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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3場> 質問의 肉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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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3場> 質問의 肉體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질문은 꿈 속에서 `내가, 누구지?' 처럼 들렸다. 거지 소년. 그가, 누구지? 그 또한 얼마나 더 좁고 더 구석진 곳을 파고 들 것인가. 기차의 속도가, 그의 불안한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며 의문을 지우고, 그가 꿈 속에 눈을 감고 그런 그를 짓이기며 기차가 잠 밖으로 달린다. 아. 그때부터, 그때도 기차는 그랬구나. 음악도, 여자도? 여자도. 바퀴 소음에 지워져 아주 희미하고, 소음만 거대하다. 그런 채로 정지,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의 의식이 끊어지고, 암흑, 소음의. 그 밑에 철길 언뜻 반짝이고, 그것마저 사라지고 소리가 소리를 지우고 암흑. 아, 젠장할. 어쩌다가. 이제 누가 그를, 깨우지?... 삶은 계란을 까는 손. 손 색깔은 삶의 싯누런 때가 추하지 않고 기름 묻은 듯 변형되어 가면서 점차 굵은 노동자 손으로 선명해지고... 삶은 계란 색깔은, 손때 묻었지만 포동포동한 미색(米色)이, 굳이 배고픈 자 아니더라도 매우 간절하다. 그 장면 흩어지면 중학생 소녀의 청초하고 깨끗한 교복 칼라, 그 위에 선명한 초조(初潮)의 핏방울, 흩어지면서 그 위로 겹치는 각혈, 여공의. 피복원단에 토해낸. 허리를 꺾는, 비좁은 작업장, 백열등. 형광등 빛. 눈을 아프게 찌르는, 고문실의. 그 빛이 악화되다가, 끊어지듯이 암흑. 한 귀퉁이에서 불이 번져 모두 태우고 다시 암흑. 탈색되면서 촛불과 흰 사발에 담긴 정한수, 검고 청정한, 솥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점차 징그럽고 끔찍한, 검은 윤곽을 드러내는, 법전. 낡은 시계. 구식 라디오. 그것이 흩어지면서 출근 수속을 밟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우울하고 웅장한 군상. 그리고 소비에트 패망 사진. 아, 그건 90년대다. 그땐 90년대가 없었다. 아니, 거꾸론가. 지금은 70년대가, 없었던가? 그렇다. 그건, 사내는, 바로 나라는 뜻이다. 그밖에 또 누가, 난가? 그러나, 영화의 시작도, 시작과 끝이 없다. 다시, 두껍고 허름한 아리랑 성냥갑과 성냥 한 개비. 그런데, 누가, 그를 깨우지? 통금해제 싸이렌? 아니다. 그건 사내의 사랑에 묻어나는데... 죽은 그 사람에게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후에 견실한 영세업체 사장이 되었다. 또 한 명은 계속 노동운동을 했다. 나머지 한 명은?

16밀리 필름이다. 화면이 가로로 치칙거리고 간혹 번개치듯 갈라진다. 화면에 `나머지 한명`이 나타난다. 그를 친구1이라고 하자. 늙수구레한 것을 보면 최근 촬영한 필름이다. 그는 수배중은 아니었나보다.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지는 않았지만, 간혹 제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는 인터뷰 중이다. 누구와, 어떤 시간과? 그래. 그는 몇 달 전이 아니고 바로 현재다.

--나는 태일이에 대해서 정말이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때 왜 태일이가 내게 성냥불을 붙이라고 했는지... 죽더라도 꼭 그에게 물어볼 거다.

