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2場> 죽음의 裏面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2場> 죽음의 裏面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명동성당 입구는 하늘로 솟은 뾰족탑과 아래로 위풍당당한 교회당이 앞마당을 거느리다가 이내 경사진 계단을 내려와 시정--세속으로 치미를 푸는 모습이 늘 푸근하고 평화로웠다. 신자든 아니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 평화의 품속으로 포근하게 안겨드는 느낌을 갖는다. 60년대 말부터 이곳이 민주화 투쟁 인사들의 농성장으로 애용되고 전경들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게 되었어도 그 평화의 분위기는 최루탄 연기가 가시자마자 곧 회복되고 그랬다. 아스팔트 보도에 물이 흥건하게 뿌려지고 매운 냄새까지 가시면 어김없이 싸구려 마이크 스피커에서 걸인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통이나... 아주 천박하지만 매우 느려서 결국은 슬픔의 장관을 펼쳐 보이는,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그 찬송가.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걸인은 다리가 잘린 채 양팔로 바닥을 기며 바퀴달린 마이크 스피커를 밀고 있었다. 그 찬송가가 또한 밑바닥을 기다가 교회당 첨탑보다 높이 슬픔의 곡선을 끌어올렸다. 그래,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죄악이나니... 그런, 명소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포위망을 뚫고 기어이, 포위망 속에 또아리를 틀수 있다는 것은? 겨울이었다. 사람들 몸피가 외투 두께만큼 보다 더 두꺼워보였다. 군데군데 잔설이 희끗희끗했다. 명동성당 건너편 로열호텔 커피숍에는 팻분이 부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온화하게 흐르고 있었다. 카페트의 우아한 붉은 빛이 따스하게 커피숍 전체 분위기를 떠받들었다.
--이걸 전해 주세요.
선배가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자가 그것을 받았는데, 손이 약간 떨렸다.
--돈도 들어있습니다.
--... 고맙습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잠시 선배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빨개졌다. 선배는 그런 그녀를 마치 감상하듯이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물론 늘척거리는 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빛이 뭔가 타는 구석은 있었다.
--잘 지내죠?
--네?
여자가 눈을 빤히 뜨며 물었다가, 아차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하. 그 친구 말입니다. 하하.
--네. 그럼요.
무교동 낙지골목은 초저녁부터 취기가 질퍽했다. 취기는 제 혼자 가라앉지 않고 흥청망청한 석쇠구이 소리와 내음을 동원하며 행인들에게 휘감겨왔다. 그렇게 김추자, 댄서의 순정이 흐른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안겨... 70년대 카바이트 막걸리 풍으로 섹시하게, 풍만하게 또 콧소리 짙게. 스스로 흐느적이며 듣는 이를 또한 흐느적이게 하는. 스스로 그 흐느낌의 육체가 되는 듯한. 네온등불 아래 오색등불 아래 춤추는 댄서의 순정... 고조되고, 고조되어 안긴 가락이 어느새 야속한 듯 두 주먹으로 가슴을 홍두깨질하는.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섹스폰아... 시뻘건 낙지볶음. 줄어들면 시끌벅적한 무교동 낙짓집. 손님들. 그들 사이 드럼통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화자, 선배, 친구1, 친구2. 화자는 위축되어 있고, 친구1은 약간 표독스러워졌지만 유쾌하고 친구2는 뭔가 계면쩍다.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선배는 화기애애했다. 그들은 이따금씩 웃고 떠들고 그렇게 술집 취흥 전체에 어울려 들었지만 가끔 주변을 힐끔거리고 또 움찔하는 기색을 아주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풀어진 느낌이었다. 친구1은 수배생활에 이골이 나서 도피--변장에야 이젠 베테랑 아니겠냐는 내색이 분명했다.
