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과연 새 증거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과연 새 증거인가"

당시 경찰조사 뒤집기에는 미흡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10일 지난 89년 8월15일 오후 7시 반경 전남 여수시 거문도 서도 유림해수욕장 부근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된 중앙대생 이내창(당시 27세) 변사사건에 대한 규명조사 중간발표를 했다.

진상규명위가 이날 제시한 사건 파악의 단서 중 하나는 당시 거문도 고도 거문리의 다방 종업원이 이내창과 남녀의 동행을 목격했다는 진술이다.

또 하나는 안기부 여직원 도씨와 그 일행의 알리바이이다. 진상규명위는 도씨와 친구인 백씨가 고도 거문리에서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 만났다는 경찰 조사와는 달리 친구들은 동도에서 도씨 등을 기다렸다고 새롭게 진술한 점이다. 도씨가 이내창과 동행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목이다.

이 사건의 의혹은 이내창의 사망에 공권력이 관련됐는지 여부이다. 사건 직후 한겨레신문은 다방 여종업원의 진술을 토대로 이내창의 거문도행에 안기부 직원이 동행했다고 보도했었다. 이 보도로 한겨레신문 기자는 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으나 보도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진상규명위의 조사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이 배척한 다방 여종업원의 최초 진술을 신빙성 있는 증거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도씨 친구들의 진술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안기부 여직원 도씨가 이내창씨의 사망에 관련됐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상규명위가 1년간 광범위한 조사를 한 끝에 얻은 내용이지만 당시 경찰 수사 결과를 뒤집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전대협 소속인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총학생회장인 이내창은 89년 8월 14일 오후 주위에 아무런 연락도 남기지 않고 안성 자취집을 나와 다음날 연고도 없는 거문도 서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89년에는 임수경씨가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돌아온 것을 계기로 전대협 간부들에 대한 안기부의 전면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 내려가 탐문하고 부검에도 참여한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장임원 교수는 ‘사체에 커다란 두피하 출혈과 두피박탈, 안면부 피하출혈, 우측경부 흉부 복부 배부 및 둔부에 표피박탈, 상하지 곳곳에 표피박탈 또는 피하출혈 등이 있는 점을 들어 타살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내창의 사인을 실족에 이은 익사로 결론지었다.


프레시안은 13년전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발표 내용과 당시 이 사건 보도를 둘러싸고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한겨레신문 기자에 대한 판결 중 법원이 확정한 사실관계 내용을 소개한다.
피고인 변호사는 조용환, 이석태, 김형태이며 판사는 김희태이다. 사건은 노태우 정권 때 발생했고 법원 판결은 김영삼 정권 때 나왔다.

당시 법원은 다방 여종업원이 최초에는 이내창과 남녀가 함께 다방에 왔었다고 했다가 두 번째는 이내창이 아닌 다른 사람과 남녀가 동행했었다, 세 번째는 그들이 다방에 오지 않았다고 번복한 점을 들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핀결문에 따르면 이내창은 8월 15일 오후 1시 거문도 고도에 도착했으며 오후 3시반경 서도로 간 뒤 오후 7시 반경 서도 유림해수욕장 부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됐고 안기부 여직원 도씨와 친구인 백씨는 이날 오후 1시에 거문도 고도에 도착한 후 먼저 도착한 친구 2명과 만나 4명 모두 영국군 묘지 등에서 놀다가 오후 5시경 동도로 출발했다.


거문도는 거문항이 있는 고도와 이내창이 사망한 서도, 도씨 일행이 놀러간 동도로 이루어져있고 섬들 간에 배로는 10-20분 가량 걸린다.(현재는 고도와 서도 사이에는 다리가 있다)


<진상규명위의 발표 내용>

△(안기부 직원의) 이내창과 동행 사실 여부
89년에 안기부 직원의 동행 여부의 핵심이었던 안기부 여직원과 이내창이 삼호다방(거문도 고도 거문리 소재)에서 차를 마셨느냐의 여부는 다방 종업원의 진술 번복으로 종결지었다.

