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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4場> 親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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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4場> 親舊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자네는? 행사 진행? 굿패 동원됐나?... 그렇게 좀 윽박지르듯 친구2에게 선배는 물었다. 물론, 친구2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예, 될 겁니다... 다른 거는?... 선배도 그가 느끼는지 아닌지 관심이 있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친구2의 말은 좀 생뚱맞기까지 했다. 없어요. 장례식에는 탈패가 제격이죠. 슬픔엔 분명한 국적이 있으니까... 꽤 신경 써서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친구2가 무척 머쓱해했는데 선배는 거들떠 듣지 않고, 결론을 내리듯 대뜸 남자에게 말했다. 이번엔 자네도 뛰어. 잘하면 분위기가 좀 뜰 것 같기도 한데... 그러죠, 뭐... 놀란 듯 자신에게 쏠린 친구1의, 그리고 친구2의 눈초리를 걷어 내느라 남자가 선뜻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말도, 내용과 달리, 아주 자연스레 나왔다. 근데 전 뭘하죠?... 글쎄. 오비들 다 엮어. 학생들은 지방까지 내가 다 할테니까. 지식인도 엮으면 좋은데... 친구1이었다. 그는 조직 '엮는' 문제가 나오니까 아연 활기를 띠면서 그 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아예 잊어먹은 듯 했다. 남자도 그게 편했다. 친구1의 그 '표변'이 뭔가 꺼름직했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해보지 뭐... 노동계도 엮으면 어때요?... 글쎄... 선배가 갸우뚱했고 친구1이 의외로, 꽤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다. 노동 쪽은 좀 다르잖아?... 선배도 친구1의 주장에 동조했다. 매우 편안하게. 친구2는 벌써 자기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가 본인도 모르게, 중얼댔다. 김상진. 농대생. 민주주의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할복자살. 베를 갈라야 겠군... 무당이 저승길 터주는 무명베... 카메라가 창문을 통해 강의실을 빠져나가면 어둠에 덮힌 서울대 도서관. 텅빈 아크로폴리스. 그 모습이 어둠 속에, 음모 적으로 바뀌면서 남자 음성.
--하여튼 난 좀 흉해 보여.
삼선교의 밤, 어둠 속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나폴레옹 제과점 안. 파장 무렵인지, 손님들이 한산하고 드문드문한 여종업원들 발걸음이 게으르고 표정이 무료하고 따분하다. 친구1의 음성. 흉해? 그게 무슨 소리야?... 제과점 내부는 70년대 식으로 화려하다. 선배와 남자, 친구1이다. 선배와 남자는 탁자 모서리를 끼고 앉아 있다. 친구1과 남자의 논쟁은 겉보기에 한담 같았지만 점차 어두운 그림자를 심각하게 띄어갔다. 남자가 해명조로 말했다.
--전태일과 인혁당이 빠진 학생, 지식인만의 장례식이 말야. 이빨 빠진 거지.
매우 창백해진 남자 얼굴에 어린 그 말의 형해(形骸)가 정말 흉했다. 친구1이 대충 넘어가려는 투로 말했다. 죽음에다 죽음을 겹칠 필요까지야. 다 살려고 운동하는 거라구... 마지막 대목은 거의 농에 가까웠다. 하지만 남자는 평소와 달리 매우 끈질기게 나왔다.
--하지만, 인혁당은 죽고, 민청학련은, 학생이라구 10개월 만에 나왔어. 구형은 똑같은 사형이었는데 말야.
친구1이 발끈했다. 뭐야, 그럼 똑같이 죽어야 한다는 거야?... 그러나 그건 주장이 서로 틀린다는 것보다 오늘따라 네가 왜 이리 물고 늘어지느냐는, 뭔가 자존심이 상한 것에 더 큰 비중이 가있는 반응이었고 그는 곧 스스로 머쓱해져서 흥분을 자제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그게 지금, 오늘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 난, 정말.
