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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5場> 童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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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5場> 童謠를 위하여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선서대. 검은 법전. 법원의 상징인 무궁화. 법의 저울상. 재판정이다. 검사가 논고를 하고, 있었다.
--본 피고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투철하게 무장된 자들로서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가족 방청객들이 웅성대다가 급기야 누가 소리쳤다. 처음엔 그래도 여유가 있는 야지였다. 그러나 주제는 죽음이었다.
--집어쳐! 우리 남편은 빨갱이 아냐!
정리들이 바싹 긴장한다. 판사가 조용히 하라며 재판봉을 탁탁 내리치고 검사는 숙제를 치르듯 아예 귀를 막고 논고장을 계속 읽었다. 땀을 비직비직 흘리며... 당연하다. 그도 주제는 사형이었다. 가족 방청객들의 호소와 발악, 그리고 절규가 계속되었다.
--빨갱이 아니라고 검사가 그랬어요, 나한테. 도장만 찍으면 금방 풀어 준다고.
남자 방청객이다. 그렇다. 일렬로 주욱 늘어선 한복과 푸른 수의 차림의 피고인들 중에는 단발머리 여자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개준의 정이 전혀 없으며... 증거도 완전 인멸하는 고도의 ...
--여보슈, 증거 완전 인멸이면 증거가 없다는 거 아냐!!
또 다른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코미디, 도저히 웃을 수 없지만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코미디가 끔찍한 비극의 몰골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조용, 조용!
재판장이 다시 재판봉을 탁탁 두드렸지만, 그의 얼굴은 짐짓 근엄했을 뿐 맥이 없고 방청객들은 갈수록 격해졌다. 재판장도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검사에게 달겨들어 멱살을 거머쥐려 하자 정리가 우르르 달려들어 떼어내고 방청객들을 모두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 경찰이 합세하고 형사들이 말리는 둥 저지하는 둥 하다가 어중간하게, 합세했다. 모두 뒤엉킨 채로 방청객들이 재판정 밖으로 밀려나 앞마당에 내팽개쳐졌다. 흔들린다. 어지럽다.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 땅은 굳건하건만, 단지 몸이 뒤흔들리는 것이건만, 세계 전체가 요동을 치듯 어지럽다. 그 현기증에 행여 속지 말기를. 단지, 카메라가 뒤흔들릴 뿐이다. 그 현기증에 스스로 취하지 말기를... 다시 호루라기 소리. 이번엔 그 소리가, 일반적인 소란의 일부가 아니고, 뭔가 위급을 알리는, 스스로 경악하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도 방청객들 악을 썼다. 개새끼들아, 으아, 엉엉, 개새끼들... 아악! 야 이 씨팔놈, 어딜 만지는 거야!... 안경이 벗겨지고, 수염이 떨어지고 아차!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아직 모르고, 다만 형사의 번득이는 뱀눈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형사는 기민하게 그러나 비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그 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누군지 혐의는 분명치 않고 아수라장 속이었다.
--누, 누가 . 이 놈 좀.
사내가 멱살을 풀려다가 여의치 않자 갑자기 얼굴 껍질을 화악 벗겨냈다. 그렇다. 변장용 인공피부였다. 그였다. 내 친구. 형사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여 오히려 기겁을 한 자세로 몸이 굳고 그 결에 사내가 멱살을 풀었지만, 그도 그리고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둘 다 우두망찰로, 그 아수라장 속에서 고요하게, 그래 흡사 평화롭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구를 서로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말문은 형사가 먼저 텄다. 신음소리에 불과했지만.
--이, 이 놈.
그 소리에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다리가 덜덜 떨리는가 싶더니 사내가, 그 덜덜 떨림 때문에 가속화된 것처럼, 쏜살같이 대열을 빠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저 놈 잡아라, 저 놈!
형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이미 놓쳤다는 것을 안 사람이 소리치듯 더 크게. 범인을 놓친 형사에게 흡사 면죄부를 주려는 듯이 방청객들이 그와 경찰들을 가로 막고, 화자는 법원 밖을 질주한다. 추적을 포기하는 형사. 방금 전의 난장판을 씻고 우우 몰려드는 방청객들. 그 군상이 거지와 다를 바 없는 60년대 지게꾼. 허름한 70년대 청계피복 노동자, 80년대 푸른 작업복 차림의 현대중공업 노동자, 90년대 컴퓨터를 다루고 자가용을 모는 노동자 군상으로 겹쳐가며 바뀌다가 마침내 강렬한 빛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고 그 빛마저 사라지면 앞의 베토벤 음악 흐르며 텅 빈 법원 마당에 낙엽처럼 떨어지는 전태일 일기장 낱장, 정지. 그 위에 타자로 찍히는 자막.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일기장 움직여, 떨어지고, 땅바닥에 안경과 콧수염, 그리고 찢겨진 인공 피부 마스크... 화자의 음성.