다방 여종업원은 현재 과거의 진술 번복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해와 피하고 싶어서였다는 것이고, 자신의 첫 번째 진술이 사실과 같다라고 하며, 이내창과 안기부 여직원 도씨의 사진을 제시하자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였다.
“주로 여자가 얘기를 하였는데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듣기만 한 것 같은데... 여자가 서울 말씨를 써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한편 죽은 학생과 여자가 얘기를 할 때 안을 쳐다보면서 기웃거리는 남자 한 분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자가 돈을 주고 나간 후 이내창과 여종업원이 차를 마셨는데 요구르트를 마셨다고 한다.
“저와 죽은 학생이 차를 마실 때 먼저 나간 여자와 남자 1명이 다방 밖에서 죽은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차를 마시는 중에도 죽은 학생은 출입문 밖에서 기다리는 남녀를 의식한 듯 가끔씩 뒤돌아보고는 하였습니다.”

이후 이내창은 기다리던 남녀 2명과 여객선 터미널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안기부 여직원과 대질신문 때 왜 아니라고 했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시달려왔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람이라고 하면 저도 어떤 피해를 입을지 또 모르고, 그 여자 분도 어떠한 피해를 입을지 몰라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라면서 자신의 이 진술이 진실이라고 하였다.

△안기부 직원의 알리바이에 관하여(사진 참조)
여수경찰서 수사기록에 의하면 먼저 놀러와 동도에 있던 친구들이 2시에 (고도의) 거문리 선착장으로 마중나와 매점에서 컵라면과 맥주를 하고 거문초등학교로 올라가 잠시 놀다가 영국군 묘지로 갔고 이후 해안가로 가서 각자 사진을 찍고는 거문도 선착장으로 왔다라고 되어 있다.

먼저 놀러왔던 친구들은 동도에서 기다린 것이지 마중나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한 친구는 “도씨, 백씨가 거문도에 들어오던 날 동도에서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다른 친구는 “동도 죽촌리 선착장에서 기다렸는데 (죽촌리) 친구가 기다리던 도중 다이빙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먼저 놀러온 친구들은 과거 수사결과와 다르게 영국군 묘지에 놀러 가기는 했는데 언제 누구와 갔는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 8월 15일 일행 4명이 영국군 묘지에서 내려와 해안가에서 각자 독사진을 찍었다는 사진을 보면 도씨, 백씨는 18시경, 친구들의 사진은 13시에서 14시 사이로 동일한 날짜라 하더라도 약 4시간의 차이가 있다.
과거 수사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3시 40분경에 해안가에 갔고 약 40분간 체류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사진의 그림자를 보면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각기 따로 간 것이거나 다른 날 다른 시간대에 간 것이다.

<사진 1,2> 친구들의 사진. 진상규명위는 촬영시간을 오후1시-2시 사이로 추정했다.
<사진 3,4> 도씨와 백씨의 사진. 진상규명위는 그림자의 방향으로 미루어 오후 6시경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유림해수욕장에 형사들이 야영했다.
△거문도로 가는 배편에서 이내창을 감시하는 듯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목격자 진술.
△거문리에서 이내창이 쫒기는 듯했다는 민박집 주인의 진술
△서도로 가는 배에서 이내창이 남녀와 동행했다는 선장의 진술
△실족 추정지점에서 익사가 어렵다는 현장 조사내용

