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씨는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재빨리 건네며 "정확한 역사는 잘 모르겠는데요~. 사장님, 이게 어떻게 불편하세요?"라고 묻는다. 안방 안에는 뒷부분이 불룩한 작은 CRT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10년은 더 돼 보이는 낡은 물건. 노인은 리모컨을 아무리 눌러도 "이노무 고물"이 켜지지 않는다고 했다.
'고물'을 좌우로 살피더니, 박 씨는 리모컨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본다. '외부 입력' 버튼을 누르자 검기만 했던 TV 화면에서 무표정한 박근혜 대통령이 나온다. 노인은 "아이고 되네. 뭘 누른 거야. 허연 거? 그거 허연 거?"라고 묻는다. 박 씨는 "허연 거 옆에 꺼먼 거요. 외부 입력이 잘못 눌러져 있었어요, 사장님"이라 말하며 애교 웃음을 보인다.
텔레비전이 멀쩡하단 사실을 알아챈 노인은 "괜히 더운 날씨에 이거…"라더니 "나는 최고 삼성만 써요. 다른 건 안 써요"라며 '오마주(hommage) 삼성'을 시작한다. 박 씨 역시 너스레를 떨며 "삼성이 최고죠, 사장님?" 하고 중간중간 맞장구를 친다. 이렇게 둘은 '우리나라 최고 삼성' 찬사를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했다.
"삼성 직원이면 돈 많이 법니까?"
그러다 노인이 묻는다. "삼성 직원이면 돈 많이 법니까?" 박 씨는 난감해하며 "저는 사실 삼성 직원은 아니고요. 협력사 직원이에요. 정식 삼성 직원은 아니에요"라고 옅게 웃었다.
노인은 "지금 정규직이 아니에요? 나이가 있으신데…. 아니 나이가 있는데 정규직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러면 삼성하고는 관련이 없어요? 다른 (서비스)센터에 있는 사람들도 정식 직원이 아니에요?"라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박 씨는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노인의 오래된 TV 브라운관을 정성스레 닦았다. "네. 정규직 아니에요" 하고 또 웃는다. '고물'에 닿은 물티슈가 까맣게 변하는 동안 노인은 "아이고 이를 어째"와 같은 탄성을 연거푸 내뱉었다.
노인은 "삼성이 회사만 커졌지 직원들한테는 잘 안 해주는구나. 삼성이 얼마나 커졌어, 얼마나"라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는 "이제 잘해줄 거예요, 삼성이. 저희가 잘해달라고 요즘 얘기하고 있어요. 삼성이 저희 정규직 시켜 줄 거예요"라며 노인을 '위로'한다.
수리 아닌 수리를 마친 후 박 씨는 삼성 가방과 삼성 전동 드라이버, 삼성 자재들을 양손에 들고 집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박 씨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삼성 직원이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다들 삼성 직원인 줄로만 아는 '가짜' 삼성 직원. 박 씨는 그렇게 "삼성 밥"을 수십 년째 먹고 있다.
쏟아지는 제보…"사장님이 '노조 하면 끝'이라고 했다"
지난 19일 <프레시안>은 최근 위장 도급, 불법 파견 논란의 한가운데에 선 삼성전자서비스 외근 수리 기사들의 하루를 동행했다. 앞서 <프레시안>을 포함한 일부 언론 보도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당의 17일 폭로 기자회견 이후, 당사자인 수리 기사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미 18일 오전부터 각 센터 사무실에서 위장 도급 증거물을 파기하고, 언론과 접촉한 기사들을 색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삼성전자서비스 위장 도급 및 불법 파견 논란 - "삼성에 청춘 바친 나, 알고 보니 불법 파견" - "삼성전자서비스, 조직적으로 불법 증거 인멸" |
동행 취재를 허락한 박 씨도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19일 오전 9시께, 인적이 드문 삼성전자서비스 ㄱ센터 주변 골목길에서 만난 박 씨는 몇 번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섭외를 위해 전화를 걸었던 전날에도 "정말 기자 맞아요? 삼성 사람 아니란 걸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었던 박 씨다. 그는 더 후미진 골목 안으로 기자를 데리고 들어가더니, "저 길 끝에 가 계세요. 차 가지고 갈게요"라며 반대 방향으로 다시 뛰어나갔다.