하하, 그래, 맞아... 친구1이 건성으로 수긍하면서 친구2의 말을 그 김에 끊더니 대번에 화제를 돌려 그를 겨냥했다. 선배님 이 친구가요. 아 글쎄, 전화를 하더니... 에이, 그만 둬 그 얘기... 친구2는 그 얘기로 벌써 놀림을 여러 번 당한 듯 얼굴에 금방 당황기가 돌았다. 하지만 사람 좋은 표정을 바꾸지는 않고 실실 웃어주기까지 했다. 아냐, 이건 해야 돼. 선배님 이건 중요한건데요. 키킥... 선배는 또 건성으로 친구1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을 짓고, 그 참에 친구1이 기고만장해지면서 말을 이었다. 한밤중에, 아마 통금 넘었을 걸? 전화를 하더니 대뜸, '야, 여기가 어디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 에이 저 친구는?... 선배는 여전히 건성이었고 친구2는 부끄러움이 완연했다. 친구1은 갈수록 뭐랄까, 좀 잔인해졌다. 아 지가 어딨는지, 내가 전화로 어떻게 알아요? 지가 알지... 그래? 그거 재밌군... 그런데 그 희극이 정말 절박한거라. 잔뜩 겁먹은 거야, 전화 목소리가. 그래서 제가 오히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갔곤, '야, 거기, 어디냐? 주위를 둘러 봐, 뭐, 커다란 건물 없어?' 그랬더니... 에이 뭐, 취해서 그런건데... 아냐, 그게 아니고... 하하. 이러는 거예요, '없다. 하늘은 깜깜하구, 건물이 있는데는, 더 깜깜하다.' 하하하... 모두 그렇게 웃었다. 그런데, 화자의 웃음은 텅 비어 있어서 매우 끔찍해 보였다. 하하, 그래. 나중에 보니 어디 서울역 뒷골목인 모양이던데... 저 친구 좀 예민하잖아. 연극 연출간데... 에이 뭘요... 친구2가 머리를 긁적댔고, 선배는 능란하게 말머리와 화제의 성격을 돌렸다. 왜, 그 티롤인가, 명동에, 쫑파티 때 나도 갔었다구... 친구2가 긴가민가했고, 친구1은 일순 화제에서 밀려난 것에 무척 허기진 표정이었다. 아랑곳없이 선배가 말을 계속했다. 눈 펑펑 내리고, 밤새 놀았잖아, 술들 쎄데... 거 뭐냐, 판소리까지... 뭐 누님이 월경을 했는데, 질탕한 거, 자넨 '하늘에서 별을 따다...' 그런 노래 불렀구... 친구1이 다시 끼어들었다. 약간 필사적으로. 하하 이 친구, 후배들 우동 사준다고 해놓고는 '야, 튀어!' 그러기 일쑤죠, 학림다방 커피 외상값이 자그만치 18만원이죠, 이젠 현찰 안 주면 커피 안 갖다 줘요... 그만하지. 이 친구, 얼굴이 새빨게 졌는데... 화자가 아주 힘들여 그렇게 말했지만 친구1은 막무가내였다. 아냐, 이 친구 보기보다 뻔뻔스럽다구. 그래, 그리구, 유청담에서는... 거기야 아줌마가 착하시지만, 순댓국물 하나 시켜 놓고 대여섯 명이 대여섯시간씩 죽치죠, 아 르네쌍스까지 외상 되는 놈 이 친구 밖에 없어요. 거긴 티켓을 끊어야 입장을 시키는덴 데도 말이죠... 그래? 그건 정말 대단하군... 좌중이 갑자기 표나게 조용해졌다. 네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화자와 친구2는 그 침묵이 편했다. 친구1은 불편했다. 선배는? 그렇다. 그 침묵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선배였다. 확실히, 선배와 친구1은 모종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 점을 둘 다 알고 있었다. 물론 일차로 선배는 친구2를 일에 끌어 들이려는 배려가 있었고 친구1은 그걸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주도하려는 만용이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친구1과 선배는 체질적으로 안 맞는데도 있었다. 친구1은 선배의 '뼈 없는' 인품이 못마땅했고 선배는 친구1의 철없는 과격 발언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땐 그런 것이 노선으로 돌출하지는 않았을 때다. 화자와 화자 친구들의 관계는 전태일과 그 친구들의 그것과 크게 보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역사란 그렇게 반복하는 것인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화자가, 전태일이라니! 그들은, 어렴풋이, 자신들이 몇년 전보다 너무 뒤져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문제였다. 그 콤플렉스가, 그리고 그것이 또 터무니없는 과격으로 돌변할 일이... 선배는 의외의 말로 침묵을 깼다. 그래 자네 애인은 잘 계신가?... 예? 예. 그럼요... 화자가 저으기 당황하며 대답했다. 친구1이 그 틈을 비집고 들었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한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아주 표나게 밉살을 떨면서. 허허. 이 친구는 좀 별종이죠. 하긴 뭐, 사랑하기만 한다면. 결혼할 건가?... 물론. 부모님이 좀 반대하시겠지만... 마, 너는 운동하는 거냐, 재미보는 거냐?... 허허, 뭐 좀 그렇게 됐네... 화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켜야겠다는 의무감도 겸해서 그렇게 허허탈탈로 받았다. 친구2도 모종의 긴장감을 못 견디겠던지 한 마디했는데 그는 아주 지성으로 거드는 쪽을 택했다. 잘 되야지... 그런데, 화자의 애인에 대한 선배의 관심은 집요했다. 대단한 분이더군... 선배님. 전 이러다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일을 해야겠어요. 