<이내창 사건 관련 판결문 중 사실관계 내용-93년11월16일 서울형사지법>

이내창이 사체로 발견되기 4시간 쯤 전인 1989.8.15. 15:30 경에 이내창 및 그와 동행인 듯한 남녀를 자신의 배에 태워 거문리에서 (서도의) 유림해수욕장까지 건네주었다는 덕성호 선장 이현우는 그 다음날 경찰에서 그 동행한 남녀의 인상착의와 승선 전후의 행동에 대하여 자세히 진술한데 이어 도씨(안기부 인천분실 타자수)와 백씨(도씨의 남자 친구)가 그 동행한 남녀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에서 조사받고 난 다음날인 같은 달 19일에도 다시 위 처음 진술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보충하는 진술을 하였고, 나아가 현장에 내려온 중앙대학교 진상조사단에게는 그 동행한 남녀가 같은 달 17일 거문리 선착장에서 여수행 배를 타려한 사람들(즉 도씨와 백씨)이었다고 말하였는데, 한겨레신문에 이 사건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계기로 경찰에서 그 취재원인 이현우에게 진위를 확인하려 하자 같은 해 10.8. 그는 이내창과 남녀 각 1명이 동행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남녀가 도씨와 백씨라고 꼬집어 말한 사실이 전혀 없는데 한겨레신문에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꾸며 보도했다고 진술하고, 이어 같은 달 18일 도씨와 백씨를 대질시키자 그들이 이내창과 동행한 남녀가 아니라고 단언하였으며 그 후 도씨가 한겨레신문사측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이 사건에서도 검찰 및 당 법정에서의 진술을 통틀어 위와 같은 진술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목격자로서 이름을 최희라고 밝힌 거문리 삼호다방 종업원(위 최희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나 이하에서는 편의상 그냥 최희라고 호칭한다)은 같은 해 8.19. 경찰관이 이내창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와 그의 일행인 듯한 남녀를 같은 달 15일 15:00 경 위 다방에서 목격한 사실과 그들의 인상착의 및 행적에 관하여 진술하였으나, 같은 달 20일 경찰관이 다시 이내창의 사진과 함께 도씨가 그 일행인 백씨, 박씨, 서씨, 이씨, 또 다른 박씨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도씨는 그때 본 여자가 분명한데 함께 온 남자는 이내창이 아니라 서씨인 것 같고 사망한 이내창과 닮은 서씨를 이내창으로 착각한 것 같다고 진술하였고, 그 후는 계속 도씨 일행이 이내창과 함께 다방에 온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반면 도씨와 백씨는 1989.8.7. 백씨가 목포해양전문대학에 함께 재학 중인 친구 서씨로부터 같은 달 중순경에 역시 같은 반 친구인 박씨의 집이 있는 거문도로 놀러가기로 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여자친구인 도씨와 같이 그곳에 놀러가기로 약속한 뒤, 같은 달 11일경 역시 같은 학교 친구인 또다른 박씨의 부산 집에 전화를 하였더니 마침 위 서씨가 그곳에 와 있어 그들에게 같은 달 14일 거문도에 들어가겠다고 말하였고, 같은 달 14일 10:10경 도씨와 백씨가 함께 부천을 출발하여 같은 날 16:30경 여수에 도착한 뒤 박씨에게 전화 걸어 다음날 거문도에 들어가겠다고 알려주고는 여객선터미널 부근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고, 같은 달 15일 08:00경 박씨의 집에 가지고 갈 선물용으로 쌕쌕오렌지 한 상자를 사들고 신영 고속페리편으로 여수를 출발하여 같은 날 13:00경 거문항에 도착하였으나 마중나온 사람이 없어 13:10경 박씨에게 전화하여 마중나오도록 요청하고는 기다리는 동안 매점에서 컵라면으로 시장기를 때우고 있었는데 14:30경 박씨의 집에 머물고 있던 또다른 박씨와 서씨가 마중 나와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맥주 3병을 나누어 마신 뒤, 박씨가 사는 동도행 배편이 있는 17:00경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넷이서 근처에 있는 영국군묘소를 구경하고 부근의 산과 해변을 둘러보면서 사진도 찍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17:00경 박남석이 운행하는 거문호편으로 동도에 있는 죽촌이라는 마을의 박씨 집에 도착하여 이틀동안 또다른 박씨, 서씨 및 그들과 함께 온 이씨와 박씨 및 그의 동네 남녀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지내다가, 같은 달 17일 18:00경 신영 고속페리호편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거문리 선착장에 나와 매표를 하고 있던 중 경찰관으로부터 이내창과 동행하였다는 남녀로 지목되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영문도 모른 채 여수경찰서에까지 와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일 뿐 위 이내창과 동행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하고 있고, 위 박씨, 서씨, 이씨, 또다른 박씨 역시 위 도씨 및 백씨와 거문도에서 합류하게 된 경위 및 거문도 도착 이후의 행적에 관하여 도씨, 백씨의 위 진술과 일치되는 진술을 하고 있다.