그래. 전태일. 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등이다. 그 사람의, 그 청년의 굽은 등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서울대 음대 교정으로 들어가는 평화시장 입구. 우리가 남자를 처음 만났던 곳. 그때보다 약 4년 전이지만 군데군데 거리 풍경이 6. 25 전쟁 쪽으로 비참하게 기울어질 듯 말 듯, 하다. 그리고 다시 등. 연기가 솟고 등이 비틀거린다. 디룩디룩한 아낙네 하나 눈이 멀뚱하다가, 으아악! 비명을 지르고, 등이 무너진다. 그래. 비명이 등을 무너뜨렸다. 순식간에 바바리 옷깃에 검은 불길이 치솟고, 한 청년이 화염에 휩싸이고 비명이 비명을 부르고 사람들을 찢어 발기며 삽시간에 모으고 다시 찢어발기고 마침내 찢어발김이 찢어발김을 규합했다. 그 속에 당황하는 얼굴 하나. 친구다. 그 사람의 친구1. 그가 어버버대다가, 황급히 몸을 돌려 친구들을 부르러 뛰어갔다. 둘러싼 행인들도, 그렇다. 그냥 바라볼 뿐이다. 비정한 게 아니라, 망연자실이다. 그는 얼마나 뜨거울까, 아니 외로울까. 그가 고통을 참으려 입술을 한 일 자로 긋고 불길이 그를 쓰러트리고 그가 다시 불타는 몸을 일으킨다. 그렇다. 불길이 그를 일으키지 않지만, 그러나 그 뒤로, 벌써 거대하게 일어서는, 뭐지? 그게 또 불길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행인 중 몇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불붙은 청년의 몸에 잠바를 덮어 씌웠다. 그가, 불길이, 길길이 뛰었다. 맨 정신에 데인 것처럼. 잠시 불길이 잡히다가 잠바를 떼자 불이 복수하듯 더욱 거세게 치솟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불길과 함께 일어선다. 사람들이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아, 제발. 시대가 그를 괴물로 재탄생시키지 않기를. 그가 갑자기 벌떡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서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 달겨들어 코트를 벗기고 옷을 찢지만 그 속에 더 깊고 격렬한, 음모의 숨을 몰아쉬는 불길. 그는 속에 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가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의 친구들이 도착한다. 행인들이 구원을 받은 표정으로 물러서고 그의 친구들, 허겁지겁 달겨들어 잠바를 벗기고 소화기를 뿜어댄다. 청년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러나, 누구지? 이미 알아볼 수가 없다. 타서 엉겨 붙은 머리칼 그을린 눈썹. 빛을 쏘는 듯한 눈동자를 빼놓고는 이목구비 모든 것이 수천년 비참하게 죽고 문드러졌는데 그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 제발. 일어서지 말기를. 그런 바램을 꾸짖듯이 그가 일어서 짐승 울부짖듯이 뭐라 두번 세 번 외쳤다. 근로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아, 저리 끔찍한 근로자가, 인간이 있을까?... 사태를 이해한 행인들이 머뭇대다가, 너무 끔찍하므로 구경꾼으로 돌아서고, 그가 쓰러졌다. 누가 그를, 깨우지? 쓰러진 그가 자는 그를 깨우나?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때 왜 내게 성냥불을 붙이라고 했는지...

누구? 나, 그, 친구? 우리 모두?... 빛바랜 군중 상이다. 시청 앞 퇴근길 쯤 된다. 모두 무표정하고 무료하고 무의미하다. 자동차 빵빵 소리 전혀 없고 점차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인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 14번 1악장이, 흘렀다. 비극적인 사고처럼. 마치 눈에 보일 듯이. 흑백과 가난의 의미,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상징하는 그 음악이 군중의 무의미성을 의미심장한 그 무엇으로 채우고, 그렇게 음악이 양으로, 음(音)으로는 잦아들면서 질로, 의미로는 더 진해지고 사진은 빛바랜 천연색이 비 내리듯 흐려져 흑백으로 된 후 흑백마저 빛바래고, 그렇게 시간이 과거로 흐르고 정지. 그리고 성냥개비 하나. 그것에 불이 확 붙고 그 불이 번진다. 불은 시야에 눈물처럼 번져, 빛바랜 군중들에게 색깔을 주고 군중들이 살아, 걷기 시작한다. 처음엔 느리게. 점차 정상 속도로. 그들이 노동자의 명랑한 출근으로 또 더 밝은 복장의 청춘 남녀들로 변하고, 시커먼 화통기차가 미끈한 전철로 바뀌며 오버랩된다. 속도. 경쾌한 무게의 속도가 정지하고, 타자 글씨로 박히는, 자막.

