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가 정부 일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 계획을 없던 일로 하려 했을 때, 당시 박근혜 의원은 '증자살체(曾子殺彘)'의 고사까지 인용하면서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청와대를 압박했었다. 결국 그 강단으로 세종시 문제가 원안대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이 획득한 51.8%의 지지 가운데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북한의 낮은 소득수준과 만성적인 식량부족 때문에 유엔 등 국제사회는 미사일과 핵문제로 대북제재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대북제재와는 무관하게 대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대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식량부족 상황에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피해를 입는 취약계층이 다름 아닌 영유아와 임산부들이기 때문이다. 임신 전부터 시작해 2세가 될 때까지의 기간에 아이들에게 발육부진이 생기면 이후에도 회복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는 노력이 각별히 필요하다.
▲ 지난 2011년 머시코(Mercy Corps)를 비롯한 미국의 대북 지원 NGO 단체들이 공개한 굶주린 북한 아이들. ⓒAP=연합뉴스 |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대선 당시 대국민 공약 차원에서 언급한 북한 영유아에 대한 지원이나 인도적 지원이 지금 이행되고 있는가? 한미정상회담, 한중정상회담, 남북대화 관련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할 정도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지만 북한 영유아에 대한 지원과 인도적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보도는 아직 안 나오고 있다. 대신 북한 영유아들의 불쌍한 현실에 대한 소식은 계속 들어오고 있다.
북한 영유아들의 불쌍한 현실
북한 중앙통계국이 지난 3월,「2012 북한 영양실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북한 당국이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유엔아동기금(UNICEF), 세계보건기구(WHO) 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2012년 9월 17일부터 10월 17일까지 한 달 동안 북한 전역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다. 이번 북한 주민들의 영양실태 조사는 1998, 2000, 2002, 2004, 2009년에 이어 여섯 번째 이루어 진 것인데, 이번 조사 보고서에는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주목해야할 수치들이 담겨 있다.
2012년 북한 중앙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북한 총인구는 2449만 명이고 그중 5세 미만 어린이는 170만 5000명(6.96%)이다. 5세 미만 북한 어린이 170만 5000명의 15.2%인 26만 2160명의 북한 어린이가 저체중이다. 5세 미만 어린이 중 27.9%인 30만 5195명은 만성 영양장애이고, 그 가운데 7.2%는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2011년 5세 미만 어린이 사망률은 1,000명당 252명이었다. 2011년 대한민국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북한의 영아 사망률(2005∼2010년)은 27.4%이며 같은 기간 남한의 영아 사망률은 3.8%였다. 북한의 영아 사망률이 남한보다 7배 이상 높은 셈인데, 지난 수년간 이 수치에 그다지 변화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5세 미만의 어린이만 심각한 것은 아니다. 6세 이상 어린이들도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다. 전체 어린이의 29%가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 빈혈의 원인은 대개 영양결핍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양과 평양 외 지역 편차가 크다. 평양은 19.6%, 양강도는 39.6%, 자강도는 33.3%, 함경남도는 32.9% 어린이가 영양장애 상태에 있다. 2012년 8월 초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하면서, 양강도 도청 소재지인 혜산시 어린이들이 압록강 상류에서 물놀이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당시 어린이들은 1998년도에 봤던 어린이들에 비해서는 밝고 영양상태도 좋아 보였지만 남한 어린이들에 비하면 왜소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양강도 어린이 39.6%가 영양장애라니, 눈에 띄었던 대부분의 어린이들도 그다지 좋은 영양상태는 아니었던가 보다.
오늘날 북한의 '양'과 '음'
정권 수립 이래, 북한당국은 "어린이들은 나라의 미래이자 나라의 왕"이라고 선전해 왔다. 그 입장은 지금도 명목상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헌법, 교육법, 인민보건법, 어린이보육교양법, 사회안전법, 장애자보호법, 가족법 등에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리고 2010년 12월 제정된 「아동권리보장법」에 보다 구체적으로 아동의 권리를 명시해 놓았다.
아동권리보장법에 '아동은 16살까지'로 규정하고 있다(제2조). '아동을 중시하고 그들의 권리와 리익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북한의 일관된 정책이다(제4조). "국가는 '제일 좋은 것을 어린이들에게!'라는 원칙에 따라 아동의 건강과 교육 교양,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일 좋은 것으로, 우선적으로 보장하도록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은 1990년 9월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에도 가입했다.
북한은 이렇게 모든 아동들의 권리가 완벽하게 보장되고 있는 것처럼 번드르르하다. 북한 당국도 아동들의 권리 보호와 증진을 위해 법적 체계는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조문이나 발표되는 정책으로 보면 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12년 양호한 기상 여건으로 북한의 식량 생산은 2011년에 비해 조금 개선됐다. 식량농업기구(FAO) 발표에 따르면, 2012년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503만 톤으로 2011년도의 475만 톤보다 5.9% 증가했다. 한국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2012년 북·중 교역액은 59.3억 달러를 달성해 2011년도의 56.3억 달러에 비해 5.4% 증가했다. 남·북 교역액도 19.8억 달러로 2011년의 17.1억 달러에 비해 15.3% 증가했다. 한편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은 2004년 이후 가장 많은 1.2억 달러로, 2011년 8,923만 달러에 비해 32% 증가했다.
수치상으로는 북한의 먹는 사정, 경제 형편이 최근 몇 년 사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같이 경제사정이 호전되어 가고 있는 중에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영양실태조사에서 나타난 것은 많은 수의 북한 아동들이 만성 영양장애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식량농업기구(FAO)의 식량생산량은 현장조사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이다. 북한 현지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인공위성 사진 등을 활용해서 생산량을 추산하는 방식을 쓴다. 실제로 수확을 하고 보면 먹을 수 없는 불량품도 사진에는 멀쩡하게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량 추산 과정에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 북한과 같은 폐쇄국가에서 농업 생산량은 일종의 국가기밀이다. 경제력이 군사력과 연결된다고 볼 때 국가기밀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현대경제연구원의 북·중 교역액이나 남북 교역액은 비교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자료를 안 내놓지만, 중국이나 한국은 자료를 공개하기 때문에 절반의 숫자를 가지고 나머지를 사실에 가깝게 짜 맞출 수 있다.
인도적 대북지원 이전에 영유아지원 약속만이라도 이행해주기 바란다
북한의 영유아 영양 실태 조사도 유엔의 재정적·기술적 지원을 받아 북한 당국이 전국에 걸쳐 영유아들의 실태 조사를 해서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점에서 식량 생산량 추산 결과보다는 현실 반영도가 높을 것이다. 북한 영유아들의 열악한 환경이 객관적으로 확인된 이상,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 만성 영양장애에 노출된 북한 영유아들을 우리는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일찍이 북한 영유아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었다. 약속대로 북한주민, 특히 영유아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언제 시작하는가만 결정되면 된다. 인도적 지원이 시작되면 남북 당국회담도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요즘 댐 방류 계획을 미리 통보해주는 등 북한의 움직임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의 약속 이행 의지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주도하는 강력한 이미지와 더불어 부드러운 미소 속에 담긴 따뜻한 모성이 함께 느껴지는 박 대통령의 약속에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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