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는 미국의 전위다. 서부 개척은 프런티어 정신의 정수이다.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은 캘리포니아 번영의 물적 토대였다. 보잉과 록히드마틴 등 군산 복합체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떳떳치 못한 구석만 있는 것도 아니다. 화창한 기후와 쾌적한 환경은 글로벌 인재를 흡입한다. 할리우드와 구글, 페이스북 등 문화 산업과 정보 산업의 집약지이다. 실리콘벨리는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두뇌들이 집결되어 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홀로 세계 9위 규모의 부를 창출하며 미국을 넘어 지구적인 영향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전후로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가계와 주정부는 천문학적 부채로 신음한다. 10%를 오르내리는 실업률은 쉬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동부의 명문 사립 대학(아이비리그)에 필적하는 특유의 주립대학 시스템도 위기에 봉착했다. 등록금은 날로 오르고, 장학금은 점차 줄어든다.
고등 교육보다 감옥 유지에 더 많은 예산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예산 감축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수감자를 조기에 석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교사들의 대량 해고로 공교육의 질적 저하 또한 피하기 어렵다. 캘리포니아의 현재는 아테네부터 워싱턴까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민주주의 거버넌스의 축소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캘리포니아는 창조와 혁신의 장소이다. 이번에는 정치다. 미국의 거버넌스를 선도적으로 재구축하는 첨병이 되고 있다. 2010년 창립한 'Think Long Committee for California'는 상징적이다. 놀랍게도 정당 정치와 일선을 긋는다. 이익 집단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함몰된 의회 정치,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에 좌우되는 대중정치와 거리를 둔다. 장기적 의제에 집중하는 별도의 기구를 고안했다.
구성원들은 정파를 초월한다. 전직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콘돌리자 라이스가 있는가 하면,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보좌관 로라 타이슨도 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입법, 사법, 행정부의 유력 인사에 자선 사업가, 노동 운동가 등 민간 전문가들도 합류했다. 구글의 최고경영자인 에릭 슈미트도 참여한다.
그래서 2010년 10월부터 매달 구글 본사에서 회동을 열고 있다. 현 주지사 제리 브라운(Jerry Brown)도 일원이다. 민관 협동이자 좌우 연합이다. 당파와 소속을 망라한 일종의 '현자 회의'이다. 이들은 지적이고 똑똑하며 명석한 정치(Intelligent Governance)를 표방한다.
2011년 11월 발표한 청사진(Blueprint to Renew California)이 흥미롭다. 의회 중심의 정당 정치로부터 탈각을 내세웠다. 방향은 둘이다. 하나는 권력 분산과 자치 강화이다. 예산안을 유권자들이 직접 판단하고 투표한다.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면이 덜하다. 직접 민주는 익숙한 주장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상층 정치의 재건이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보유한 '현자 회의'를 통해서 의회에 집중된 정치권력을 위로부터 견제한다. 주지사의 일시적인 자문 기구에 그치지도 않는다. 주 헌법을 수정하여 정식 기구로 삼겠단다. 멀리 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도맡는다.
물론 이들이 제안한 정책이라 해서 무작정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 투표를 통해 유권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즉 의회 정치를 위 아래로 감시하고 보완하는 기제 마련이 핵심이다. 그래서 청정 에너지 법안도 통과될 수 있었다. 기존 에너지 기업의 로비스트로 포위된 주 의회를 경유하지 않았다. 천심과 민심의 결합으로 중간 권력을 억제했다. 월가와의 정경 유착과 당파 정치로 국정을 농단하는 워싱턴과는 사뭇 다르다.
1인 1표제의 함정도 피하고자 한다. '인구(人口) 정치'의 탈피다. 사실상 일부의 사람들에게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평균주의를 청산하고, 상대적 위계를 인정한다. 다만 그들이 정치를 독점하지는 않는다. 대중의 정치 독점도 아니고, 엘리트의 독재도 아니다. 선출 방식을 달리하여 유명무실해진 상원의 실질적인 역할 복원을 꾀하는 측면도 있다.
상원이 추천제라면, 하원은 선거제이다. 현재의 상원(40)과 하원(80)은 120명의 하원으로 통합할 계획이다. 의원 수가 느는 만큼 더 작은 단위의 행정 구역을 밀착하여 대표한다. 즉 상원은 실력주의를 더욱 더 고취시키고, 하원은 한층 더 풀뿌리에 가깝도록 한다. 그래서 작금의 민주주의가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다음 선거를 위한 정치를 보완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정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설계 단계이다. 입법화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브라운의 재선이 유력하다. 귀추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겠다.
▲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 그는 미국식 대중 민주주의에 중국 공산당식 실력주의를 결합하는 독특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wikipedia.org |
현자 생존(survival of wisest)
Think Long Committee는 그 발상을 중국(과 싱가포르)에서 차용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식 실력주의(meritocracy)와 미국식 대중 민주주의의 조합을 천명한다. 개인적 인맥도 눈에 띈다. 제리 브라운은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연이 있다. 1980년대 광둥성 서기로 시중쉰이 개혁 개방을 이끌었을 때 브라운이 자문 역할을 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시장경제 실험에 일조했던 것이다.
