부었다. 이것 봐, 두 개의 의견이 싸우고 있다. 서로 목숨을 걸고. 그런데, 오로지 싸우지 말라는 주장만으로, 또 하나의 파가 생겨난다. 전혀 목숨을 걸지 않고 말야. 그리고 대세를 장악한다. 그거 미칠 노릇 아냐?... 그러는 당신 노선은 뭐예요?... 어떤 때는 난데없으면서도 아픈 데를 쿡쿡 쑤시는가 하면 어떤 때는 또 그렇게 답답한 맹꽁이일 수가 없는 것이 여자는 정말 남자를 분통 터트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혹시 모든 게 다 의도적인 것 아닐까?... 그랬다면 그녀 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남자가 이성을 잃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흉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그는 보았다.
나? 이런 제기랄! 당신 도대체 왜 그래? 내가 일하는 거 뒷바라지 하면 안 돼? 이제까지 잘 해오지 않았나?... 그렇게 윽박지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만하지, 제발. 그만해... 그런 심정인데 여자는 한 단계 더 뛰었다. 난, 당신의 부속물이 아니라구요... 물론. 당연하고 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왜 이 대목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남자는 숨이 칵 막혔다. 여자가 그런 그의 숨통을 더욱 조였다. 당신 여자라구, 생각도 당신과 같은 건 아녜요... 그러면? 다르다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숨이 넘어갈 즈음에 여자는 좀 누그러졌다. 안 그랬다면 아마 남자가 이때 벌써 여자를 구타했을 거였다. 무엇보다 어떻게 먹고 살아요. 우린 이 후진 방 집세도 낼 능력이 없어요. 당신 집에서는 날 전혀... 달라지실 거야... 남자 목소리는 여전히 씨근벌떡거렸지만 완연 잦아드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정작 씨근벌떡 소리가 더 커졌지만. 그럴까요? 천만에... 여자 말에 다시 서슬이 돋았고 남자는 거의 회복불능으로 풀이 죽었다. 그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버진 괜히 소리나 지르시지 실상 약한 분이셔. 어머닌, 그리고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그가 말을 이었다. 어머닌, 마음이야 무척 상해하시겠지만, 필경은 받아들이실 거고... 언제요?... 그녀가 표창을 던지듯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표창을 몸에 받았다. 이 거덜난 년을, 흥, 당신네 같은 도덕군자 집안에서 언제요?... '거덜난'이란 말이 남자를 경악케했고 여자를 당혹케 했다... 그리고 당혹이 여자를 다시 자포자기케 만들었다. 우리 헤어지는 게 낫겠어요... 이게 말조심하지 못해!... 철썩. 남자의 손바닥이 여자의 뺨을 갈겼다.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던 여자가 뒤로 휘청, 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는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서있었다. 그러나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리고 갑자기 용수철처럼 몸을 팽팽히 세우며 표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렇게 자신을 몰아갔다. 때려봐, 또 때려봐... 남자는 충격이 더 큰 모양이었다. 그는 축 늘어진 몸을 겨우 버팅기며 그녀가 몸을 뒤흔드는 데로 마구 흔들렸다. 그게 그녀를 더 자극시켰는지 모른다. 그녀가 이를 깨물며, '때려봐,' 그렇게 악을 모두더니, 사내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때려봐, 니 맘대로, 멋대로 때려봐, 개새끼! 내 이럴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럴 줄 알았어, 애 뺏어간 애비나... 거기서 여자 스스로 경악의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이다. 아니,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괴감으로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무너짐이 그의 무너짐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잘못했어요, 여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어엉. 내가 잘못했어요, 여보... 그런 상태가 무성(無聲)으로 진행되면서 남자 음성.
--물론 난 선배가 그녀를 차지하려고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그건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그렇게 느닷없이 폭발한 내 감정의...
장면 흩어지면, 광화문 지하도 부근 밤길. 비가오고 있다. 선배 음성. 그 친구... 안됐어. 고문을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으면... 개새끼들... 선배와 남자가 지하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불거진 동아일보 건물을 둘은 애써 외면했다. 아스팔트 바닥이며 가로등 불빛, 그리고 어깨가 축축한 행인들 등 비에 젖어 반짝이는 모든 것들이 처량했다. 정신병원으로 이감됐으면, 곧 나오는 거죠?... 글쎄. 집시법이라서... 안되는가요?... 두고 봐야지. 내가 알아볼게... 선배가 말끝을 흐렸다. 남자 음성.
--친구1도 잡혔다고 했다. 청량리 588 에서. 그는 창녀와 잠을 자다 잡힌 것일까? 그걸 선배에게 꼬치꼬치 묻기가 뭐했다. 남새스런 일인데다 또 선배가 경찰 쪽 소식통이라는 걸 안다는 얘기를 하는 꼴이 되고 또 그녀 문제도 그렇고...
그러나 선배가 제 먼저 그냥 끊었다. 미친 놈... 누가 미친 놈이란 소리지? 비속에 취객들이 비틀거렸다. 술집 네온사인 간판들이 길길이 치솟다가 삽시간에 풀이 죽은 꼴이었다. 택시는 빗속을 미끄러지듯, 아니 자살하듯이 질주하고 버스는 유리창을 희미하게 밝혔을 뿐 계엄령처럼 그 자체 우울하고 무거우면서 폭력적이었다. 오래갈 것 같지요?... 지하도에 들어서 아래로 즐비하게 내리 뻗은, 어둠 질척한 계단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글쎄... 그렇다고 봐야겠지. 왜 내가 그랬잖아? 내 말이 맞았어. 세상이 삽시간에 어두캄캄해지고... 질식할 것 같잖아?... 선배가 발걸음을 먼저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랑끼는 전혀 없었다. 그답지 않게 좀 감상적인 시인 기질이 보였을 뿐... 남자가 받았다. 제대로 온 거죠, 뭐. 이제까지는 너무 실속 없이 신문 각광만 받고 운동한 거니까... 아냐, 뭔가 숨통을 트긴 터야 해... 어떻게?... 글쎄 어떻게는 모르겠지만, 정 안되면, 테러라도 하던가... 그러다가 선배는 자기 말에 스스로 놀랐는지 표 나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계단이 갑자기 가파르게 느껴지는지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자자, 이제 그만 헤어지세... 그렇게 말도 거두면서. 미칠 것 같거든요, 저도. 뭐든 해야지... 오해를, 아니 굴욕감을 무릅쓰고 남자가 그렇게 던졌다. 선배는 의외로 선선했다. 알겠네. 다른 사람한테 맡기라 그러지...
--이 씨팔놈들아... 취객이 그렇게 불쑥 나타나 게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며 삿대질을 하고, 둘은 혼비백산하여 그를 허겁지겁 지나쳤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삿대질을 한 게 아니었다. 이 씨팔놈들아!... 그렇게 계속 자신의 삿대질에 비틀거리며 그는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간혹 넘어지기도 하면서. 그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참으라구. 더 이상 나빠질게 뭐 있겠나.. 선배가 그 취객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지하도 한 복판에서 둘은 헤어졌다. 선배는 조선일보 쪽 출구로 가고 남자는 동양 극장 쪽을 향하려다가 다시 뒤돌아 동아일보 사옥 쪽을 향했다. 지하도 계단 위로 출구가 보인다. 비가 계속 구질맞다. 동아일보 사옥이 서서히 출구를 채운다.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고문이라. 미친 놈이라. 하지만 무엇이 고문이고, 무엇이 미친 짓이란 말인가. 긴급조치 9호 아래 산다는 것이 정말 미친 짓이고, 고문이었다. 난, 그 친구가 부러웠다. 그런데...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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