청피 일을 좀 보게 해줘요... 난데없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이 화자는 그 기색을 못 느낀 것이 분명했다. 선배도 매우 빠르게 화자의 관심사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 일도 중요한거야... 무슨 일요?... 친구1이었다. 그건 흡사, 맞을 줄 뻔히 알면서도, 칠테면 쳐보슈, 그러는 꼴이었다. 선배가 곧바로 받았다. 어, 자넨 알 필요없어. 뭐, 좀 그런 일이 있어... 친구1이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친구2가 또 무마에 나섰다. 그의 목소리가 아연 활기찼다. 저도 좀 하면 안됩니까?... 그런 친구2를 선배가 여유만만하게 그러나 표나게 챙겼다. 자네? 어, 자넨 좀 도움이 되겠구만. 그래... 하여간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선배는 고개를 돌려 화자에게 내처 말했다. 지금 일은, 별 부담없이 해. 조영래씨 쪽으로도 맡길 모양이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게 아냐. 그건 혼자서는 정리 못해... 그래도, 청피 쪽 일을 좀... 너무 조급해 하지마. 지금은, 기다릴 때야... 노동운동은 숨어서도 할 수 있잖아요. 숨어서 해야 되고... 지금부터 시작을... 무슨 얘긴지 조금 감이 잡히자 친구2는 매우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그는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않았지만 숨소리조차 죽이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거의 처분만 바란다는, 간절한 표정도 이따금씩 띠면서. 그러나 친구1은 달랐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는 종종 코웃음을 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자세히 귀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뭔가 근사한 얘기로부터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고 급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니기미... 그가 그렇게 욕을 내뱉듯이 말했다. 선배님, 뜹시다. 아무래도... 그 말은 진위에 관계없이, 삽시간에 좌중에 불안과 공포를 감염시켰다. 특히 화들짝 놀란 것은 선배, 그리고 화자였다. 친구2는 좀 느긋한 편이었고, 친구1의 거동을 구경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뭔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건 그에게서 좀체 볼 수 없던 눈초리였다. 어쨌거나 모두 표나지 않게 서둘러 밖을 나갔고 선배가 애써 태연하게 셈을 치렀다. 밖은 겨울인데도 구질맞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선배는 친구1을 먼저 보내고 그런 다음 친구2도 보냈다. 비 맞은 동아일보 사옥이 매우 음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우산이요, 지 우산... 우산 파는 여자의 목소리도 뭔가 억척과 힘이 없었다. 저도 갈께요...
--지하도 건너가서 타면 안돼?... 둘은 지하도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에 물기가 질척하게 또 지저분하게 반짝였다. 노점상들은 길바닥에 갈린 장난감이며 지도 따위를 거두어들이고, 더 아래는 누더기 차림의 걸인들이 벌써 제각각 잠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자는 별로 할 말이 없이, 선배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선배가 애써 남 얘기하듯, 말했다. 사는 거야 그냥 살겠지마는... 예?... 무슨 소린가? 선배가 별 설명 없이 말을 계속 이었다. 동지가 더 힘들거야. 자네 애인 말일세... 동지라니. 선배는 그녀를 동지로 보고있단 말인가?... 동지라...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너무 보수적인지도 몰라. 생각은 그 정도였지만 화자는 왠지 감정이 복잡하고 답답했다. 기분이 좋은 것은 물론 아니고 이 사람이 웬 참견인가,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공장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데... 애를 가졌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렇게 얼버무리면 좋겠건만 선배 말은 더욱 아리송해져갔다. 그래? 차라리 잘됐잖아?... 이제 운동을 할 수 있으니 잘됐다는 건지, 아니면 지금 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그만두게 되었으니 잘 됐다는 건지... 아니, 그것보다, 전태일 일기를 정리시키는 그가 '동지로서 더 어려운' 여자 운운한다는 것보다, 그는 혹시 그녀에 대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둘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질문이 그의 가슴을 대책 없이 조여 왔다.