남자가 그렇게 논쟁을 내팽게쳤다. 그게 평소의 그에 어울렸다. 그 친구 오늘 안 오나?... 선배였다. 그는 이를테면 '귀찮은'(?) 논쟁을 친구1이 대신 치르게 그냥 두었다가, 아니 어느정도는 얄궂은 표정으로 즐기다가 그게 끝나자마자 뛰어든 셈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논의의 의표를 찔렀다. 친구1이 기다렸다는 듯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예?, 아, 온다고 했는데요?... 그러고는 다시 남자를 보았다. 이거, 달린 거 아냐?... 선배가 그렇게 음산하게 말을 툭 던졌고 남자는 뭔 말인가 긴가민가 엉거주춤했다. 친구1은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곧 수습했다. 달리기는요. 그 친구 달릴 일 없어요... 아니면, 발을 빼고 싶던가... 몰아부치듯 선배가 말했다. 남자는 그제서야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를 알아채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냐, 그 친군 좀 유약해.... 친구1이 비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 그와 더 이상 논쟁을 벌이기가 싫어지다 보니 남자 말이 좀 자신 없어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약속은 꼭 지키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례식은 치러야 해... 선배 얼굴 표정이 짐짓 단호해지면서 정지. 앉은 자세에서 선배 얼굴이 남자 얼굴로 남자 얼굴이 친구2로 변하는 동안, 남자 음성.
--그날도 난 선배에게 그녀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섭섭할망정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거사계획'은 허술한 데로 꽤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 자신이 그녀를 만날 염보다도 틈을 낼 수가 없었다.
남자와 친구2의 얼굴 줄어들면 마포 최대포집. 조그마한 술집에 손님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구공탄불 위 테 굵은 쇠석쇠 위에 돼지껍질이며 염통과 허파, 대창과 곱창 등 고기를 굽는 연기와 냄새, 그리고 연탄가스 냄새가 자욱하고 흥건하고 또 매캐했다. 손님들은 둘씩 셋씩 짝을 이루어 원통형 '도라무깡' 탁자를 두세팀이 함께 쓰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각자 고기가 섞이지 않게 습관적으로 고기를 자기 팀쪽으로 끌어 모으며. 남자와 친구2와 탁자를 같이 쓰는 팀은 세명이었는데 무슨 회사 영업부 직원들로, 모처럼 한건 올린 아랫직원 둘한테 직속 상사가 한잔 내는 자리인 듯 했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때맞추어 셋이 한꺼번에 호탕하게 웃어제끼면서도 간간이 배어나오는 한숨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는 분명 그들에게도 배어있었다. 아니, 그들에게야 말로 그 분위기가 잘 어울렸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이 암울했다. 그에 비하면 남자와 친구2가 '입은' 분위기는 좀 강제적이고 억압적이었다. 그 부자연스러움. 카메라는 정말 부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다가간다.
--난 못하겠어. 자신이 없어. 친구2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에, 맞서는 것은 아니고, 그렇지만 뭔가 응답하듯이 남자가 소주잔을 들었다. 용감하게는 아니고, 좀 머뭇대며. 그의 말도 그랬다 안 하더라도, 괴롭긴 마찬가질 거야. 아니, 더 괴로울 거야... 어, 그 쪽 고기 타네요... 합석팀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끼어들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괴로운, 괴로움에 몰두한 친구2의 얼굴, 정지하고, 남자 음성.
--선배가 그녀를 만나게 해준 것은 며칠 뒤였다. 그 사건 뒤였던 것은 분명하다.
친구2의 얼굴이 박정희 기자회견 텔레비젼 영상으로 변하며, 박정희 음성. 그러므로 국가의 존망이 이토록 위태로운 때에... 다시 박정희 얼굴이 친구2로 바뀌고 그 위로 겹쳐지는 베트남 패망 장면. 베트남 행정부에 월맹기가 게양되는 장면. 채널이 바뀌고 친구2 얼굴에 박정희 얼굴이 겹치며, 그 밑에 속보로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 박정희 얼굴 흩어지고, 더 굵고 검고 선명한, 신문 1면 톱 '긴급조치 9호 발표'. 소제목, '위반한 사실을 보도해도 긴급조치 위반', '징역' 등등. 암흑. 남자의 음성.