이상의 점을 종합하면 비록 위 이현우와 최희가 처음에는 사망한 이내창과 동행한 남녀가 마치 도씨 및 백씨인 듯한 진술을 하였다가 나중에 이를 번복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진술을 번복하는 이유는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자신들의 진술이 가져온 의외의 파문에 놀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피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 이현우가 이내창과 동행했던 남녀가 백씨와 도씨라는 것을 경찰관 앞에서 꼬집어 말한 사실은 전혀 없고, 위 최희는 사진 상으로 본 서씨와 이내창을 같은 사람인 것으로 혼동하였으며, 위 두 사람이 말하는 남녀의 인상착의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을 뿐더러 도씨, 백씨의 실제 모습과도 차이가 많고, 위 두 사람 모두 실제의 도씨, 백씨와 대질한 자리에서는 그들이 그때의 남녀가 아니라고 하는 등으로 위 두 사람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없다.

더욱이 이내창이 변사체로 발견된 1989.8.15. 오후는 일기가 비록 쾌청하기는 하였으나 바람이 평상시보다 심하게 불고 파도가 높아 거문도 3개 섬을 운항하는 배들이 운항 횟수를 줄이거나 결항하였다는 것이어서 만약 도씨 등이 서도의 유림해수욕장까지 이내창과 동행하여 간 뒤 이내창의 죽음 직후에 곧바로 거문도로 돌아온 것이라면 그들이 이용했을 만한 배편은 한정되어 있어 그들을 태워준 배와 목격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목격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도씨와 백씨의 진술은 적어도 이내창이 변사체로 발견된 8.15. 오후부터 거문도 및 동도의 죽촌부락에서 그들과 어울린 것이 분명한 서씨, 박씨, 또다른 박씨, 이씨 등의 각 진술 및 영국군 묘소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찍었다는 도씨의 사진 사본(당원의 서증조사 결과로 변호인이 제출한 이내창 변사기록 제1466장, 피고인측의 증 제2호의 20)에 의하여 뒷받침되는데, 위 서씨, 박씨, 또다른 박씨, 이씨 등이 이내창의 변사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데다가 그들이 도씨와 백씨를 위하여 사전에 말을 맞추어 허위진술하는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아니하고, 위 도씨의 사진 역시 조작되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더욱이 도씨와 백씨는 같은 해 8.7.경부터 위 서씨 등과 거문도에서 미리 합류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고 거문도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몇차례에 걸쳐 들어가는 배편 및 시간 등에 관하여 박씨와 전화통화까지 하는 한편 신영 페리호 탑승 시에는 이내창에 뒤이어 기재된 자신들의 인적사항을 사실 그대로 기재하였음이 인정되는 바, 이는 이내창을 사망(그것도 타살)하게 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가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을뿐더러, 이내창의 사망 직후에 그 둘이 별반 이상한 점을 보이지 아니한 채 위 서씨의 일행과 함께 어울려 논 사정 역시 이내창의 사망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내창이 사망하기 직전의 알리바이에 관한 도씨와 백씨의 진술은 믿을 수 있다 하겠으므로 이내창이 사망하기 직전에 도씨, 백씨와 동행하였다는 한겨레신문의 기사내용은 결국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고, 더욱이 안기부 인천분실의 타자수에 불과한 도씨를 수사나 정보와 관련하여 고도로 훈련된 안기부 직원인 것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는 ‘안기부 요원’이라고 보도한 것은 안기부가 이내창의 사망에 직접, 간접으로 개입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으로서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