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가족"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간은 인정받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감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발아해서, 사회적 관계로 실현된다. 그리고 그 최소 단위는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어머니, 아버지, 배우자, 그리고 아이. 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나 역시도 그들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혈육의 가족 외에 또 하나의 가족은 인간을 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면, 그 기업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될까?
그런데 그 기업이 자신의 가족인 노동자의 병을 은폐하고 있다면, 심지어 20대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을 비롯한 희귀 난치병에 시달리며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기업이 허울뿐인 '가족'을 말할 뿐 실제로는 엄청난 착취를 일삼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 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산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족'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가족들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 기업은 이렇게도 말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산업재해는 아니라고. 생각해보면 무서운 얘기다. 그 기업은 검찰들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에게 명절 때마다 떡값을 나눠줬다고 한다. 말이 떡값이지, 그 돈으로 떡을 해먹으면 배 터지도록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는 수준의 뇌물이다. 자, 뇌물 받은 사람들이 노동자와 자신에게 뇌물을 준 자 사이에서 심판을 본다면 누구 편을 들어줄까?
그리고 그 기업은 언론사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늘 여론에서 '승리하는 ㅈ.ㅈ.ㄷ일보'(영어 약자로는 vCJD라고도 한다) 중 하나를 갖고 있다.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확대하고 불리한 것은 축소할 뿐 아니라 황당무계한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의 기업에 불리한 내용은 축소하거나 은폐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할 수 있는 능력마저도 갖고 있다.
여기에 최근 사건 하나만 더 추가하자. 그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라서 그 자식은 국제중학교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했다. '또 하나의 가족'을 표방하는 기업은 이렇게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말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과연 이런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을까?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듣기에 안성맞춤일 수 있다. 돈과 도덕적 가치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고, 사회적 책임 운운하는 것은 기업한테 영리목적의 기업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순수 인문학, 특히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헛소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 한 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세상물정과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말하려고 한다.
<기업은 왜 사회적 책임에 주목하는가>(김민주·김선희 옮김, 거름 펴냄). 이 책은 데이비드 보겔(David Vogel)이라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가 썼다. 그의 이력을 보니 경영의 관점에서 문제를 관찰하고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시장의 힘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끌 수 있다는 현실적인 얘기를 제시하려고 한다.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의 관점에서 이 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응용윤리의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물정 모르는 철학자의 관점으로 당위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 <기업은 왜 사회적 책임에 주목하는가>(데이비드 보겔 지음, 김민주·김선희 옮김, 거름 펴냄). ⓒ거름 |
예를 들어 스타벅스가 공정 무역을 통해서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커피 원료를 사고 있고, 스포츠 의류 업체인 나이키도 개발도상국가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노동 환경을 관찰하고 있다. 또한 맥도날드의 경우에는 미국 내 쇠고기와 닭고기 공급자들 사이에 증가하고 있는 항생제 사용을 막기 위해 EU의 항생제 사용 제한 규정을 채택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또는 기업 윤리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CSR의 개념은 모호한 측면이 있다. 원래 윤리 활동이란 것이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나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기업 윤리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넓게는 기업의 목적인 이익 추구 과정 외에 이루어지는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고, 좁게는 비즈니스 과정에서 에너지 사용 절감과 같은 일부 사업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호한 규정이지만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에서 CSR을 강조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자본의 속성을 인정하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피터 드러커(P. F. Drucker, 1909~2005)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모든 저작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적인 미래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 사회로의 성장이 필수적이다. 국가는 단지 기업의 역할을 조정하고 협력하게 해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생활 질서는 시장이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업이 자신의 노동자를 기본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를 바깥으로는 시장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기업의 혁신이 깔려 있어야 한다. 기업은 단순히 이익집단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이바지하고 봉사하는 공생적 집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마케팅을 통한 시장에서의 성공은 반드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지역 공동체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의 관점에서도 비즈니스 윤리, 나아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현실과 연결되며, 시장의 속성에 따라서 판단해야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주어진 선악의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소비자, 직원, 투자자의 힘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주요 동인을 소개한다. 기본적으로 소비자, 직원(노동자), 투자자가 그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시장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투자자 역시 안정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원한다. 이런 토대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조건이 된다.