--그 사건, 긴급조치 9호 발표 뒤... 난 그때 그 조치가 얼마나 끔직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그 조치 뒤에 만났다. 그리고 조치 후에 그녀를 만났다는 점이 그 후 그토록 많은 것을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아니, 아주 오래 뒤까지, 그 조치의 끔찍함을 알고 난 후 꽤 시간이 흘렀을 때까지...
그러는 동안 암흑이 풀리고, 바다다. 서해안 연안부두. 초라한 행색의, 초로의 부부가 꾸리는 리어카 위 커다란 양푼에 홍합이 작은 양푼에 소라가 각기 말간 국물을 내며 소소히 끓는, 그러면서도 파도는 발밑 방파제 바로 밑까지 밀물져 들어오는, 그러면서 두려움을 핥는 어스름 저녁 바다다.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둘 다 바바리 차림이었고, 코트 자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조금만 더 견뎌줘...
남자가 한참을 머뭇대다 말했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저보다도 당신이 더 힘들까봐... 난 그게 자신이 없는 거예요.
여자가 몸을 돌려 발을 옮겼고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강요는 안할게...
--...내가 당신을 더 미워하기 전에...
여자가 곰곰 걸음으로 걷다가 툭 끊듯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남자를 아주 떼어놓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없을거야.
--...
--내가 사정해주기를 바래?
--아, 아니 괜찮아요.
바람이 여자 눈물을 흩뿌렸다. 여자 걸음이 비틀거렸다. 남자가 바짝 다가섰다. 아, 이 사람. 나를 안아주지 않고...
--난 여자는 당신 밖에 없어.
남자가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여자는 고개를 피했다가 그냥 놔두었다.
--갈께요. 이제...
--여보.
여자가 발길을 옮겼다. 남자는 따라가지 않고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위로 올라가면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사람. 멈칫, 걸음을 멈추는 여자. 그녀에게 마구 달려가는 남자. 그 옆으로 우울하고 칙칙한 바닷물. 카메라, 그 바닷물로 완전히 옮아가고, 암흑. 흩어지면서 드러나는 시커먼 갯벌. 황량하고 드넓은. 먼데 선박들이 군데군데 서있다. 바다의 새벽이다. 초로의 부부도 남자도 여자도 없는. 그러는 동안, 남자 음성.
--우린 다시 살림을 차렸다. 더 으슥하고 누추한 곳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 죽음은 이제 우리들의 일상이므로, 더 무서웠다. 그리고 다른 문제, 선배의 문제가 있었다.
바닷물이 서서히 변하면서 으슥한 골방, 아니 사랑방과 창고를 겸한 작은 교회 지하다. 낡은 제단과 십자가가 한 구석에 다소 소홀하게 모셔져 있고 각목으로 다리를 엮은, 삐걱대는 나무 탁자를 둘러싸고 선배, 친구1, 친구2,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선배와 친구1은 매우 격한 토론을 벌이다가 잠시 쉬는 듯 각자 약간씩 게풀어져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자세고, 남자는 좀 무료한, 우두망찰의 표정이었다. 친구2는 무척 긴장한 듯 앉은 자세가 꼿꼿했다. 오른쪽 구석에서는 후배들 셋이 만장을 쓰고 있었다. 아주 열심히. '민주열사 김상진'. 복장과 몸 전체 분위기를 아우러서 볼 때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내려가는 사람은 친구2의 후배고, 옆에서 거드는 사람 둘은 친구1의 후배인 듯 했다. 아니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굿패 중에도 친구1과 같은 부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지만, 어쨌거나 그런 비교를 불러 일으킬만 했다. 친구1 부류는 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고 친구2의 후배는 손끝이 떨렸다. 만장. 자락이 마저 펼쳐졌다. 근조 민주열사 김상진, 정지. 선배의 음성. 그러니까, 처형해도 겁을 안 집어 먹으니까... 다시 탁자다. 넷 모두 좀체 자신의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선배의 말을 혼잣말 같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오래도록 집요하게 고문을 하겠다는 건가? 흐음... 친구1이 선뜻 상반신을 곧추세우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뭐, 그래봐야. 아, 선배님 말씀마따나, 사형도 이겼는데, 고문쯤이야... 하지만 그게, 시간만 길어진 죽음의 고통이라면?... 누구지? 친구2였다. 그도 혼잣말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친구1이 곧장 그를 겨냥하며 펄쩍 뛰었다. 에이 설마 절대로 오래 못가. 마지막 발악이라구... 그런데, 정말 발악처럼 행해진 그의 말이 무척 위압적이었다. 