--70년대... 그 어두운 죽음의 시대... 숱한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기나긴 죽음이 되어버렸던 시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나는 살았다. 전철이 개통되고,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저격으로 죽은 직후였다. 나는 헌법이 죽었던 70년대의 지식인이었고, 그는 60년대 노동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며 몸에 불을 당긴 노동자였다...
방안이다. 매우 비좁은. 낡은 라디오에 땀내 배인 이불과 석유곤로 양은 냄비 등 취사도구가 한데 뒤섞인. 새벽 뉴스가 나온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홀로 남겨진 낯선 곳의 새벽안개처럼 음산하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습니다. 검사는 피고인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라디오를 툭 끄는 손. 그 옆에 일기가 적힌 공책. 어지럽게 널린 원고들. 런닝 차림의 등. 원고지에 무언가를 끄적대다 다시 찢어내어 구겨버리고 벌떡 뒤로 드러눕는 화자. 천정이 낮다. 천정에 그의, 전태일의 얼굴이 드러나려다 다시, 흐려졌다. 음성이 들렸다. 굵직한 음성. 선배였다.
--자네 같은 법대생 친구를 필요로 했어.
--알아요. 하지만...
--지금 별다른 일도 없잖아. 자넨 안 잡히는 게 바로 큰 일 하는 거야.
선배 목소리가, 매우 굵고 씩씩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안 잡히'는 운운이야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절박한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 상태를 견디는(?), 형식이 왜 그렇게 씩씩하고 굵었단 말인가, 마치 그게 그것 자체가 내용인 것처럼. 기다릴 필요가 없는 날이 와도, 기다림으로 낡은 생애를 늘어뜨리듯이. 기다림을 기다리듯이?... 방 밖으로는 곧장 골목이었다. 골목은 길고 그 양 옆으로 판잣집들이, 희뿌염한 새벽 어스름 속에 패전국의 행군처럼 비극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안개. 골목 안개는 푸르스름하고 신선했다. 그리고 종소리를 품고 있었다. 짤랑, 짤랑.
--두부우 사아, 아려...
짤짱, 짤랑. 두부 사, 아려... 언제나 그렇듯이 청아한 목청으로 고음을 기민하게 처리하며 두부장수가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걸음은 어슬렁댔지만 강건했고, 두부종을 흔드는 동작이 깡마른 것에 비해 율동이 있었다. 두부 장수가 옆 골목으로 꺾어지고 카메라 높이 뜨면 판잣집 대열이 끝나고 언덕을 좀 오르다가 몇 년 전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벽보가 모지라진 채 여직 붙어있는 회벽 구멍가게 언덕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새벽이라 어둑했지만, 그리고 외진 곳이었지만 군데군데 가난한 아침 출근자들이 모여 무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피로가 또 쓸데없는 공포를 없애주었다. 버스는 뭐랄까, 요란 덜컹대지만, 다소 안도감을 주며 도착했다. 버스는 한 여자를 내려주고 정거장 사람들을 모두 싣고 떠났다. 그녀다. 운동화를 신은, 그리고 회색 바바리 차림이 매우 단정했다. 한 손에 하얀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들고 있다. 그녀가 골목길로 들어설 때는 서서히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골목길도, 먼데서 두부장수 소리가 들릴 뿐 아무도 없었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렇게 집단적이고, 그러므로 은밀을 누릴 수 없다는 뜻이며, 은밀이 없는 한 공포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그녀 자신이 노출되지 말아야 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 동이 트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고 매우 쾌활한 걸음걸이였지만, 사라지려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듯이 걸었다. 한 굽이를 꺾으면 방문이 곧장 보였다. 그가 있는 방으로 곧장 통하는 문이었다. 그에게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빨리했다. 올 때마다 겪는 일이었다. 그에게로 가는 통로인 그 문이 너무 완강하게 닫혀 있고 닫힌 채로 자꾸 그녀에게서 멀어져가는 듯 했다. 뛰어갈 수는 없었다. 그가 경악할 것이므로. 그러나 그는 항상 경악했다. 아 그와 그녀 사이에 그 경악이 없었다면...
--똑, 똑, 똑.
--....
--똑, 똑.