그는 노동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평화시장으로 갔다. 그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 그가 죽은 것이 아니다. 사회, 그리고 우리 안의 죽음을 그가 태워버린 것이다. 피비린 눈물과 찬란한 전망의 비극적인 관계는 결코 우리를 절망시키지 않고 희망의 규모를 더 크게 한다. 그의 자리, 아니 그의 빈 자리는 여전히, 검게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희망이다...

아니,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희망은 너무 절망적이다. 그래. 물을 생각하자. 불로 빚은 물, 물로 빚은 불. 아, 그것도 죽음이다. 누가, 물 속에 숨 막혀 하고 있다. 구정물 속이다. 한 거지 소년이 물에 빠져 있다. 물 속에 그의 사지가 슬로우 모션으로 발버둥친다. 입에서 꼬르륵 물방울을 뿜어낸다. 그는 한 손에 주먹보다 약간 큰 배추 꼬갱이를 필사적으로 쥐고 있다. 사면을 베어버린, 나무속처럼 허연 꼬갱이다.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사내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배추 꼬갱이를 잡으려 바다 속에 뛰어들었던 그 소년은 왜 그때 죽지 않고 나를 이렇게 답답하게 하는가. 물 속 죽음의 고통을 이리도 길게 늘어트리는가... 어부여. 사람을 낚는 어부. 너는 왜 그때 그를 구했는가... 아, 숨막혀. 하지만, 이대로, 이 숨막힘을 넘어, 꿈속으로 죽을 수만 있다면... 암흑이 고통을 대신해 준다면... 그러나 바닷가. 8월의 태양이 이글이글 타는 바닷가 백사장이다. 검정색 동복 윗도리에 무릎 없는 바지 차림의 소년이 누워 숨을 몰아쉬고 그를 구해낸 어부는 40대 나이에 밀짚모자를 높이 썼고 콧수염이 까맣다. 저 멀리 희미하게 영도다리가 보였다. 의식이 들며 손에 쥔 꼬갱이를 확인하고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살이 온다. 환장할 삶이. 소년이 사지를 뒤튼다. 팔다리에 온통 피부병 자욱. 그가 후다닥 일어나 다시 물 속에 뛰어들려 하자, 어부가 그를 재빨리 붙잡고 만류한다. 발을 동동 구르며 쩔쩔매는 소년.

--아저씨, 제발, 아구 따거. 아저씨, 아구 따가버. 아, 아저씨, 옷 좀, 옷 좀 벗겨주...두,두드러기, 따가바.

그제서야 어부가 소년의 옷을 벗겼다. 온몸이 시뻘겋게 독이 오른 두드러기가 군데군데 진물까지 흘렀다. 어부는, 그때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했던 것일까?

--허, 이런 꼴이 있나. 가만 있거라. 아주 시원하게 소독이 잘 될끼다. 피부병엔 바닷물하고 뜨거운 햇볕이면 거저 그마이다.

그래. 그, 아이는 애당초 살려고 뛰어 들었다. 그런데 왜 그게 그리 압도적으로 죽음의 유혹처럼 보이지? 뜨거운 바위 위에 펼쳐진 동복과 무릎 없는 바지. 어부가 놓고 간 헌 지전 몇 장. 몇 개의 조개껍질, 그리고 배추 꼬갱이 하나. 소년의 눈에서 눈물 주룩 흐르고. 아 가난은 그때부터 죽음과 그리 따스한 체온을 나누었던 것일까?

