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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1場> 疾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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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1場> 疾走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제가 야근할 때는 밥 좀 챙겨드세요.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어.
--응, 그래야지.
--누가 또 잡혀갔던데...
--알아.
시간이 조금 지났다. 둘은 개다리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상 위엔 김치와 콩나물, 그리고 소고기 구운 것 몇 점이 놓여 있었다. 남자가 밥에다 냉수를 부었다. 여자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왜 고기 안 먹구?
--당신 먹어. 나는 뭐.
여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숟갈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뭐, 어때서요?
사내가 고개를 꺾었다.
--왜 그래요, 또?
--난, 아무래도, 아무 쓸모없는 놈인 것 같아.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배를 쓸어보았다. 사내가 그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꺾었다. 여자는, 의외로, 소스라치게 놀란, 그리고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다.
--미안해.
--다 듣는 단 말예요.
--나도 공장에나 나갈까?
--당신은 좀더 큰일을 하셔야죠. 저야, 잠깐 고생하는거구. 뭐, 아는 분 소개라서 힘들지 않아요. 경리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더니 그녀가 자기 배를 다시 쓰다듬으며 대뜸 뱃속의 아기를 얼렀다.
--우루루루. 그렇지, 아가? 니 아빠 판검사 되실 분이지?
그리고는 곧바로 풀이 죽었다. 사내보다 더 무지근하고 어둡게.
--하긴 이젠, 공장도 못다니겠다...
--엉, 왜?
--결혼도 안 하고... 애 밴 공순이를 누가...
--...
자동차 빵빵 소리. 귀가 전쟁이다. 정릉! 신설동!... 무교동이다, 통금 30분 전. 택시들이 정거--출발 간격을 가파르게 하며 자기들끼리도 우왕좌왕댔다. 술 먹다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행인들이 귀가를 서두르며 행선지를 불러 댔는데, 비틀거리는 폼까지 겹쳐, 위에서 보면 거리가 온통 난파선 같았다. 그렇게 거리풍경이 이어지고 화자가 동대문 방향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문 닫히고 출발하는 소리. 그리고 화자와 운전수의 음성. 아저씨, 청계천까지 가는데, 돈이 없어요... 엉? 그럼 내려, 임마. 어, 재수없는 새끼... 택시 문 열리고 더 신경질적으로 닫히고 다시 욕설 대신 부웅, 하며 택시 떠나는 소리. 다시 '청계천' 하며 설 듯 말 듯 하는 다른 택시를 쏜살같이 잡아타는 남자. 다시 길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남자. 그렇게 몇 번을 갈아타서야 남자는 자취방이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희미한 가로등이 켜있고 통금 사이렌 소리 들리고 곧이어 방범대원 호루라기 소리. 남자는 그 소리를 이리저리 잽싸게 피하다가 자취방 골목으로 들어서서야 한풀, 안심했다. 걸음걸이가 아연 터덜터덜해졌다. 태일 동생의 목소리. 여공들이 너무 불쌍해서 차비까지 빵을 사주고 자기는 청계천에서 미아리까지 걸어 왔어요... 어머니 소리도 끼어들었다. 하루는 새벽에 왔다. 통금에 잡혔다가. 그 담엔, 사정이 딱하다고 파출소에서 봐주고... 남자에게 그 텅빈 골목길이 아득하고 또 아득한데, 언뜻 여공들의 피난행렬이 이어지는 듯도 하였다. 그래. 더 어린 전태일의 가출도 있었지. 그래. 체육대회 날, 연탄가스를 마신 채 마라톤을 하던, 어린 전태일. 연기를 뿜는 기차 화통.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 기차바퀴. 개구멍으로 빠지는 소년. 검표원을 피해 의자 밑으로, 할머니 치마폭으로 숨는 거지 소년.
--그래 푸근한. 그런데 왜, 이리, 내 숨이 가쁜가...
방. 이다. 남자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남자를, 기차의 속도가 덮치고, 그것이 빨라지고, 거칠어지는 심장 박동 소리. 소년의 기억을 지울 듯한, 남자가 사라지는 영상을 잡으려 하지만 이내 그것을 짓밟아 버리는 모종의 속도의 숨 막힘. 눈을 꾸욱 감는 남자. 남자의 의식을 모두 지워버리며 달리는 기차, 속도. 바퀴 소음. 흐르는, 정지한, 흐려진 기차의 윤곽 속에, 그 밑에, 철길이 반짝이다가, 모두 지워지고 암흑, 그리고 소리마저 지워진 채 또 암흑.
--점점 내게로 더 다가오는 이 숨 가쁨은, 뭐지?
--사과궤짝 속이라 춥진 않다, 형아. 근디, 좁다.
--꽉 껴안아. 더 꽈악. 더 따숩게.
더 푸근하게... 안온하게... 다시 심장 박동 소리. 그런데, 왜, 이리, 내가 답답하지? 더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 점점 내게로 더 다가오는 이 숨 가쁨은, 뭐지? 숨 막혀, 으아악!!... 콰당탕 문이 열리고, 탈출하듯 남자가 뛰쳐나왔다. 카메라 뜨면 저 아래 달빛 비친 골목길을 내닫는 남자. 남자를 빨아들일 듯, 검게 입을 벌린 자취방 문. 화자의 음성.
--아, 그것은 내 안의 뜀박질이었다. 나는 그 방이, 죽음 같았다. 배추꼬갱이를 집으러 바다에 뛰어들었던 굶주린 소년 전태일의, 이대로 익사하고픈 충동을 나는 느꼈지만, 나의 뜀박질. 내 안의 뜀박질. 하지만 무엇을 향한? 무엇으로부터의?
여자가 미친 듯이 사내를 흔들어 깨우고 나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 오들오들 떨었다. 새벽이슬보다 더 명징하고 끔찍한 한기가 뼈골까지 스며든 상태로. 그는 그날로 방을 옮겼다. 앞뒤로 툭 터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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