--난 불안해요. 여자가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그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느껴져서 화자는 그녀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괜찮아. 잘 될거야...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견딜 수 있지만....
--아버님 여긴 아무래도...
지하도 어둠이 밝아지면 어슴푸레한 서울 의대 대학 병원 캠퍼스다. 병원 쪽은 불이 켜 있지만 그래서 더 음침하다. 꽤 늦은 밤이다. 벤치에 화자 애인, 화자, 그리고 화자 아버지가 앉아 있다. 그런 채로 계속 음성만 들린다.
--자수해. 아직 늦지 않았다. 검사 할 수 있어... 혹시 제가 잘못 되더라도... 아버님. 이 사람만은... 이 사람? 네 이놈! 누구 맘대로 이 사람? 네 애미는 너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불효막심한 놈... 애를 가졌습니다... 뭣이여?... 여자가 크게 고개를 꺾고 아버지가 천근만근 한숨을 쉬었다. 푸. 못된 놈. 애는 키워 주마... 아버지가 일어서서 문리대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남자와 여자 둘은 병원 쪽으로 걸음을 수근수근 옮기고, 카메라 올라가면, 의대 캠퍼스. 오른쪽으로 돌면 굳게 닫힌 정문을 착검총 군인들이 검게, 막았다. 잔뜩 얼어붙은 밤 풍경이 스스로 밤 깊어 저물기를 기다리고 네온사인이 독버섯처럼 음산한 뒷골목. 여관과 술집거리가 풀죽고 한산한 채로 제 혼자 악을 쓰는 듯 했다. 도처에 검문이 창궐했다. 밤. 불 꺼진 동아일보 사옥. 편집국 유리창이 하나 둘 켜지며, 기자들의 음성. 우리는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이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선배의 음성. 바로 이거야. 기자들이 드디어 해냈어. 전국 신문 방송들이 일제히...
동아일보 흩어지면, 길이다. 성공회 골목길은 꾸불꾸불하고 카메라가 바닥을 훑으며 따라간다. 그럼, 이제는?... 남자다. 남자의 등 줄어들면 세실 레스토랑 내부. 적당히 우아하고,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화자와 선배, 그리고 화자의 애인이 탁자 주위로 앉아 있었다. 화자 애인은 배가 상당히 불어 있었다. 화자는 여자에 대해 자신만만하면서 선배에게 무척 다그치는 조였다. 도대체 언제까지요?... 선배는 끄덕 없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했는데, 눈이 사방을 좀 살필 뿐 어투는 전혀 변한게 없었다. 아직 안돼. 이럴수록 조심해야지... 참아. 조금만 더. 고생 많이 되시죠?... 애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덕수궁 돌담길이다. 그 길을 화자와 애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선배는 또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 분위기는 완연히 풀리고 있다, 고 선배는 생각하고 있었다. 화자의 생각도 그랬다. 그러나 애인은 달랐다.
--방을 또 옮겨야 겠어요. 아무래도...
--괜찮아. 인심이 우리 쪽으로 점점 쏠리니까...
여자는 더 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괜히 불안만 가중시킬 테니까. 아,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자포자기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거였다.
--언제까지 쫓겨 다니기만 할꺼야. 일을 찾아야지. 정리만 마치면.
--잘 되어가요?
--글쎄. 자꾸 죽음에 집착하게 되서 말야...
여자가 소스라치며 걸음을 멈추었다. 경악에 질린 그녀의 표정에 남자가 비로소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 말예요. 당신이 불행해지는 건 못 봐.