친구2가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표정과 무언가를 들킨 표정을 섞으며 입을 닫고 친구1은 내친 김에 연설조로 넘어 갔다. 마지막 발악이라구. 베트남 넘어갔지, 사회주의, 아니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은 전기를 맞은 거야, 결정적인... 사회주의? 그런가?... 선배였다. 친구1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누질러 앉으며 '에이, 선배님 다 아시면서.' 그렇게 선배를 추켜올렸는데, 어색했다. 그도 선배도. 하여간 친구1이 다시 친구2를 겨냥했다. 양키놈들, 치명타를 맞은 거라구... 친구2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배들이 일하는 곳을 둘러보았다. 후배는, 후배들도 선배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이느라 자기도 모르게 일손을 멈춘 상태였다. 빈 만장이 서너개 보였다. 그 위에 정지. 선배 음성. 글쎄. 하여간, 내가 보기에, 이번 거는... 선배 표정이 매우 단호했다. 친구2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선배는 말을 계속했다. 아주 정교하거든. 위반사실을 신문에 보도하더라도 위반이다... 이건 절묘해... 친구1이 끼어들려 했지만 선배가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표정을 한번 더 침착하게 누그러트리고 말을 이었다. 아냐. 확실히, 4호 때와 틀려. 그건 허겁지겁 서둘러 만든 거라, 물론, 그만큼 무지막지했지만. 그만큼 헛점투성이였거든? 이건, 내가 보기에, 5년은 간다... 5년이요, 하!... 친구1이 그렇게, 거의 이를 악물고, 아슬아슬하게 선배를 '능멸 시작'까지 간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선배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참으로 드물게, 친구1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노려보는 것은 아니지만,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의사는 분명히 하면서. 징역은 몇년씩 꼬박 살릴 거고... 사형 겁줬다가 10개월 만에 내주는 일은 이제 없어... 저들은, 영웅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은 거야... 만장에 붓글씨가 쓰여지고, 있었다. '독재타도.' 정지. 그 위로 선배 음성. 아주 암울한 어둠이 오래오래 깔릴 거야... 친구2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말투도, 이제까지 그랬듯이 혼잣말로 읊조리는 듯 했다. 아무도 그게 어둠인지조차 모르게 될 때까지... 그래, 선배님은, 친구1이 분명, 노골적으로 시건방지게, 친구2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 패배주의자 친구와 운명을 같이 하시겠다?... 자네 말이 좀 심하군... 선배는 아예 설득을 포기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남자가 몸을 친구1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친구1이 발끈했고 남자도, 이번만큼은, 지지 않으려는 듯 몸을 맞세웠다. 선배가 할 수 없이 둘을 말렸다. 친구1이 마지못해 어깨에서 힘을 뺐지만 선배를 거들떠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상한 것은 친구2였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어투로, 말을 했다. 아니 그가 하는 게 아니라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모두 미치거나, 지친 동지들이 서로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게 될 때까지... 이친구 왜 이래?... 친구1은 갑자기 공포가 드는지 몸을 오싹 사렸다. 선배가 이번에는 무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 보다가 단호히 끊었다. 난, 요번 일은 반대야. 좀더 두고 봐야 한다고 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2는 그냥 앉아 있고, 남자는 다시 후배들 일하는 쪽으로 갔다. 친구1도 슬금슬금 남자 쪽으로 따라 붙었다. 그는 막상 선배가 나가자 허탈한 모양이었다. 푸, 목사 눈치가 좀 이상하더라니... 이제 와서 내쫓지야 않겠지. 선배도, 당장 운동을 그만 두겠다는건 아니잖아... 풀죽은 친구1의 목소리가 남자에게 어떤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남자가 친구1을 그렇게 쓰다듬었다. 저 친구는?... 친구1이 마치 남자에게 안기듯 그렇게 물었고, 하긴 할 거야... 그렇게 남자가 친구1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만장. 만장이 변형되고 있었다. 끝도 없이. 전혀 끝날 것 같지 않게. 그렇게 만장이 80년대 말 까지의 그 숱한 장례식 만장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로 왠 아름다운 여자가 , 무당이 베를 갈랐다. 그러는 동안 화자의 음성.