--우는 거예요,
당신? 그렇게 말미를 맺어도 좋을 그런 어투로 여자가 사내를 휘감았다. 그렇다. 여자는 벌써 사내와 오래전부터 살을 섞어왔다는 투였다. 사내는 아직 그 소년이다. 소년이 되고 싶은 어른의 눈물은 어설프지만, 물 속인 죽음에서 깨어나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이 여자를 안았던가, 어쩌자고... 그러나 어쩌자고 눈물이 다시 그녀를 포옹했다. 그렇게 사랑은 모든 것이 범벅되고, 눈물은 그 뒤덤벅을 가장 순정한 사랑으로 빛나게 하고, 여자는 더 이상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좀 잤어?
잠의 끔찍함을 망각한 듯 그가 물었다.
--...
--이제 좀 자요.

그가 이불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품에 깃들었다. 이 순간이나마 둘 다 꿈이 평화롭기를. 특히 여자의 꿈이. 왜냐면 그 사람도 이루어지지 못해 괴로운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 사람도, 그녀가 곁에 있었다면 죽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래. 죽음이라...

--이 친구 정말 삼각산에서 노동운동 연구했나봐?
누구지? 친구다. 그 사람의 친구. 앞의 친구는 아니다. 친구2. 라고 하자. 어쨌든 친구2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1970년 4월 엠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공사장이다. 비 오듯 땀을 쏟는 런닝 차림의 인부들 사이 장발의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지워 버리려는 듯 고되게 삽으로 땅을 파내고 있다. 점점 더 커지는 삽질 실루엣, 그 속에 여전한, 작은 그 사람의 삽질. 거대한 삽질을 파는 작은 삽질, 마치 죽음을 삽질하는 듯한. 검은 산, 자연의 침묵. 그것을 파는 끝없는 삽질. 벌겋게 피로 물든 손 장갑. 그는, 삼각산에서 도대체 어떤 죽음을 결심했던 것일까? 사랑인 죽음? 노동운동인 죽음? 소외인 죽음? 저항인 죽음?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향한 죽음? 다시 앞의 베토벤 음악이, 그의 죽음대신 부활한다. 밤12시 남대문 시장이다...그가 통금을 넘으며 목재 실은 구루마를 끌고 있다. 길이다. 안타까운, 눈물이 타는 듯한, 세상으로의 유일한 통로 같은. 촉촉히 비 내린, 불빛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로 구루마 바퀴 자욱이 길게 이어진다. 카메라. 그래 아무도 없고 카메라 혼자 그 길을 따라가고, 길옆으로 가난하고 이슬 젖은 남대문 시장 새벽 풍경 솟아나고 그 바퀴 자욱을 계속 따라가면 길은 오름새를 타고 산 속으로 이어진다. 그 위로 겹쳐지는 삽질, 사라지고 그 위로 겹쳐지는, 벌겋게 피로 물든 면장갑. 면장갑 지워지고, 검은 산. 그것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더 이상 시간이... 없어. 하지만, 자살은 성경에 위배되는 짓일세, 목사가 그의 마음에 윽박지르고 그가 마음으로 아주 괴롭게 반문한다, 그럼 예수님은 자살이 아니었던 가요?.... 왜 죽음을 `결심'한 자에게는 말없음표가 붙고, 그렇지 않은 자는 이리 쓸데없이 단호한가. 그건, 죄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죽인 것이다, 네가 죽으면 빨갱이들이 좋아라 춤을 출게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리지만 그가, 귀를 막고 안간힘을 쓰며, 가장 주저하며 말한다. 죽음의 길을 스스로 찾아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그 죄 많은 사람들까지 그 분은 사랑... 너희 는 이 포도주를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니라... 너희는 이 빵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나의 살이니... 죽음은 빛. 배가 고프다...

--머리가 귀신형용이로구나.
이건, 누구지? 음성뿐이지만 분명, 어머니다. 아, 그녀는 구원이었지만, 구원은 또한 죽음이었을까?

--태삼이 신발 다 헤졌던데 그 돈으로 신발이나 사 주세요. 걱정마세요 어머니. 이제 곧 아주 내려갈께요.

--이 친구 정말 삼각산에서 노동운동 연구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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