이제는 역할이 바뀌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실력주의 도입에 중국이 힘을 보태고 있다. Think Long Committee의 자문단에는 정비젠(鄭必堅)도 이름을 올렸다. '화평굴기'론을 입안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이다. 중국이 미국을 학습하는 만큼이나, 미국도 중국을 배우며 개혁하고 개방한다. 광둥이 경제 특구였다면, 캘리포니아는 정치 특구이다. 일방적인 근대화의 세기는 지났다. 상호 학습과 상호 진화의 시대이다. 중국은 좀 더 느슨하게 풀고, 미국은 더욱 더 조여야 한다.
총명한 정치는 권력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대중에 대한 견제도 수반한다.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캘리포니아는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을 주지사로 뽑은바 있다. 당적과 정책보다 유명세가 더 힘을 쓴다. 광고가 선거를 잠식한 민주주의의 맹점이다.
명석한 정치는 99% 운동에도 환상을 품지 않는다. 정부에 반발하는 반(反)정치에 그쳐서는 실질적인 변화를 거두지 못한다. 일부 현학적 좌파 이론가만 종이 위에서 열광할 뿐이다. 그들의 뼛속 깊은 반정치와 반국가는 신자유주의와 그다지 멀지 않다. 반해 똑똑한 정치는 거버넌스의 운영 체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더 집중한다. 다중 네트워크를 과대평가하지 않고, 유능한 조직을 일구고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공을 더 들인다. 실제적이고 실무적이다.
돌아보면 20세기 대중 정치의 만개는 산업 혁명과 화석 연료에 기반을 둔 성장 문명 고유의 정치 형식이었는지 모른다. 누구나(아무나) 주권을 행사하는 1인 1표 민주주의 또한 100년의 경험에 그친다. 인류사에서 100년은 짧디 짧은 찰나이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기를 비민주적인 제도 아래 살았다.
그리스 민주정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 온당하다. 오늘을 기준으로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는 근대의 습성을 고쳐야 하겠다. 표현도 바꾸어야지 싶다. 인류는 덜 민주적인, 혹은 민주가 정치를 독점하지 않는 사회를 오랫동안 영위해왔다. 왜 그랬을까? 진지하게 묻고 숙고해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가 역사의 종언일 리 없다. 역사에는 종언 자체가 없다. 새로운 환경에 부단하게 적응해가는 진화가 있을 뿐이다. 그러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퇴화한다. 공산주의가 그랬다. 민주주의 또한 만세가 누릴 세습제일 리 만무하다. 사람도 스물이면 성장을 멈춘다. 빛나는 청춘은 일시적이다.
그 다음에는 훨씬 더 긴 성숙의 과정이 온다. 젊을 때처럼 몸을 놀려서는 오래 살지 못한다. 결국 항상성의 지속이 관건이다. 내외부의 환경에 맞추어 균형을 달성하는 끊임없는 운동이 있을 뿐이다. 그래야 일상을 건강하게 가꿀 수 있다. 자유보다는 자제와 절제가 더욱 지속 가능한 미덕이다. 수신(修身)이고, 수기(修己)이다.
문명이라고 다를까? 무한 성장이 약속한 자유와 평등과 민주라는 가치가 인류의 집합적 수명을 단축시키는 독이 되고 있음을 냉철하게 직시할 때이다. 반생태적이고, 반생명적이다. 인간 중심적이다. 근대의 사회 공학(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 엔트로피를 폭발적으로 가중시킨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절감하는 것이 옛 말이, 어른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옛 것은 낡은 것이 아니다. 낡은 것은 진즉에 사라졌다. 옛 것으로 남은 것은 오래토록 지속한 것이다. 진화를 거듭하며 갱신된 끈질긴 것이다. 그래서 혁명(revolution)이란 늘 되돌림(re-evolution)이었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이다. 르네상스이고, 복고이다.
새문명의 정점인 미국과 오래된 문명의 정수인 중국이 서로 배우기 시작했다. 다시금 동과 서에서 중용을 취하고, 고와 금에서 새로운 균형을 이룰 때이다. 근대의 청춘기(亂世)에는 우승열패, 적자생존이 득세했다. 성숙기(治世)에는 다를 것이다. 덜 경쟁적이고 더 지혜로우며 더 협동하는 쪽이 살아남는다. 현자 생존(survival of wisest)이다. 불교 국가 500년, 유교 국가 500년의 경험도 부채가 아니라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
새 정치를 운운하며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에 기웃거리는 이들이 있다. 안타깝다. 서구와 동구를 흠모하며 동방을 폄하했던 100년의 습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20세기형 따라잡기에 급급하다. 등잔 밑이 어두우니 제 발등만 찍어댄다. 자생성이 부족하다. 뿌리가 허약하다. '진보'가 종(種)으로서 도태하고 있는 근저이다.
기존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자. 근대의 단단한 모든 것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정치라고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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