몇 분이 지나자 멀리서 앞뒤 범퍼가 긁히고 찌그러진 작은 차 한 대가 다가왔다. 박 씨가 '타라'는 손짓을 했고, 기자는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앞유리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박00 기사'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차 안에는 파란색의 삼성전자서비스 상자, 삼성전자 자재들이 나뒹굴었고, 음식물 봉지와 다 마신 음료수 캔들이 포개진 상태로 있었다. 이동 중 식사가 잦은 모양이었다.
센터 주변을 조금 벗어나서야 박 씨는 입을 열었다. "죽여버린다고 하면 차라리 안 무서울 텐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살인범이 칼 들고 나한테 덤비면 싸워본대도,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하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준다잖아요. 똑같아요. 나를 괴롭히는 건 버티겠는데, 기자 만나고 노조 만들고 하면, 다른 직원들을 괴롭히겠다고 하니…. 결국 인터넷 모임 탈퇴했어요. 나 때문에 누가 일자리를 잃으면 안 되는데…."
삼성전자서비스가 위장 도급 및 불법 파견을 하고 있단 보도가 나간 이후, 기사들은 인터넷 모임 공간을 만들었다. 처음 10여 명이 구성한 모임은 이날 오후까지 4000명이 넘게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모든 이가 수리 기사 직원은 아닐 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가입할 수 있는 공개 모임이기 때문이다.
'첩자'가 있을 수 있단 경계 속에서도 기사들은 이 공간에 위장 도급 증거가 될 만한 사진을 연이어 올리고 있다. 자신의 근로계약서와 급여명세서를 공개하는 기사들도 적지 않다. "터질 게 터졌다"는 분위기다. 이날 함께한 박 씨와 기자의 휴대폰도 종일 쉬지 않고 알림음을 냈다. "우리 사장님이 노조에 가입하면 끝이라고 했어요"와 같은 제보가 쏟아졌다.
노조 가입을 막는 등의 부당노동행위는 노조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 불법 행위다.
하루 최대 15시간 근무, "똥오줌 못 가리고 돌아다녀요"
▲왼쪽 사진은 박 씨가 애니 존을 사용하는 모습. 오른쪽은 한 수리 기사가 인터넷에 올린 자신의 근무표. 8시부터 21시까지 콜이 빼곡히 차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
차 안에서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콜'이 들어왔다. 고객이 삼성전자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수리 요청을 하면, 삼성은 '애니 존(Any Zone)'이라는 각 기사 휴대폰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통해 요청 내용을 지시한다. 박 씨는 능숙하게 애니 존에 접속해 고객의 이름, 주소, 망가진 물건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예 어머님, 삼성전자서비스 박00입니다. 냉장고가 망가지셨다고요~. 냉장고가 어떻게 불편하세요?"
'친절'이 뚝뚝 묻어나온다. 전화기 너머에선 "몰러.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모델명? 그런 거는 몰라. 지펠이야 지펠"이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박 씨는 "예 어머니! 그럼 제가 가서 볼게요. 15분쯤 걸려요"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이거 오래 걸리겠는데"라며 "냉장고 냉매가 꽉 얼어버린 모양이에요. 이거 문까지 안 닫힐 정도면 엄청나게 얼었단 건데. 1시간 훨씬 넘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수리 시간이 1시간을 넘기면 곤란하다. 콜(수리 지시) 하나를 처리하는 데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보통 60분. 이 안에 고객 집을 오가고, 물건 수리하고, 고객 감동도 줘야 한다. 성수기인 여름에는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14건의 콜이 접수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한 시간이 넘는 수리가 생기면 이후 일정도 줄줄이 조금씩 밀린다.
이렇게 전쟁 같이 행해지는 수리 한 건에 책정되는 수수료는 기본 7300원. 그나마도 막상 방문해 보니 더는 자재를 구할 수 없는 오래된 물건이라 수리를 할 수 없으면 이른바 '로스(Loss)' 처리가 된다. 이 경우 수수료는 2000원. 가끔 쪽방촌에 수리를 나가면 돈을 받지 않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기사들이 임의로 '특별 처리'를 신청해 5000원의 수수료를 받고 만다.
비성수기에는 6~7개 정도의 콜이 일정표에 꽂히지만, 성수기인 여름에는 15개가 꽂히는 날도 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똥오줌도 못 가리며 돌아다니는 날"이라고 박 씨는 표현했다. 일단 애니 존에 '콜'이 뜨면 기사가 이를 거부할 권리는 없기 때문에 점심시간도 없이 이들은 웃으며 고객 집을 방문한다.
