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들었다는 여배우들의 드레스보다, 수백만 달러가 넘는다는 고가의 보석들이 빼곡히 박힌 데이지의 머리 장식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네다섯 번밖에 못 본다"는 개츠비의 "아주 특별한 미소"보다 더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깃털, 새들의 깃털이었다. 무대 위 무희들이 흔들어 대는 거대한 부채와 캉캉드레스뿐만 아니라, 발 디딜 틈 없이 파티장을 가득 메운 거의 모든 여성들의 모자며 머리 장식이며 스카프며 드레스 끝단에서 화려하게 휘날리는 깃털 장식을 볼 수 있었다. 크기와 형태, 색상도 다양한 깃털들이 실바람에 이리로 저리로 물결치는 그곳은 언뜻 전 세계 야생 조류 및 가금류 박람회장을 연상시켰다.
▲ <깃털>(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 에이도스 펴냄). ⓒ에이도스 |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뜻하지 않게 21세기의 어느 생물학자가 쓴 한 권의 책에서 찾아왔다. 일곱 빛깔 무지개 색을 넘어서는 다채로운 색상에다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금속성 광택. 자연이 선사한 최고의 사치이자 경이로운 걸작, 깃털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깃털: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Feathers: The Evolution of a Natural Miracle)>(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 에이도스 펴냄)이 바로 그 책이다.
사람들이 깃털에 열광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깃털은 이미 2세기부터 물고기들의 혼을 빼는 낚시 미끼로, 7세기부터 필기도구로, 그리고 최고의 방한 제품으로 인간 사회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컷 새가 암컷에게 뽐내고자 오랜 진화 역사 동안 갈고 다듬은 번식깃의 아름다움에 '인간'이 덩달아 눈을 뜨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깃털들을 욕망하게 되면서 더 멋진 깃털을 더 많이 쟁취하려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깃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는 개츠비의 시대보다 조금 앞선 1912년이었다.
한 패션 잡지가 "요즘 잘 차려입은 여성들은 둥지에서 갓 나온 새들처럼 푹신한 솜털로 뒤덮여 있다"고 감탄했을 정도로 1912년의 런던이나 파리, 뉴욕 등지에서는 깃털로 한껏 치장한 여성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깃털 장식에 사용되는 새들의 종류도 다양해서 근처 센트럴파크 숲에만 들어가도 볼 수 있는 논병아리와 딱새, 딱따구리 등 토종 새 수십 종을 포함하여 뉴기니 섬의 극락조, 트리니다드 섬의 벌새, 포클랜드의 제비갈매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타조에 이르는 온갖 이국적인 새들까지, 도심지 거리거리가 거대한 새장을 방불케 했다.(심지어 박제된 새 한 마리를 통째 모자에 다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깃털이 풍성하고 윤기가 흐르는데다, 봄여름에만 유행하는 야생 종의 깃털(일명 '팬시 깃털')과 달리 계절을 타지 않는 타조 깃털은 단연 최고의 패션 아이템으로 세계 깃털 산업을 주름 잡았고,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북부 어딘가에서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려진 신비의 새, 바바리타조(Barbary ostrich) 깃털은 상류사회 인사들 사이에서 다이아몬드 다음 가는 사치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바바리타조 깃털이 뉴욕의 한 모자 가게에 공수되었을 때에는 멋 좀 부린다는 여성들이 대거 몰려들어 한바탕 앞 다툼이 벌어졌으며, 당시 타조 깃털 공급자로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제 막 타조 산업의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 사이에서는 이 바바리타조를 선점하기 위한 국제적 규모의 첩보전이 사하라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제국들의 변경 확장에 대한 야욕과 국제 교역의 확대는 사람들의 깃털을 향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더없이 좋은 동력이었고,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깃털 산업의 호황은 에드워드 시대를 지나 50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패션계에 분 새로운 바람(보다 단순하고 실용적인 의복을 추구하는)으로 깃털 황금기가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지구상의 수많은 새들이 개체수가 급감하거나 전멸 상태에 이른 뒤였다.