그러고 여자는 한없이 기어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대답이 없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전요, 당신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남자는 끝내 말이 없었다. 왼쪽으로 돌담이 끝나고 자동차 빵빵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둘은 대로변으로 나왔다. 건너편 동압일보 건물 편집국이 유독 불야성이었다. 그 건물 위로 텔레비젼 화면이 겹친다. 구치소 앞이다... 출감하는 민청학련 관계자들.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만세를 부르는 가족과 친지들. 8·15 해방 이래 복장이 바뀌었을 뿐 유구한 장면이다. 박수소리 그치면 출소자 환영 플래카드. 마이크 음성으로. 그럼 지금부터 이번에 출소한 민주 학우들 자기 소개가 있겠습니다... 플래카드 줄어들면 다방 안이다. 플래카드 밑은 반원형으로 출소자들이 의자에 앉아 있고 나머지 공간은 환영식에 참가한 남녀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다. 출소자들은 말끔한 차림이지만, 어딘가, 머리 다듬은 거나 혈색 같은 것이 징역기를 풍겼다. 돌아가면서 일어나 뭐라 인사를 하고 박수가 터지고 그랬다. 사회학과 4학년. 무기 구형 받고, 20년으로 감형됐습니다... 박수. 서양사학과 3학년. 무기에, 20년입니다... 박수. 누가 먼저 그랬는지, 출소자들은 별다른 소개 없이 그렇게 학과와 형량만을 보고하듯이 말하고는 앉았다. 법대 복학생. 15년... 다시 박수. 그리고 그 옆 출소자가 일어났는데 그는 얼굴이 여승탈처럼 퉁퉁하고 선은 가늘었다. 그리고 뭔가 코믹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좌중의 사람들이 대개 그의 코믹함을 익히 알고 있는 듯 킥킥 소리도 났다. 그가 좀 머쓱한 티를 내다가 좌중을 한바퀴 휘익 둘러보고 씨익 웃자, 킥킥 소리가 좀더 많아졌다.전 정외과 4학년인데... 허허, 그렇게 노골적으로 웃다가 좌중이 조용해졌다. 아니 좌중이 조용해질 때까지 그가 기다렸다. 침을 꿀떡 삼킬 때까지. 그리고 손으로 뒷머리를 짐짓 긁적대며 말했다. 저는, 무죄올씨다... 와아, 짝짝. 폭소와 박수가 터졌다. 출소자들 얼굴에 달려있던 무거운 표정도 부풀어 오르다가 풍선처럼 터졌다. 허허, 저 새끼, 저거... 암흑, 이 새하얘지고 그것이 줄어들면 신문, 동아일보 백지 광고 면. 그 면을 채우는 크고 작은 격려광고들. 재벌에 의한 광고탄압을 규탄하는 굵직한 면들 사이로 '민주 언론 수호하자', '이름모를 한 시민이', 등등. '저금통을 깼어요. 민주사회를 바라는 어린이.' 등등. 고사리손 광고도 보인다. 그러는 동안 화자의 음성.
--그때, 언론은 희망이고 아름다운 공동체였다. 겨울에서 봄까지 난 친구들을 만나 격려광고를 부탁하고, 그것을 읽고 그러는 재미로 살았다. 짧을 것이 분명하므로 더 필사적인 재미로...
여자의 콧노래 소리. 두껍아 두껍아... 골목길이었다. 길이 땅바닥으로 급히 기며 꾸물거렸다. 여자가 아기옷가지를 한 꾸러미 사들고 흥얼거리며 귀가하는 길이었다. 배가 무척 부른 상태였다. 손에 든 꾸러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대고 그러느라 여자는 앞도 뒤도 잘 살피지 않았다. 남자가 뒤를 쫓고 있었다. 손에 꽃다발을 들고, 그렇게 가다가 놀래켜 줄 참이었다. 조금만 더. 골목길을 돌 때 쯤. 아주 기분 좋게. 너무 놀라면 안 되고. 애한테 지장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남자는 기회를 보며 따라갔다. 그의 얼굴도 휘파람 불 듯 표정이 밝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모처럼 애틋했다. 그러니까, 꽉 막힌 곳은 싫다 이거지?... 복덕방 영감은 그렇게 묻고 안경 너머로 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뇨. 그냥 답답해서요... 그랬지만 신혼 부부라고 해놓고는 사방 뚫린 방을 찾는 게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나 이거나. 두루치나 매치나. 그래 딱 맞춤한 방이 있지... 그렇게 얻은 방은 살기에 괜찮았다. 그리고 운도 좋은 것 같았다. 세상은 분위기가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모든 일이 다 한이 있는 거야. 시계추가 이젠 다른 방향으로 들어섰어... 모두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여자가 골목 어귀를 돌아 사라졌다. 텅 빈 골목의 고요가 갑자기 그를 숨 막히게 했다. 불길했다. 그가 걸음을 빨리 했다. 아 불길한 예감은 왜 그리 정확히도 들어맞는 것인지.
--어맛, 여보!
골목길을 돌자마자 남자는 여자와 부딪쳤다. 소스라쳐 놀란 표정을 수습하며 남자가 여자를 껴안으려 했지만 여자가 더 질겁한 표정으로 그를 밀쳐냈다.
--쉿, 누가 있어.
