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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국가 대한민국? 정의를 먼저 세워야 가능!

[이렇게 읽었다] 헨리 조지의 <사회문제의 경제학>

19세기 미국의 토지개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1883년 명저 <사회문제의 경제학(Social Problems)>(전강수 옮김, 돌베개 펴냄)이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자인 전강수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는 20년 이상 꾸준히 헨리 조지 사상을 연구해 온 분이어서 번역이 정확하다. 전강수 교수는 번역 도중에 애매한 부분이 생기면 페이스북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구하기도 하였다. 매우 신선하고 솔직한 방법이라고 생각되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간다. 전강수 교수는 헨리 조지 사상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번역한 경험이 있어 번역 문장도 유려하다. 헨리 조지의 또 하나의 대표작인 1879년 작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김윤상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을 번역한 필자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다.

톨스토이, "헨리 조지 최고의 작품"

▲ <사회문제의 경제학>(헨리 조지 지음, 전강수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헨리 조지는 당시 칼 마르크스보다도 인지도가 높았던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헨리 조지 방식의 토지개혁을 실천에 옮기는 모습을 그렸다. 손문의 삼민주의 중 민생주의는 헨리 조지의 토지사상의 영향을 받아 정립한 것이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 운동도 헨리 조지의 개혁정신에서 커다란 동력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면서 경제학도 각각의 이론적 지주인 신고전파 경제학과 좌파경제학으로 양분되는 바람에, 헨리 조지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말았다. 시대착오적인 국정원과 이석기 의원의 적대적 공생관계 때문에 건전한 상식이 주목받지 못하는 요즘 우리의 모습과 같다고 할까?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그래도 특정인의 생산물은 그 생산자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헨리 조지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흙에 묻혔다고 해서 속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문제의 경제학>은 출간 당시 <진보와 빈곤>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저술한 <진보와 빈곤>은 그 지역에서 절실했던 토지문제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뉴욕으로 이주한 후 영국 여행의 경험도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기 때문에 산업화, 도시화, 독점, 정경유착 등 여러 문제를 두루 다루었다. 또 집필 당시는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을 때였고, 원래 대중 매체에 게재했던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까지 갖추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 책의 러시아어 번역판 서문에서 "헨리 조지가 쓴 책, 연설문, 기사 중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헨리 조지가 개탄했던 각종 사회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130년 전에 나온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늘 우리나라의 언론에 게재되는 글처럼 생생하다. 빈부격차가 어느 때보다 심하고 시장이 특권 보호 장치로 전락한 현실에서, 진정한 시장주의자 헨리 조지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빈부격차는 합법적 강탈행위 탓

우리의 눈길을 끄는 몇 문단을 같이 읽어 보기로 한다.

우선 빈부격차는 개인의 탓이라기보다 제도의 탓이며, 주요 원인은 독점, 특혜 등 합법의 탈을 쓴 강탈행위에 있다고 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가 최근에 낸 저서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

▲ <불평등의 대가>(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나는 지금 부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시기심이나 증오를 불러일으키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비참한 가난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허용하고 있는 독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치고 한 사람에게만 준 특혜, 그리고 법과 여론에 의해 인정받는 강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깨닫게 될 것이다. (84~85쪽)


이처럼 합법의 탈을 쓴 강탈행위가 버젓이 존재하는 것은 주로 정경유착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래 인용문에서 '철도'를 '재벌'로 바꾸어 읽으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현실을 아는 정치인들은 미국에서 철도권력과 싸워서는 이길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신중한 사람은 철도권력이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느낄 경우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지 않는다. 철도왕들은 예비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전당대회를 주무르고, 언론을 통제하고, 의회를 조종하고, 자기들이 키운 사람들로 의회 의석을 채우는 등의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뜻을 관철한다. (233쪽)

자비 이전에 먼저 정의를

빈부격차, 합법적 강탈행위, 정경유착은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생기는 병리현상이라고 진단하였다. 불의를 그대로 두면서 자선과 복지를 운위하는 것은 배에 뚫린 구멍을 막지 않고 배 안의 물을 퍼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정의 회복을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으로 꼽았다. 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증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정의가 도덕의 발달단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첫 번째 가치라는 사실이다. 정의보다 높은 가치는 정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의를 포함해야 하며, 정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 개인이 진정으로 관대해지려면 먼저 정의로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는 자비 이전에 먼저 정의에 기초해야만 한다. (121쪽)

그렇다면 사회개혁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헨리 조지는 증오와 폭력 대신 생각하는 국민이 되라고 하였다. 생각만 바로 하더라도 사회개혁의 빛이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는 명언을 연상시킨다.