<깃털>은 1억 5000만 년 전 즈음 어느 파충류의 몸에서 처음 돋아난 이래 진화의 바퀴를 굴려 '새'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출현시키고, 더불어 새들에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다양하면서도 뛰어난 기능과 극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게 된 깃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깃털 자신의 이야기, 즉 깃털의 자연사를 들려주는 것이다. 최초의 깃털은 언제, 누구에게서, 어떤 형태로 돋아났으며 깃털의 첫 번째 기능은 무엇이었나 하는 기원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하여, 보온과 비행, 과시와 구애 등 오늘날 새들에서 실제 깃털이 담당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을 수많은 선배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깃털은 비행을 가능하게 하고, 추운 지방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하며, 이성을 유혹하는 색다른 번식 전략을 구사하게끔 돕는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히트작인 이 깃털 덕분에 오늘날 새들은 북극권의 작은 바위섬과 고비 사막의 추운 고지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극에서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는 7만 여 킬로미터를 왕복하고, 전 세계 인구보다 훨씬 많은 4000억 마리라는 엄청난 수로 하늘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깃털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연구하는, 이 책의 저자인 소어 핸슨(Thor Hanson)을 비롯한 자연학자와 생물학자들이 제일 먼저 깃털의 가치를 알아보고 매혹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깃털을 통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이래 수많은 진화 생물학자들이 지구상의 생명을 이토록 다양하고 풍성하게 이끈 성(性, Sex)과 성의 진화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파충류에서 공룡을 지나 조류가 탄생하는, 40억 년 지구 생명 역사에서 독보적인 한 사건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다른 한 줄기는 깃털을 욕망하여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 가고 있다. 형형색색의 깃털로 자신을 아름답게 연출하려 했던 에드워드 시대의 여성들(그리고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 쇼 무대에 선 무희들)과 오리털과 거위털로 극한의 추위도 이겨 내는 최고의 방한 제품을 만들려는 사람들, 깃털과 날개를 분석해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고자 했던 과학자들 등등 저자가 직접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밝혀낸 깃털에 매혹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깃털의 자연사 못지않게 흥미롭다.(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 수 없고 털이 없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며 색채가 없어 돋보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가 문득 느껴지면서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 바즈 루어만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 ⓒ워너 브라더스 |
저자가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간혹 인터뷰를 딴 부분을 그대로 풀어놓아 지루하다거나 개별적인 정보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수많은 가설과 이론과 논쟁이 얽혀 있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각자의 역사를 지닌,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깃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엮어 낸 그 자체만으로도 <깃털>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얼마 전 불거진 교과서 진화론 사태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새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만 해도 150여 년에 걸친 치열한 갑론을박의 역사가 존재한다. 1861년 독일 바이에른의 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까마귀 크기만 한 화석에 시조새(Archaeopteryx, '고대의 날개', '최초의 새'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후 새가 공룡으로부터 진화했느냐, 아니면 공룡과 새의 공통 조상인 파충류로부터 진화했느냐 하는 새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최근 20년간은 중국 랴오닝 성을 중심으로 깃털은 있되 새는 아닌 공룡 화석들이 여럿 발견되면서 '최초의 새'라는 타이틀을 시조새에게서 거둬들여야만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올해 5월 동일 지역에서 아우로니스(Aurornis xui, '새벽의 새'라는 뜻) 화석이 등장하면서 시조새가 진정한 새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저자는 시조새가 처음 발굴되었던 당시의 논란에서부터 최근 중국 화석들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에 이르기까지를, 서로 반대 진영에 있는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간혹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되기도 하는 앨런 페두차 박사(Alan Feduccia)(새가 공룡에서 진화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지, 새의 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의 인터뷰도 실려 있는 만큼 시조새를 둘러싼 진화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볼 만하다.
무엇보다 호기심의 안테나가 전 방위적인데다 궁금증이 일면 먼저 컴퓨터를 켜거나 책을 펴는 게 아니라 밖으로 뛰어나가 몸소 부딪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저자의 일상을 엿보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다. 깃털의 형태를 직접 보겠다고 온갖 동물의 사체로 가득한 냉동고를 뒤져서 찾은 굴뚝새에서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깃털 옷을 벗겨 내고, 낚시 미끼의 효용을 검증해 보겠다고 (위험한 일이므로 아내의 허락을 구한 후) 난생 처음 플라이 낚시에 도전하며, 깃털 산업의 실체를 파헤치자고 (위험하지는 않으나 아내의 허락을 구한 후)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반라의 쇼걸과 인터뷰를 시도하는 등 저자의 좌충우돌 탐험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바이러스 행성>(이한음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기생충 제국>(이석인 옮김, 궁리 펴냄) 등을 쓴 유명 과학 저널리스트 칼 짐머(Carl Zimmer)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자연이 만들어 낸 가장 경이로운 걸작들을 우리들 대부분은 결코 직접 볼 수 없다. 농구공 크기만 한 거대오징어의 눈도, 일각고래의 유니콘 뿔처럼 생긴 엄니도. 하지만 단지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자연의 경이가 한 가지 있다. 공룡이 깃털들을 사용해 하늘을 날고 있는 광경 말이다."
<깃털>을 읽고 난 다음에는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로만 여겨지던 비둘기가, 까치가, 참새가 달리 보이게 되지 않을까. 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자연이 만들어 낸 가장 경이로운 걸작을 몸에 걸친 채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비둘기공룡과 까치공룡, 참새공룡을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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