--그렇게 파가 갈렸지만,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장례식을 치르게 될 지는 어느 쪽도 몰랐다. 그 후 상당기간 동안 운동은 장례식으로 점철되었다. 아니, 아니다. 장례식 그 자체가 운동인지도 몰랐다. 그 끝에, 한 세기의 끝에 우린 더 거대한, 동구권 대륙도 묻지 않았던가...
만장 흩날려 사라지면, 복도다. 기나긴 복도. 복도가 긴박하게, 헉헉대며 이어진다. 문이 열리면 도서관 안이다. 유인물이 공중에 흩뿌려진다. 군사독재 타도하자!... 남자다. 그가 그렇게 외치고는 쏜살같이 도서관 밖으로 사라졌다. 유인물을 집으려고 학생들이 몰렸다. 다시 복도다. 아주 밭은 복도. 그리고, 강의실 문. 그 문이 활짝 젖혀진다. 군사독재 타도하자!... 친구1이다. 그는 한 뭉텅이씩 강의실에 유인물을 뿌렸다.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혹시, 거드름까지 피우며. 강의실마다 소란이 일고 학생들이 유인물 쪽으로 달겨 들었다. 교수들은 그냥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표정 흩어지면 서울대학교 인문대와 도서관 사이 교정. 사복형사들이 쫙 깔려 있어 분위기가 음산하고 초조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없다. 오히려 너무 한산하다. 지루할 정도로. 느닷없는 꽹과리 소리가 그 분위기를 일거에 찢었다. 그 소리는 하늘로 솟구쳐 마치 하늘까지 찢을 듯 했다. 도서관 아래 식당 쪽, 만류하는 형사들을 제끼고 꽹과리를 치며 교정을 가로 지르는 후배1. 그 뒤를 따르는 후배2. 군사 독재 타도하자!... 수명의형사들이 후배 1, 2를 따르다가 삽시간에 몰려든 학생군중에 휩싸여 혼비백산 그 속으로 스며들고 학생들이 연호를 시작했다. 독재타도! 독재타도! 독재타도! 독재타도!... 삽시간에 학생들이 후배 1,2를 둘러싸고 핸드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아! 동지여, 믿으라! 다시금 터져 나올 그 눈물겨운 함성을... 창문이다. 남자가 인문관 4층 유리창을 통해 저 아래 시위장면을 보고 있다. 창문. 핸드마이크를 잡고 추도사를 읽는 후배를 클로즈업했다가 카메라 위로 뜨면,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집회 광경. 2천명정도 빽빽이 들어찬 교정. 카메라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서서히 보이는, 똬리를 튼 하얀 뱀 같은 원주. 그러는 동안 화자 음성.
--작은 원과 큰 원 사이 하얀 원이 있었다. 뱀처럼 좁은 원이었다. 방관자와 참가자를 가르는 긴급조치 9호의 끈이었다. 순식간에 말 달리듯 경찰병력이 들이닥쳤고 원 밖의 방관자들은 흩어져 무사했고, 원 안의 참가자들은 뭉쳤다가 모두 잡혔다.
그러는 동안, 교문 앞. 순식간에 인디안 말 달리듯 들이닥치는 경찰들. 똘똘 뭉치는 작은 원. 삽시간에 흩어지는 원 밖. 흩어지는 학생들 사이로 덮치는 경찰들. 비명소리. 고함소리. 그러는 와중에 관악산 쪽으로 안양 쪽으로 튀는 친구1, 아차! 하는 남자 얼굴 클로즈업, 거의 동시에, 잡혀가는 학생들 중 친구2의 얼굴, 암흑. 흩어지면 정적. 서울대 후문의 전경, 저 아래 낙성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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