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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6場> 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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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6場> 家族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시장. 땅바닥에 흩어진 배추, 무우 우거지들. 그것을 줍는 아낙네들. 그들을 몽둥이로 쿡쿡 찌르는 경비원들. 그것을 피하며 우거지를 한 잎 두 잎씩 줍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태일 어머니.1960년대 중앙시장이다. 카메라, 구석진 곳을 비추면, 가마니 깔린 곳. 거지 아이들. 그들과 함께 잠을 자는 어머니. 여전히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다. 벌어진 수건 틈새로 보이는 빡빡 머리. 슬그머니 나타나 어머니 잠을 깨우는 태일.
--엄니, 엄니.
그가 좌우를 조심스레 살피며 다시 어머니를 깨우고, 어머니는 흠칫 놀라 일어났다가 금방 태일을 알아 보고는 안심한다.
-- 그래. 너로구나. 으구, 내 자식.
어머니가 태일의 뺨을 쓰다듬으려 하지만 태일은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엄니. 밥 못 묵읏제?'하면서 뒤에 숨겼던 것을 내놓는데, 처음엔 잘 보이지 않다가, 검은 수수떡이다.
--이, 이것이 뭣이다냐, 하이고, 이 놈아, 자석. 하이고, 하이고오.
--사람들 깨기 전에 어서 먹어.
어머니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화들짝, 죄지은 사람처럼 질색을 하더니, 그제서야 말문이 터졌다.
--내가, 내가 이걸 어떻게 먹겠니. 흐윽.
아직 울먹임이 압도적인 채로 그녀가 태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마치 때리듯이.
--이 놈아 자석아. 어구 내 새끼. 킹, 니가 부모 잘못 만나서...
--쓸데없는 소리.
그의 말투가 단호하고, 어머니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그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엄니, 입술 부르튼 걸 보니까 아침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지?
그녀가 감정을 진정시키며, 오히려 그를 달래듯이 말한다.
--아이다... 많이 묵었다. 아이들이 맛있는 것 동냥해오면 나눠주곤 한다... 킁.
수건으로 눈물 콧물을 대충 수습하고 그녀가 수수떡을 태일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어머니다. 벌레를 물어다 새끼들 주둥이 속으로 넣어주는 어미새 같다.
--그라지 말고 어서 묵어.
아들의 그 말이 거의, 어미새의 발에 채이는 것처럼 들렸다. 어머니는 콧물을 깨끗이 닦아내고 아들의 두 손을 잡으려는데 아들이 멈칫하며 얼굴을 빼자 어머니는 뭔가 짚히면서 아들의 얼굴을 와락 붙들고 서둘러 뜯어본다 온통 시푸르딩딩한 얼굴이다. 아들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지만 어머니는 아랑곳이 없다.
--이, 이게 우찌된 일고?
--아이다. 그냥 계단에서 넘어졌다.
--계단? 거짓말 말그라...
어머니는 아들에게 불행한, 불의(不義)한 일, 몹쓸 일이 벌어졌음을 확신하고 그를 다그치며 좀더 찬찬히 얼굴을 훑어보고, 아들은 쉽게 체념한다.
--괘않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 자석을 이리 쥐팼단 말고. 도대체 누고?
어머니는 급기야 '불지 않는' 아들을 호되게 혼낼, 그러면서 자신은 벌써, 자신의 한탄까지 푸짐하게 섞으며 자지러질 태세고, 아들은 머쓱하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아들은 맞은 것보다 자기 죄가 더 많다는 투다. 뭐지, 왜지? 어머니는, 어머니가, 모종의 죄의식에 감염되기 시작하고, 아들은 '모종'이 명료해지는 것이 두렵다.
--신문 팔다가... 괘않다.
--하이고, 이 몹쓸 놈들. 하이고, 그기 무신 떼돈 버는 거라꼬 . 내 이놈들을...
아들의 헛심이 어머니의 헛심을, 아니면 거꾸로, 아니면 2중적으로 동시에, 아니 헛심이 헛심을 제풀에 무너트리고, 무너진다. 반항해서가 아니다. 그가 참회한다. 마침 내 끔찍한 가난의 죄가, 참회한다. 그가 울먹이면서.
--어무이, 그게 문제가 아니요. 순덕이, 불쌍한 우리 순덕이 빨리 찾아와야제.
말하고, 참회가 참회를, 낳았다. 어머니가 흐느끼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은 타령처럼 길고 타령은 생애를 닮는다. 그녀가,
--그래, 그래. 내가 미친 년이다. 어떻게든 너거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건데. 죽어도 떨어지면 안 되는 건데. 끄윽. 내가 죽을 년이여, 끄윽
이상하지. 울음은 항상 응축하며 폭발한다. 응축이 폭발이다. 그렇게 참회가 참회를 위로한다.
--엄마, 엄마가 무슨 잘못이 있어. 엄마는 잘못 없어. 울지마요, 엄마.
어머니는 단호하고 냉정하다. 참회 또한 그렇다는 듯이.
--아냐 내가 너희들을 놔두고 가출하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돈을 벌려고 왔다지마는.
--아냐. 아녜요. 엄마가 안 그랬으면 우린 모두 굶어죽었을 거야.
아들은 물론 위로의 말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아무리 ~지마는'의 뒤끝을 흡사 잘라낸 듯, 어머니의 참회는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서슬 푸르고, 굵은 눈물을 훔치던 아들이 비수를 맞은 듯 흠칫, 놀랐다. 그는 또 일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우리도 그렇다. 그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어머니는 곧장 삶 속으로 귀환하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 다 모여 살 수 있어. 조금만 더 있으면,
그렇게 그가 펄쩍 뛰면서 계속 떨어지고,
--아버지하고는 안 된다.
어머니는 그랬다. 그녀가 삶에 내린 뿌리는 이미 완강했다. 물론 자식새끼들 때문이었다.
--판잣집이라도 한 채 장만할 때까지는 안돼.
--술을 끊으시면.
그도, 뿌리를 내렸을까, 정착했을까? 어머니가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어머니답게 가족들을, 모두 감싸 안는데, 마치 안도의 한숨을 쉬는 듯 하다.
--푸우, 착한 자석. 니도 알제? 아버지 술은 세상 때문에 그런 거야. 아버지가 나빠서 그런 거 아이다. 니도 알제?
--어무이, 어무이가 정말 착하제... 나는, 나는 속만 썩혔지라.
--아이다, 아이다. 니도 알제? 니 때린 거 니가 미워서가 아이다. 알제?
그러나, 시장 더 깜깜해 지면서 암흑. 죽음의, 예감의 암흑. 그리고 소리. 될 수 있는 데로 안도하고 싶은, 애써 편안한 투의 목소리. 여자다. 남자의 여자.
--이 집도 옮겨야 해요.
--뭐, 어차피, 100% 안전한 데는 없으니까... 시골로 갈수록 더 위험해. 도바리 치는 데는 복잡한 서울이 제일 안전하지.
--이렇게 갇혀 있는 건 안 그래요. 동네 사람들이 쑤근대는 것 같구.
--하, 그렇지, 뭐. 뭐, 잡혀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 어쩜. 아무리 농담이라두...
소스라쳐 놀란 목소리다. 남자와 여자. 그들은 언제 깨었지? 경악으로만 깨어있을 수 있던 1974년. 그때 남자의 나이 26세. 여자의 나이 22세였다. 밖은 여전히 동요 소리.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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