사회개혁은 고함과 아우성으로, 불평과 비난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당을 결성하고 혁명을 도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각성과 사상의 진보를 통해 달성된다. 올바른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올바른 행동이 나온다. (…) 누구도 자신의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어떤 처지에 있든 [사회개혁의] 빛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303-304쪽)

물론 헨리 조지가, 생각만으로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아니다. 국민이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하는 운동,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치를 모두 중시하였다. 저술, 강연 외에 운동과 정치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그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부의 역할, 여성의 역할

▲ 19세기 미국의 토지개혁가 헨리 조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사회문제의 경제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만 그밖에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많다. 두 가지만 소개한다. 현재 우리 정부는 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해왔고 지금도 철도 민영화를 꾀하고 있다. 헨리 조지는 작은 정부를 추구한 시장주의자였지만 그래도 자연독점이 불가피한 업종은 정부가 담당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민영화의 명분으로 흔히 지적되는 정부의 비효율과 낭비는 정부가 운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업이 공공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정부의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다. 따라서 독점적 요소를 수반하는 사업은 모두 정부 규제의 대상이 되며, 성질상 완전한 독점사업은 당연히 국가의 고유 기능에 속한다. (228쪽)

헨리 조지는 여성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였다. 미국에서는 이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1920년에 이르러서야, 연방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선거권을 인정하였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만큼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주의와 지성과 헌신을 증가시키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고 확신한다. 사회가 미숙한 단계에 있을 때는 남성의 지성만으로도 공동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지만,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관리하려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지성도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의 지성을 활용하려면 그들을 공적인 일에 참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304쪽)

자기검열인가, 권력의 외압인가?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이 책은 원래 1883년 봄 뉴욕의 인기 주간지 <프랭크 레슬리의 삽화신문>(이하 '프랭크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프랭크신문>은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주간지에서 예일대 섬너(William G. Sumner) 교수의 글을 연재하여 관심을 모은 데서 자극 받아 헨리 조지에게 원고 청탁을 하게 되었다. 섬너 교수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자, 엘리트주의자로서 헨리 조지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의 글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헨리 조지는 보호무역에 반대하는 책을 집필 중이었으나 일정을 미루고 원고 청탁을 수락하였다. <프랭크신문>은 시리즈 제목을 '이 시대의 문제'(Problems of the Times)라고 붙이고 모두 13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연재가 끝난 후 헨리 조지는 9편을 추가하고 제목을 바꾸어 책으로 출판하였다.

▲ <진보와 빈곤>(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는 제5장 '집적·집중의 행진'에서, 농장의 규모가 줄어든다고 한 미국 인구조사국의 통계를 비판하였는데, 이를 둘러싸고 매사추세츠 공대(MIT) 총장이자 미국통계학회 회장이었던 워커(Francis A. Walker)와 논쟁이 벌어졌다. 워커 총장은 2년 후 창립된 미국 경제학회 초대회장을 지낼 만큼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헨리 조지는 독학으로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를 달성한 사람으로서,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에 눈을 감는 주류학계를 비판해 왔다. 반면 학계에서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헨리 조지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워커 총장도 한 수 아래인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6개월 후 발간된 새 통계집 서문은 농장 규모에 관한 통계는 연도별로 단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당국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것은 일면 정직해 보이기도 하지만 통계 분야의 대부인 워커 총장의 KO패를 막아주려는 궁여지책 같기도 하다.

또 특이한 사실은, 기사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면 반색을 해야 할 <프랭크신문> 측에서 연재를 거듭하면서 점차 헨리 조지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프랭크신문>은 편당 100달러라는 파격적인 원고료를 지급할 정도로 헨리 조지의 원고를 받으려고 공을 들였었다. 참고로, 섬너 교수의 원고료는 편당 50달러였다. 그런 <프랭크신문>이, 학계와 관계에 발이 넓었던 워커 총장과 헨리 조지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한 기득권자들의 공격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요즘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상영하던 극장에서 관객이 많아 상영 횟수를 늘리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상영 자체를 중단하는 모습과 닮은꼴이다. 자기검열을 한 것일까 아니면 권력의 외압이 있었을까? 정답은 우리가 마음으로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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