--누구?
--저 새끼. 분명 나를 봤을 텐데.
호루라기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고 발자국, 우르르 발자국이 밀려왔다.
--튀자!
남자가 여자 손을 잡고 달리려 하고, 꽃다발과 아기 옷가지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널부러지고 여자가 남자를 따라 조금 뛰다가 뭔가 단호하게 포기하고는, 발을 멈췄다.
--...?
--안돼. 집을 수색할거야.
수색?... 아, 그랬다. 방 안에 어지러이 널려 있을 전태일 일기 조각들. 그것들이 뇌리를 쳐대서 남자가 머리를 싸맸다. 그것을 지우려 머리를 뒤흔들었지만 일기는 낙인처럼 새겨진 채 계속 남자의 뇌리를 쳤다. 여자가 아기 옷가지를, 그리고 꽃다발을 허둥지둥 주워들며 말했다.
--내가 도망치는 척 할께 당신은 모른 척 지나쳐서 집으로 가. 자, 빨리!
그녀가 뒤뚱뒤뚱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르르 구둣발은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이, 이봐.
그녀가 돌아서 고갯짓을 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해요. 날 버리면 죽일거야.
그녀가 다시 뛰어갔고 곧바로 골목에서 형사 두 명이 튀어나왔다.
--어이, 거기 서. 거기 서!
심장 고동소리. 방이 보이는 골목길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데로 느리게, 침착하게 걸었다. 이웃집 여자 한 명이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았다. 느림이 느림을 참지 못하고, 제 스스로 분노를 폭발시키며, 걸음이 빨라지다가 광포해졌다. 그가 이웃집 여자의 시선을 뿌리치듯 맹렬히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제키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 원고지를 후다닥 챙기는 소리가 창문 밖으로 새나왔다. 이웃집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려는 순간, 방이 우당탕 열리고 그가 쏜살같이 튀쳐 나오는 바람에 여자 모가지가 집 안으로 쏘옥 기어 들어갔고, 그냥 한 뭉테기로 뒤섞인 종이 뭉치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의 표정은, 그걸 결사적으로 움켜쥐려는 건지, 아니면 갖다 버리려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그가 마구 달리다가 옆 골목으로 빠지고 곧바로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방문이 열린 것을 보고 금방 속은 것을 알았다. 에이 쌍년. 이걸 그냥... 발을 쾅쾅 구르며 주먹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형사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다른 형사가 위로하듯 하다가, 더 폭발했다. 놔 둬. 지가 뛰어야 벼룩이지. 이 새끼들, 지들이 무슨 혁명간 줄 안다니까... 그년 조져. 어디로 간 줄 알거야... 어지럽게 흩어진 방이다. 낡은 장롱. 냄비며 휴대용 가스렌지 석유곤로 등 조촐한 식사도구들. 작은 평상 하나. 그 위에 어지러운 원고지들. 카메라 구석구석을 비추면, 여자 음성이 묻어날 듯 하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당신 정말 저 사랑하죠?
카메라창 밖으로 나가 위로 뜨면 판잣촌 전체가 저 아래 엎드려 있다. 저 아래, 풀 죽어 걸어가는 남자. 머리칼을 쥐어뜯고, 정지. 그리고 음성.
--사랑도, 전태일도, 나는 대충이었고, 그녀가 진짜였다. 하지만 세상은 내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좀체 주지 않았다. 사랑도, 전태일도...
