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김명호(가명·32) 씨는 이렇게 말하며 강당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노동조합 출범식이 열리고 있는 강당에는 김 씨와 똑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비로소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존재를 서로 확인하는 순간. 김 씨는 "이제 진짜 실감이 나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박재민(가명·36) 씨는 까치발을 하고 집게손가락으로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400명가량이 참석했단 사실을 전하자 "아 또 하나의 가족 진~짜 많네"라며 세던 것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다. 그는 "우리 마누라가 삼성에 노조 만든 대단한 신랑이라고, 오늘 아침부터 소고기를 구워줍디다"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소고기 묵어서 힘이 솟구치겠네"라며 문용훈(가명) 씨가 뒤를 돌아봤다. 문 씨는 "나는 어제 긴장해서 한숨도 못 잤더니 지금 힘들어"라며 일부러 어깨를 축 내리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더니 "그런데 우리 얼굴 기사에 안 나가지요?"라며 "아직은 안 돼요. 삼성이잖아 삼성"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14일 서울여성플라자(동작구 대방동)에서 열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출범식에 모여든 400여 명의 노동자들에게선 '흥분'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짜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흥분과 그러나 상대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긴장. 이 두 가지가 묘하게 뒤섞였던지 박 씨는 "형, 노조가 생기긴 생기는구나. 토할 것 같아"라며 문 씨의 등을 툭 쳤다.
▲ 14일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출범식을 올렸다. ⓒ연합뉴스 |
"우리는 더 이상 삼성전자의 앵벌이가 아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보였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기획하고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제작한 짧은 영상을 튼 후였다. 영상은 아내와 아이들의 응원 메시지,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된 1인 시위 모습 등을 전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라는 글귀가 화면에 떠오르자 작은 한숨 소리도 군데군데서 터져 나왔다.
위영일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장은 연단에 올라 "우리는 더 이상 삼성전자의 '앵벌이'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앵벌이'라는 단어는 슬프게도 이들의 현실에 제법 들어맞는 표현이다. 이들이 고객을 향해 '피에로' 웃음을 짓고, 수리를 마친 후엔 해피콜 10점 만점을 구걸한 결과, 삼성전자서비스는 '12년 연속 서비스 품질 지수 1위'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월급과 대우는 보잘것없었다. 출범식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장시간·저임금' 문제를 호소했다. 박재민 씨는 "사람들이 삼성 직원이면 돈 많이 벌 텐데 왜 노조 하느냐고 그러면 정말 답답하다"며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고, 어떤 달에는 간신히 100만 원 집에 들고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삼성 직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위영일 지회장은 "형식적인 노무 관리만 하는 협력업체가 아니라, 진짜 사용자인 '삼성'이 우리를 직접 고용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수다. 헌법과 노동법이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삼성에 요구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방해 공작, 산사태, 물난리 뚫고 달려온 '동지'들"
이날 출범식에 참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된 조합원은 386명이다. 여기에 출범식에 참석하지 못한 조합원까지 포함하면 이날까지 총 700명가량이 노조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7월 말쯤에는 1000명 돌파가 무난해 보인다"며 "삼성의 치졸한 방해 공작에도 빠른 속도로 가입 인원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삼성전자서비스는 노동조합 출범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 각 협력사에 주말 특근 및 근로자 특별 관리를 지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5만 원에서 많게는 20만 원까지 '고액'의 특근 수당을 내세워 노동자들을 매수하려 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다. (관련 기사 : "삼성, 노조 출범 막으려 고액 특근 이벤트 꼼수")
19년 차 수리기사 박형석(가명) 씨는 "어이가 없지요. 전에는 한 번도 준 적이 없는 수당을 갑자기 지금 왜 준다고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노조가 무섭긴 한가 봐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특근 꼼수'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출범식에는 예상보다 외려 많은 인원이 참석해 '선방'이라는 평이 주를 이뤘다. 특히 고속도로가 산사태로 막히자 차를 돌려 국도로 달려온 포항 지역 조합원들과, 물난리로 자동차가 오갈 수 없게 되자 도로에 차를 버리고 지하철로 이동한 춘천 지역 조합원들의 사례가 감동적으로 회자됐다.
박 씨는 "삼성이 하늘에도 돈을 먹였나 봐요. 삼성은 뭐든지 이걸로 해결하니까"라며 오른손으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그래도 장맛비와 방해 공작, 이 모든 걸 뚫고 온 '동지'들이 있으니, 삼성은 긴장 좀 해야 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하얀) |
"수많은 간접 고용 노동자들의 '희망' 될 것"
출범식을 강당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본 '선배'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햇수로 18년째 삼성과 싸우고 있는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출범식 장면을 휴대폰으로 동영상 촬영하며 연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정말 반갑다"며 "이들이 노동계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조장희 금속노조 경기지부 삼성지회 부지회장도 "정말 뭉클하다"며 "삼성의 무노조 신화는 이제 끝났다. 에버랜드 노동자들과 함께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방침을 깨는 튼튼한 노조를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대환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집행위원장은 "출범식 전날까지 이어진 방해 공작을 뚫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는 건 그만큼 울분이 많다는 것"이라며 "에버랜드 노동자들과 서비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의 싹을 틔웠으니, 그 싹을 가꾸고 보살피는 것은 모든 이의 몫"이라고 말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이날 출범식을 시작으로 바로 삼성과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15일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박상범 대표이사에게 금속노조 박상철 위원장 명의로 교섭 요구안을 발송할 계획이다. 위영일 지회장은 "오늘 우리 노조의 출범이 수많은 간접 고용 노동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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