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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 <2場> 旅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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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 <2場> 旅館의 사랑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확실해?
--모르겠어. 하지만, 감이 아무래도...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지? 그렇게 혼란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가 군중 속에 도피로를 그린다.
--아무래도?
--아는 것 같았어. 우리 관계를...

여자가 낭패한 표정이다. 그렇다. 남자가 뭔가 꼬리를 잡혔고, 여자가 더 큰 무엇을 들켰다.

--그럼 어떻게 해.
--나가지 마, 내일부터.
--...
--내가 일자리를 알아볼 테니까.

여자는 더욱 낭패한 표정이다. 자기 밥벌이도 못해서 여직 그녀가 차비라도 보태준 형편인데, 그가 어떻게? 여자는 묻지 않고 남자는 대답이 없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침묵의 성격은 더욱 긴박했다. 둘은, 둘 다, 침묵으로 도피로를 파고 있었다. 참호를 파듯이. 그 아가리 속으로 난 골목길. 파리똥 묻은 형광등으로 밝힌 술집 간판. 그것이 그리 다정한 품 같다. 죽고 싶어... 어차피 어둠에, 과거에, 죽음에 길들여지는 순간이건만 도주는 왜 그리 필사적이었을까,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내 안의 어떤 두려움을 피해 우리는 그토록 절박하게 발을 내딛었던 것일까. 골목 속에 또 골목, 골목의 겹침 속에 또 겹침. 헉헉 호흡이 다한 끝에 막다른 골목에 어김없이 여관이 있었다. 벽지가 검게 그을린, 이불이 벌써 코앞에 퀴퀴한 여관. 아, 우린 처음부터 그곳을 찾아 나섰던 게 아니었을까, 사랑이 아니라, 비리고 후미진 자궁 속을 우린 파고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늘 당신의 사랑이 되고 싶어요... 언제부터 그녀는 그렇게 결심하게 되었을까, 그런 음습한 사랑, 그 후로 내내 음습할 사랑을? 남자는 대답이 없다. 뒤따르는 자세로 앞장을 섰을 뿐. 입구에서 시멘트 세면대가 있는 작은 마당을 거쳐 복도를 지나 그 먼 거리를 이제와는 전혀 다른 아스라함으로 통과하여 둘이, 남자와 여자가 여관에, 여관방에 있다. 사내가 이부자리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얹고 앉았다. 여자는 맨바닥에 암팡 지게 웅크리고, 둘 다 호흡이 아직 거칠고 불안이 채 가시지 않았다.

--됐어. 이젠 괜찮아.
남자가 안심시킨다. 그러나 여자는, 아니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남녀 문제가 아니다. 벽이 생기고 불안이 더 두꺼워 졌다. 누구라도 들이닥치면 오갈 데가 없다. 여자가 내뱉듯이 말한다.

--차라리, 우리 결혼해요.
--...?
--괜히 검문 때마다 그런 척할 필요없고, 이런 데 들어와서도. . .

그래. 차라리. `차라리'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상황에, 통금에, 호기심에, 젊음의 감정에 쫓기다가 어영부영 살을 섞고 그것이 사랑이겠거니 체념하는 것보다는. 그러나 남자가 머뭇댄다. 1974년 가을. 그는 도피 중이었다. 판사가 될 길이 영영 끊겼다. 아니, 그건 아직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낙엽 사이로 보이는 길이, 아니 길이란 길 모두, 막다른 골목처럼 보일 때다. 그러나 다시 여자가 그를 부둥켜 쓰다듬듯, 제 몸을 스스로 열듯 말했다.

--난, 무엇보다 당신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서 그래요.
--쓸데없는 소리.
--날 사랑하기는 하는거죠?