소방차 달려오는 소리가 나고, 곧바로 소방 호스가 물을 뿜었다 .소방차다!... 개새끼들, 사다리까지 갖고 왔어!... 동아일보 편집국. 농성을 하던 기자들이 우루루 문 쪽으로 몰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러나 문 밖에서 문을 뚫고 들어오는 산소 용접기 해머 소리. 기자 한 명이 손을 치올리며 구호를 외쳤다. 자유 언론 사수하자!... 남녀 기자들이 모두 손을 치켜 올리며 같은 구호를 연호했다. 그들은 그렇게 문에서 조금 물러나 대열을 짓기 시작했고 문은 쉽게 뚫리고 바리케이드가 우당탕 무너졌다. 쏟아져 들어온 것은 각목을 든 배급소 직원들이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렇게 다혈질 몇이 그들에게 돌진했지만 곧장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고, 여기자들의 비명과 통곡소리가 엇갈렸다. 비명은 공포 때문에 통곡은 겁에 질린 자신의 비참 때문에 터져 나왓을까... 노래는? 어둡고 괴로워라... 누가 먼저 불렀을까. 그렇게 선창한 <해방가>를 대열이 모두 따라 부르는데, 각목부대가 그것을 무참히 짓이겼다. 아악, 사람 살려!... 한 여자가 그렇게 마지막 단말마를 토했다. 새벽 5시였다. 동아일보 건물 편집국 사무실 창문 불빛이 두 세 차례에 걸쳐 모두 꺼지고 <해방가>는 허밍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쫓겨난 백 수십명의 간부 및 기자들이 건물을 나오면서 이루는 행렬이었다. 음악은 더 음울하고 장중한 것으로 바뀌고 행렬은 재판정에 입정하는 인혁당 피고들 행렬로 바뀐다. 밧줄에 두루 얽힌 그들 손목에 고문 자욱이 시커멓고, 줄어들면, 재판정이다. 방청객들은 주로 남녀 가족이고 푸른 눈의 선교사들도 섞여 있다. 곧바로 재판장이 재판봉을 두드리며, 느리게, 그러나 일사천리로 선고했다. 도예종 사형, 여정남 사형... 말도 안돼!... 여자 가족 한 명이 그렇게 벌떡 일어났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이구나. 설마 했는데 정말이구나... 스스로 죽음의 몽둥이 세례를 맞은 것보다 더 큰 충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재판장은 계속 사형선고를 이어갔다. 당신도 40일 동안 전기고문을 받아봐!... 일가친척은 아닌, 인권운동 단체에서 나온 듯한 청년이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그게 가족들의 말문을 텄지만 헛바퀴가 돌 듯, 말이 자꾸 반복되었다. 조작이다. 전부 조작이다... 이 재판 모두 엉터리야, 엉터리!... 그리고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한 것, 다리가 후둘거리는 밑 모를 공포를 이기고 그 공포에 대항하게 만든 것은 말이 아니고, 울음이었다. 엉엉, 여보. 여보. 죽으면 안 되요, 여보... 한 여자가, 한 가족이 그렇게 울며 우산으로 등받이를 마구 두드렸다. 그 열의 가족들이 일제히 그렇게 따라 했고, 방청객들이 모두 울음을 삼키고 기성(奇聲)을 지르며 등받이를 쳐댔다. 그 집단적인 절규는 너무 질서정연해서 더욱 소름끼치는 데가 있었다. 검사와 판사, 그리고 변호사까지 잠시 망연자실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아니 복종하는 듯 했다. 선고가 중단되었다. 사복들이 전경을 이끌고 재판정으로 들이닥쳤다. 고함과 비명과 절규와 욕설로 아수라장이 되고, 그 틈에 정신을 차린 재판장이 미친 듯 재판봉을 두들겨대고 검사가 슬그머니 퇴장하고 그러는 중에도 그 질서정연한 기성은 유지되는 듯 했다. 마치 스스로 택한 운명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듯이. 구둣발에 법원 뒷문이 덜컥 열리고 가족--방청객들이 강제로 끌려나와 버스에 실려졌다. 버스는 난폭하게 떠났다. 그 아수라장 속에 장중하고 음울한 음악은 더 커졌다. 버스는 진눈깨비 흩뿌려 희미한 한 강철교를 지나 방청객--가족들을 여기저기 몇 명 씩 흩뿌렸다. 땅을 치며 우는 가족들. 그러나, 뭐지? 그들의 대성통곡을 아주 사소한 울부짖음으로 돌리고 위로하는, 거대한, 스스로는 더 끔찍한, 그러나 운명처럼 스스로를 감싸는 이것은, 뭐지?... 안개 낀 새벽 행렬.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끌려가는 8명의 인혁당 사형 선고자들. 느티나무 한 그루 치솟은 사형장. 그 행렬이 섞여 들어가는, 싸늘하고 음산한 회색 안개의 거리. 행인들. 그 속에 휩쓸려 흘러가는 화자. 689번 김순모 씨 7번 창구로 오세요... 몇 번 누구 몇 번 창구... 그렇게 번호와 이름을 부르는 마이크 소리가 들리는 구치소 접수처다. 영치금이나 물품을 접수시키러 온 가족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분... 신청서를 들여다보고 구치소 여직원이 말했다. 면회는 안 되고 영치금 접수만 하십시오... 매우 정중하지만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니,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왜 면회가 안 되죠?... 가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고 여직원이 머뭇댔다. 그때, 한 가족이 허위허위 달려왔다. 하이고, 하이고 이 개자석들!... 사색이 된 그녀는 거기까지만 겨우겨우 달려왔던지 같은 인혁당 가족들을 보자 그냥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불길한 생각이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여기저기서 차례를 기다리던 인현당 가족들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무슨, 무슨 일이예요?... 아이고, 이 쥑일 놈들. 엉엉... 그녀는 울기만 할 뿐 억장이 무너져 말문이 열리지 않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칠뿐이었다. 다른 가족들도 벌써 몸이 굳고 등골에 싸늘하게 금이 가고 머리칼이 쭈볏쭈볏 곤두서는 것 같았다. 무, 무슨?... 하이고, 하이고, 말도 마소... 그렇게 말문을 더듬다가 여자가, 땅바닥에 발을 구르고 신경질을 내면서 내팽개치듯이 말했다. 벌써 형집행했다 안캅니까. 하이고, 내사마, 이놈들...