이 책에서 따르면 소비자는 윤리적으로 경영하는 기업의 상품을 그렇지 않은 기업의 상품보다 더 선호한다는 구매의사가 타당한지 검토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서 구매 결정한다는 보고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연구 결과는 실제로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구매 효과는 3퍼센트 남짓, 심지어 불매운동의 경우에도 전체 구매의 2퍼센트에 영향을 미칠 뿐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소비자들의 의지와 실행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서 제3세계에서 노동착취로 이루어지는 휴대폰이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기술과 디자인 혁신을 이룬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
직원(이 책에서는 직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노동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이 책에서는 이와 관련된 사례가 없다. 경영학의 측면에서 접근하다보니 employee라는 말을 직원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의 경우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직을 희망하는 비즈니스 스쿨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설문조사해보면 기대 수입보다 평균 14퍼센트 낮더라도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수행하는 기업에서 일하길 희망했다. 그렇지만 이런 결과도 실제 고용 시장에서 그대로 나타났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투자자들 사이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재무 결과에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회, 환경, 윤리적 사안들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기업들이 재무적 안전성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투자 경향도 실제로 큰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실제 기업의 사례를 살펴보면 사회적 책임을 다한 기업이 반드시 좋은 수익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의 세 요인 중에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기업에 책임을 부과할 수 있도록 시장을 조성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세 요인이 지속적으로 규제하고, 이와 함께 정부 규제를 통해서 공공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장에서의 환경 자체가 윤리적인 조건이 성립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으로 보인다.
한국 재벌의 사회적 책임
한편으로 이 책은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좀 더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도 이미 기업사회로 들어가고 있다. 기업의 힘이 막강해지고 있고, 일부에서 대한민국을 삼성공화국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기업사회는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기업 사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재벌공화국'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는 어느 사회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요해야 한다.
생각해보자. 현재 우리 재벌기업 중 적산기업에서 출발하지 않은 기업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독재정권으로부터 금융 수혜를 누리지 않은 기업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고 편법으로 기업의 소유와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은 재벌이 얼마나 있는가? 내친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더해 보자. 최근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에너지 대란을 겪었다. 국민들에게 전기 아껴 쓰라고 정부는 강요했다. 1인당 전기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면서. 그런데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1인당 전기 사용량은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료 현실적으로 올려달라는 재벌이 있는가? 생산 단가 줄이기 위해 중소기업으로부터 하청단가 후려치지 않는 재벌 기업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로부터 완전 자유로운 재벌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재벌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극명하다. 시작부터 성장까지, 심지어는 지금도 국민의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다른 국가보다 더 따르는데 사회적 책임을 우리 기업은 방기하고 있다. 심지어 재벌 총수에 무슨 문제가 있어도 법적 책임은 유예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보겔이 말하는 대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소비자, 직원, 투자자의 힘, 정부의 규제로 충분할까? 한국의 정부는 재벌과 매우 친하다. 그런 정부가 재벌을 위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지 재벌 규제를 강조하겠는가?
과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 소비자들은 기업의 광고 행위를 압박했다. 아주 똑똑한 소비자들은 CJD 일보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주에게 불매운동을 하겠다는 경고를 날렸다. 실제로 이런 소비자의 집단적인 운동에 일부 기업은 CJD 광고 게재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CJD는 소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에서 소비자들은 '영업방해'라는 불법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소비자의 현명한 활동조차 법 앞에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소비자의 행위만으로 되지 않는다. 직원이나 투자자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경우 몇 해 전부터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를 위시한 소위 '99퍼센트'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들의 요구 중 당장 실현이 되었던 것은 부자 증세, 혹은 부자 감세 반대였다. 미국의 경우도 이 요구가 오바마 정부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NGO 활동이 정부 규제로 발전한 경우이다. 말하자면 정부 규제에서 시민 규제로 발전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를 당장 실현하기가 버겁다. 시민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힘이 강력해지고 싶어도 언론 환경, 제도권 환경이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업 윤리는 시장의 속성으로 내맡길 수 없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시장의 경쟁과 함께 공동체적 의식이 기업 스스로에게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자산인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법적 책임 운운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에게 산업재해의 이유를 밝히라는 기업, 물이 새는 자동차를 팔면서 리콜대신 실리콘으로 응급처치하고 나 몰라라 하는 기업, 고작 3퍼센트도 안 되는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 모든 권리는 소유하고 의무는 방기하는 기업가. 이런 환경이 우리 기업의 현주소이다.
아쉽게도 우리 현실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시장의 불균형을 먼저 해소해야 될 것이다. 이 불균형 안에는 재벌의 해체가 필수적으로 보인다. 이는 시민 활동만으로 될 것 같지는 않다. 시민 활동이 많이 다양화해지고 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충분히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힘도 갖지 않고 있다. 시민의 규제보다는 조직화된 권력이 필요하다. 아직 제도적 힘을 완수하지 못한 현실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터 재벌 해체, 사회적 책임을 하나씩 물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의 복권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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