세 번, 대답 없음. 다시 두 번.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그녀가 서둘러 들어가고, 그의 얼굴이 비쭉 튀어나와 주위를 다시 한번 살피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후, 하고 방바닥에 털퍽 내려앉았다. 담배연기가 자욱해서 숨이 막혔지만 그와 단 둘이 있는 좁은 방이 세상과 완벽하게 격리된 듯 한꺼번에 안심이 왔다. 그는 큰 상 위에 치우던 것을 여전히 치우고 있었다. 뭐지?... 어제도 그랬었다. 뭐, 큰 문제는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조차 무엇을 숨기는 것은 물론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 뒷바라지 하는 것만 해도 정말 힘에 부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남자 쪽 정보가 믿을 만한지 아닌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면 더 의심을 받을 것이고 형사가 그녀 집 주소를 추적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거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집을 나올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남자가 완전 은신을 택했고, 그때부터 모든 일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밥이며 옷 수발 그런 것은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있을지도 모르는 형사를 따돌리는 일이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더 힘든 것은, 정말 내가 미행을 따돌리고 있는 건가? 정말 날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새벽행이야말로 위험한 일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데도, 새벽행 말고는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건 결국 영어의 'To +동사' 용법과 같은 거 아닐까. '도망치다가 잡혔다'와 '잡히기 위해서 도망쳤다'는 결국 같은 거 아닐까? 심지어, 형사들은 그와 그녀를 그냥 지켜보다가, 자기들한테 딱히 소용이 될 때 잡아가려는 것 아닐까? 완벽한 도피는 애시당초 불가능 하다는 거. 우리는 수사망의 허점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거. 그렇게 답답하고 비좁은 땅이라는 거. 그녀는 자신이 급속히 절망에 감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중인데, 뭐지?... 그녀가 기분 나쁜 게 아니고 그 원고뭉치들이 뭔가 기분 나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저 낡은 공책 이 정말 그 죽은 사람 일기장?
--도시락 안 싸와도 된다니까 또 싸왔네?
역시 그는 낡은 공책에 박힌 그녀의 시선을 껄끄러워하고 있다. 도시락 꾸러미를 펴는 그의 손동작은 평소와 다르게 형식적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녀는 다시 낡은 공책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집에서 뭐라 안 그래?
그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 그냥 아르바이트 한다고.
그는 별로 더 묻지 않고 도시락을 열었다. 김치냄새가 화악 풍겼다.
--하아, 맛있겠다. 불고기네.
그가 숟갈로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고, 곧이어 젓가락으로 김치 한 쪽에 고기 한 점을 연거푸 우겨 넣고는 분명 과장되게 입을 우물대더니, 목이 메여 말은 못하면서도 아차 깜박 했다는 듯 당신도 먹으라, 뭐 그런 시늉까지 하느라 급기야 꺽꺽대고, 그 모습은 그녀를 대번에 행복감에 들뜨게 했다. 그래 묻지 않는 게 좋겠다... 누가 잡혀갔다는 얘기도. 여길 옮겨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걱정 얘기도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런 걸꺼야. 나와 만난 행복감을 만끽하기 위해 그 얘기를 안 하는 걸꺼야... 그렇게 단 둘만의 은둔과 소외와 막막함을 지독한 행복으로 착각한지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현 상태가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그녀는 다소 강하게 뿌리쳤는데, 그가 더 막무가내로 나와서 그녀는 거의 강제로 몸을 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누구? 그녀보다 먼저 그의 그런 느낌이 그의 완강해진 근육을 통해 그녀 몸에 전해졌고 그녀는 막연하게 덜컥 가슴이 내려 앉는 것을 저지하려고 두 팔을 쫘악 벌려 그를 맞았다. 그럼 그렇지... 그 다음 단어가 치욕스러운 내용일 것이 분명한 이 말은, 설마, 그가? 그럴리가... 그녀가 매우 낭패스러운 심정으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상체의 옷이 다 벗겨지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하체 께가 한꺼번에 썰렁했다... 죽는다는 것은 이런 걸꺼야... 그녀에게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일기장 때문에, 아니면 절망 때문에. 아니면 둘 다?... 아주 거대한 아픔이 그 썰렁함의 살점을 도려내듯 불도장을 찍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 입을 사내의 손이 아주 우악스럽게 막았다.
--...?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그의 손이 자신의 느닷없는 우악스러움에 대해 전혀 참회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니, 정반대였다. 그가 그녀 입을 계속 짓누르며, 하체를 계속 움직이며 꾸짖듯이 말했다.
--쉿, 밖에 누가 들으면 어쩌려 그래?
바깥? 그럼 여기는? 아아, 그래... 방안, 어두워지고 완연 밝은 창밖에 골목길로 아이들 노랫소리.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창마저 어두워지고 암흑. 그것이 아주 희미하게 빛을 쬐며 모종의 윤곽을 번득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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