-- 형집행? 형집행?... 사형? 아아... 혼절하는 가족들. 그들을 부여잡고 다시 자지러지는 다른 가족들. 암흑. 흩어지면, 다시 행렬이다. 가족친지 및 선교사들이 교도소 영구차를 앞세우고 장례 겸 항의 행렬을 벌이고 있다. 분위기는 장중하면서도 여전히 급박하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길 양편에 구경꾼들이 몰려 있지만 거리는 음산하다. 장례행렬보다 더. 사람들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호기심도 얼어붙었다. 공포에 질린 눈이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공포... 그랬다. '인혁당 피고 8명 새벽에 사형 집행'이란 1면 톱기사가, 그 죽음과 새벽이 그들을 공포로 얼어붙게 만든 거였다. 공포는 멀리 전염될수록 위력을 발한다. 행렬과 그 군중들 위로 인혁당 사형수 하재완의 음성이, 흘렀다. 고문 때문이지러. 말도 마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 니께로 쬠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영구차 안이다. 형사가 무전교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운전수에게 뭐라 지시를 했다. 운전수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핸들을 돌렸다. 차안이 크게 기울었다. 뭐야, 이거 어디로 가는 거야, 응암동 성당 안 가고?... 그 뜨아한 목소리는 금방 지워지고, 벌써 눈치를 챈 가족 한 명이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다스리며 형사에게 매달렸다. 하이고, 형사님.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주소. 장례라도 제대로 치르게 해주소... 가족들이 모두 형사와 운전수에게 울고 불며, 때론 악을 쓰고 욕을 하며 매달리고, 형사는 일순 당황, 무전기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동대, 어이 기동대... 에고. 안돼. 안된다. 이놈들!... 가족들이 형사와 뒤엉키며 버스 밖으로 나뒹굴었다. 가족들은 길바닥에 엎어져 울부짖고 신부와 목사들이 결사적으로 버텼으나 소용없고 기둥 경찰이 그들을 마구 짓밟고, 그 와중에 아악!, 목사의 다리가 부러지고, 그와 동시에 포크레인이 영구차를 들어올렸다. 카메라 더 올라가면 길 양편에서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호기심은 살았지만, 전혀 방관자의 눈이기는 마찬가지다. 군중 속에 끼어있는 화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군중들 사방으로 흩어져 골목길로 스며들었다. 그 속에 끼어 있는 화자. 암울한 평상을 회복하는 거리. 희뿌옇게 흩어지면, 화장터. 뼛가루를 빻는 손. 그 위로 음성이 겹친다. 살해자 대통령 박정희, 석방되어 출소하는 민청학련 관련자, 그리고 사형당한 여정남의 음성이다. 민청학련 새끼들. 이거 순 빨갱이들 아냐. 모두 총살시켜... 아무리 독살스런 사람이지만 설마 사형시키기야 하겠어요... 아냐, 박정희는 지금 몇 명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뼛가루 흩뿌려져 시야를 흐리다. 다가, 흩어지면 명징하게 드러나는 양평 북한강가. 죽음을 머금은 듯 어둠으로 영롱한. 화자의 음성.
--혹독한 고문의 증거는 그렇게 없어졌다. 그러나 한 사회 전체의 죽음이 더 흉악한 몰골을 드러냈다. 우리는 도처에 만연한 죽음과 곧바로 부딪쳐야 했다... 그 하루 뒤 서울 농대생 김상진이 할복자살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