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쓰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안양에서 만난 고교생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청소년에게 소비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이 아니다. 10대들은 소비를 통해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다.
안양고 1년 김양은 “이성친구나 친한 친구끼리 평균 5만원 정도의 선물을 주고받고 있다”며 “선물을 교환하면 당연히 더 친해지지만, 없으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느낄 정도로 서운하다”고 말한다. 김양은 또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은 친구들끼리는 동질감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낀다”며 10대들이 같은 유행에 민감한 이유를 설명한다. 선물을 주고받고,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사 입어야 서로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0대의 소비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10대에게 소비는 생활의 한 영역**
이제 청소년에게 소비는 생활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절약과 저축보다 소비가 장려되는 사회, 그 속에서 요즘 청소년 또한 아끼기보다는 쓰는 데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한국청소년개발원 청소년문화담당 최현기 박사는 “돈이 없으면 놀 수 없는 환경에서 10대의 놀이문화는 소비문화로 나타난다”며 “10대는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숙명여고 은지용 교사는 “10대는 소비행위를 통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10대 청소년의 막강한 구매력은 시장에서 나타난다. 이미 10대는 음반, 게임, 영화 등 주요 대중문화 상품의 중요한 고객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음반시장의 47%, 게임시장의 39%를 10대가 차지하고 있다. 패션, 음식, 이동통신 산업 종사자들은 10대를 큰 전략목표로 삼고 이들의 기호와 생활습관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지금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10대를 지칭하는 ‘n세대’도 마케팅전략이 만들어낸 단어다.
부모들은 청소년들이 돈을 써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10대들은 “부모님은 용돈 5만원도 많다고 여긴다”, “우리가 쓸데없이 돈만 많이 쓴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기성세대의 눈에 이들의 소비는 무절제한 과소비로 비치는 것이다.
부모들의 걱정과는 달리 요즘 10대 청소년은 꼼꼼한 면도 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도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안양고 1년 안양은 “정보가 부족하면 매장마다 돌아다니며 가격과 디자인을 자세하게 비교한다”고 말한다. 명성여중 3년 고양도 “인터넷위에 커뮤니티를 만들고 메신저를 이용해 친구들과 대화하며 정보를 교환한다”고 전한다. TV 등 각종 매체와 인터넷사이트도 이들에게 다양한 상품정보를 제공한다.
세계화 시대에 사는 10대에게 국산과 외제의 구별은 편견일 뿐이다. “국산이든 외제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물건 살 때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구호 아래 살았던 학부모 세대는 이들의 이런 생각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반면 10대들은 쏟아지는 정보를 알맞게 판단해 합리적인 소비에 연결시키지는 못하는 경우도 잦다. “물건을 살 때는 항상 돈이 부족한 것 같고 이것저것 사고 나면 많이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고 후회하는 청소년도 적지 않았다. 감각적인 영상문화에 길들여진 탓에 세련되게 포장돼 다가오는 광고와 마케팅에도 취약하다. 이들은 “스타가 나오거나 이미지가 멋있는 광고를 보면 그 제품을 자꾸 사게 된다”며 그 영향력을 인정한다.
일선 교사들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소비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절약을 미덕으로 알았던 부모 세대와 소비가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10대 사이의 간극은 아직도 이만큼 많이 벌어져 있다.
***10대의 소비문화 이해해야**
소비자보호원 정책개발실 송순영 박사는 “우선 부모들이 10대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송 박사는 “글로벌화되고 소비가 생활의 중심에 들어온 지금 ‘무조건 아껴 써라’나 ‘국산품만 써라’는 말이 10대들에게 먹혀들어갈 수 없다”며 “10대들의 소비 성향을 파악하고 광고와 같은 온갖 상품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들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대화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 박사는 부모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무분별한 소비는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전업 주부들이 아이들 간식까지 무조건 사다 먹이려고만 하는데 이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소비 행태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것.
숙명여고 은 교사는 “10대의 소비행위를 그들의 문화로 파악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정체성 교육을 통해 소비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른 곳에서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학부모, 학교, 지역사회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10대의 아르바이트도 적극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교사들은 말한다. 교사들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돈을 무조건 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건전한 아르바이트를 통해 스스로 돈을 벌어 소득에 맞게 합리적으로 쓰는 경험을 쌓게 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성세대가 10대들의 소비문화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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