사랑이라. 물론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니. 사내는 알듯 모를 듯 한 말을 제 혼자 버무리고, 여자도 온통 눈물, 아니 의문투성이로 사내를 포옹하고 사내는 그녀의 몸이 아니라 눈물에 제 몸을 적셨다. 사랑이라. 사랑이라니... 여관 밖은 밤풍경이 한풀 꺾인 채로 으슬으슬했다. 아직 남아있는 네온사인 몇 개가 해부학 실험실의 뼈처럼 인광(燐光)을 발하고, 그 외에 반짝이는 것은 군홧발에 칠한 구두약 뿐이다. 그것이 밤을 먹으며 검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하겠지만, 검문검색이 아직 귀가하지 않고 살기등등했다. 대학 정문을 막고 선 옆에 총 군인들 복장이 얼룩 두꺼비 숨을 쉬며 독기를 뿜어냈다. 그들은 분명 통금을 어길 것이다. 아니 그들이 문제가 아니다. 우린 역시 바퀴벌레야. 기를 쓰고 달아난 곳이 십중팔구 호구(虎口)였으니까. 계엄령이었다. 그 속에서 둘이 살을 섞는다. 아프게. 아픈 것이 사랑인 줄을 생생하게 깨달으면서. 그들의 사랑에 여관방 벽지의 얼룩도 계엄령의 어둠도, 묻어났다. 아, 그걸 그들은 몰랐으리라. 둘 다 아프고 남루한 첫 행위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 남새스런 속옷과 브래지어.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랑의 첫 행위가 그런 줄만 알았을까? 하긴 행위 자체는 그렇다. 모든 첫 행위는 누추하고 춥다. 다만 그것이 처음부터 당연하지는 않다. 모든 것, 모든 사랑을 남루하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그게 그들의 문제였다. 사소해서 오히려 치명적인. 모든 것이 끝나고 여자 눈에 사내를 적셨던 눈물의 추억처럼 물기가 고였다. 그렇게 사내는 안타까운 한숨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물론이다. 평소에 그는 그런 식으로 그녀와 살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나, 더 난감하게, 눈물을 그녀에게 되돌린 그가 이젠 그녀 품속으로 아예 어린애처럼 기어들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태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그녀 몸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사랑은 계엄령? 그렇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람. 그가 원망한다. 동갑나기면서도 항상 끔찍한 어린애 모습으로 출몰하는 그를. 그는 아직, 대답을 할 뿐 제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형아, 안 춥다. 그제?
--그래. 안 춥다. 착하제.
사과궤짝을 포게 놓고 그 사람이, 끔찍하고 어린, 아니 어려서 더욱 끔찍한 그 사람이 더 어린 동생과 그렇게 웅크린 잠을, 자고 있다. 낯선 상경길 거지행각이 끝나고 그렇게 죽음의 , 안온함이, 시작되고 있다. 누구에게? 사내에게, 아니면 그에게? 둘 다에게. 그러나 그는 죽었고, 사내는 살아있다. 그리고 자유의 몸도 혼잣몸도 아니었다.

--차라리,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가 중얼거린다. 여자는 아직 자초지종을 묻지 못하고, 그냥가슴이 철렁하는 표정이다. 사내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 아, 차라리. . .
--후회하는 거예요?
여자가 이를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마치,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듯이.
--응? 무슨 후회?

남자가 난데없는 표정이고 여자의 얼굴이 의문부호로 굳어진다. 그녀는 오해했던가? 크게 보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자가 먼저 후회하게 되리라. 물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발랄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았다. 아니 그 발랄함도, 도피중인 그를 위해 일부러 애쓴 시늉이 더 많았다. 다만 그녀는 오티스 레딩을 좋아 했다. 그가 모르는, 흑인가수. 가장 위대한 소울 가수. 그는 1967년에 죽었다. 스물 여섯. 젊음이 아까운 나이에. 하지만 물론 그 얘기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한테 당하거나, 그 거꾸로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미안해요.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매몰차게 눈물을 터친다.
--미안하긴, 내가 오히려... 조금만 더 참아.
--사랑해요.

다시 포옹이 시작된다. 여자는 좀더 흐느끼듯이, 더 자연스럽게, 남자는 착잡하고 또 어색하면서도 완전히 주도하는 자세로. 이번에는 안타까움이 없었다. 아니 둘은 모두 무언가를 간절하게 누릴 태세 까지도 있었다. 아주 자그맣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한 그 무엇을. 그러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보다도 그가, 그 사람의 기억이 뚜렷하게, 검은 색으로 그녀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는 두 사람 사이 차디찬 통나무처럼 누워있다. 남자가 안는 것은 통나무고, 여자가 안는 것은 통나무를 안은 사내다. 두 사람 다에게 총천연색은, 없었다. 우린 그 시절을 단지 빛바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내에게 그 사람은 완전 흑백이었다. 그것을 지우려고 그가 애써 잠을 청한다, 헐벗고 참담하게. 기억 위에 잠의 페인트를 덧칠하려고.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짓뭉게진 것들이 그의 몽환의 육체를 뒤흔들었다. 괴물이 덥치는 것처럼. 급기야, 그가 괴물이 되어 요동치는 것처럼. 라면박스 만도 못한 판잣집이다, 매캐한, 죽음의 연탄가스 내음. 그것에 취한 채 한 소년이 마라톤을 뛰고 있다. 헉헉, 그 소리에 겹치는 칙칙폭폭, 기차 화통소리. 달리는 소년. 사내도 그 소년 곁에, 그 소년 위에, 아니 소년과 겹쳐, 얼마나 오랫동안 도피의 질주를 벌일 것인가. 소년이 개구멍으로 빠지고, 기차를 타고, 검표원을 피해 의자 밑으로 기어든다. 사내의 잠도, 잠 바깥의 몸도 한껏 기어든다.

--그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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