안타깝게도 박 씨의 예감은 맞았다. '어머니'의 냉장고를 복구하려면 족히 2시간 반은 넘게 걸린다. 콜은 밤 9시까지 꽉 차 있는 상황. 뒤에 예약된 고객들한테 전화를 걸어 '늦게 간다'고 사정을 해야 한다. '제때 안 온다'는 싫은 소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오늘도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야 집에 돌아가게 생겼다.
"우리 아빠는 최고 회사 삼성 직원"
박 씨에겐 여섯 살, 열 살짜리 두 아들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가 삼성전자 직원인 줄로만 안다.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큰아들이 기가 살아 침대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 뭐 하시느냐고 묻기에 아들이 "아빠 삼성전자 다녀요"라고 답했고, 선생님은 "00이 아버지가 우리나라 최고 회사에 다닌다"고 했던 모양이다. 아들은 "우리 아빠는 최고 삼성 직원"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내보였다.
"가슴이 아프죠. 아빠 사실 삼성 직원 아닌데…."
박 씨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둘째 아들은 차를 타고 가다 '삼성전자플라자'가 나오면 "아빠 회사"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삼성 광고만 나와도 "아빠 회사!"라고 외친다. 출퇴근 시 박 씨가 입는 옷에 '삼성(SAMSUNG)' 마크가 찍힌 것을 봤으니 그럴 법도 하다.
박 씨는 "지금은 도급이네 협력사네 이런 어려운 말들을 애들이 이해 못 하겠지요"라며 "애들이 이런 걸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오기 전에 삼성 직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진짜 삼성 직원이 되기 위해 싸우는 거라는 걸 애들이 알아줬으면 해요"라고 말했다.
박 씨의 아내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며 남편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삼성이 어떤 데인데…. 삼성하고 왜 싸워. 나서지 말고 뒤에만 있어"라고 했었던 아내다.
아내가 마음을 바꾼 건 아내 역시 대기업 도급 사원으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일 테다. 박 씨의 아내는 얼마 전까지 불법 파견 비판을 받았던 신세계 이마트에서 도급 사원으로 일했다. 이른바 '옥수수 엄마'였다고 했다. 옥수수를 파는 매대에서 일했던 도급 사원이라는 말이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마트에서 무작정 옥수수를 까먹는 걸 본 아내는, 혼을 내지 않고 '더 먹으라'며 새 옥수수를 아이에게 까줬다. 이를 본 아이의 부모가 "정말 친절한 직원"이라며 인터넷에 글을 올려, 아내는 이마트에서 상도 받았다고 했다.
박 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그게 다 내 덕분이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삼성이 원하는 걸 내가 아니까 우리 마누라도 아는 거지! 우리 부부는 고객 만족이 일상이에요. 고객 만족!"이라고 외친다.
고객 만족을 위해 살아온 이 가족에겐 안타깝게도 여름철 가족사진이 한 장도 없다. 성수기인 여름에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아이들이 한 살, 한 살 먹으며 자라나고 있지만, 다같이 계곡 한 번, 해수욕장 한 번 떠나보지를 못했다. "우린 언제 가!"라는 아이들 투정을 들을 때마다 속이 무너진다. "올여름에도 글렀나 봐요"라고 박 씨는 말했다.
▲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들의 유니폼. ⓒ프레시안(최하얀) |
"아들들 데리고 여름휴가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박 씨는 "삼성에 노조라니,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라고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위장 도급 논란이 불거진 후, 현재 노조 가입을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실제 일부 지역에서는 집단 가입을 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에 또 한 줄 금이 갔다.
동행 중에 만난 다른 외근 수리 기사들은 "노조에 얼마나 가입했다고 하더냐"는 질문을 던져왔다. 한 수리 기사는 "보복이 두렵다. 삼성에서 노조를 하면 끝까지 괴롭힌다던데"라면서도 노조 가입서를 만지작거렸다.
휴대폰으로 애니 존을 접속하던 박 씨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말했다.
"기자님.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저는 삼성을 망가뜨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삼성이 좋은 직장이 돼서 우리도 일 열심히 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 아들들 데리고 여름휴가 한 번 가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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