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똥을 무시하고 고민을 잊는 데는 드라마와 책만큼 좋은 게 없다. 모든 의사가 의학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듯, 모든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주인공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 선배들이 <직장의 신>이 재미있다고 입을 모을 때, 그들과 달리 비정규직이었던 나는 "저는 그 드라마 안 봐요"라는 말로 대화의 진전을 차단했다. 어차피 정규직인 그들과 솔직한 감정을 공유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그러나 이 드라마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심부름센터처럼 해결해 줄 리 없었다. TV를 끄면 무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물질'을 드라마에 녹여냈다. 그래서 웃기면서도 껄끄러웠고 보면서 가슴이 저려왔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 펴냄)의 공선옥 작가는 '라디오 책다방'에서 사극 천지인 요즘 드라마의 풍조를 비판했다. 최근 30년 동안 무수한 일이 일어났는데 많은 드라마들이 조선시대 삼국시대 등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다루면서 직면을 회피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직장의 신>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답을 내려주지도 않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을 그려내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칭찬할 만한 드라마에 속한다. 그래, 드라마적 의의는 인정하자. 근데 내 앞에 놓인 문제는 어쩔 건데. 순간의 통쾌함으로 만족하면 수능 언어영역에 뻔질나게 나오는 소시민이 되는 거다. 보는 것 자체로 구태의연한 내 일상을 긍정할 수는 없는 걸까. 회피에서 멈추면 안 되는 건가. 그때 운명적으로 다가온 책이 히로세 준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다.
"직장을 잃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진짜 굶어 죽기 직전인 내게 그런 '문학'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뜻밖의 순간에 일체의 생물학적 생존 욕구를 뛰어넘는 놀랄 만한 하나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는 노동자의 온몸을 흝고 지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문학'이 그 압도적인 창조력과 함께 모조리 내 몸으로 파고들어 온다면, 나야말로 인류의 미래, 인류의 희망, 그 자체가 아닐까?"라고.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나야말로 인류의 희망이라는 표현은 손 발 오그라드는 포장이지만, '야간근무'와 '회식'을 거부하는 미스 김의 전복적 자세가 굳어있는 직장인들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건 사실이다. 미스 김도 월급 받는 직장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녀는 저자가 말하는 봉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혁명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생겨나지만 봉기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생겨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직장의 신>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자, 언론 매체는 마치 '대나무 숲' 코스프레를 하듯 비정규직들의 노동사례와 처우문제 노동구조 비판에 가세했다. 언론이 쏟아내는 신원미상의 인터뷰들은 마치 소설 속 캐릭터보다 정체가 흐릿하고 애매했다. 그렇기에 그 말을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친구와 고민을 공유하는 "그래 너도 힘들구나.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라는 '찌찌뽕'의 희열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지인들의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정의 맥이었다. 답을 제시한 건 아니지만 우리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고 공유하고 있었다. 소심하게 '불판'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 문제를 공유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봉기'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 답을 공유하려는 운동인 '혁명'이 아닌 것이다.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
논리와 통찰력으로 무장한 'Telling'의 필살기를 갖춘 논객이 아닌 다른 이들의 생각과 말을 'Showing' 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 갈무리가 아닌 청춘의 다양한 표상을 청춘 그 자체의 목소리로 소개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쏟아짐 속에서 발견하는 통찰'의 가치를 느끼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암흑 같은 대학생활을 떠올렸다.
서울권 대학에 입학했으나 가난했던 나는 문화·경제적 격차에 휩쓸려 '쭈그리'로 전락했고, 그때 내가 제일 미워했던 부류는 지방대에 갔으나 용돈 펑펑 쓰면서 사는 종족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의 삶을 처음으로 접한 게 바로 이 책이었고, 그 친구들이 보여준 생각의 깊이와 솔직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Showing' 하기 위해선 솔직한 'Telling'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 또한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비정규직 1년 인생에 대한 썰을 풀고자 한다. 심연으로 가는 자발적 불판을 깐 것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방값 때문에 미치겠다. 이 월급으로 서울 생활하면 몸·마음 병드는 건 시간문제. 연봉을 높여야 해. 그러려면 한 직장에 오래 머물러서 진급을 해야 하는데, 이 서툰 성격으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할 수 있는 한 정규직이 갖추어야 하는 의무감이나 처세술에서 해방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능력만 된다면 멋진 자발적 비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더 밑바닥까지 가볼까. 난 직장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비정규직이라는 옷으로 감추고 있었다. 동정표도 받고 내 두려움도 감추고. 만만한 가족을 탓하며 같잖은 핑계 코스프레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나는 도주 중인 것 같았다. 중학력 백수 잉여 중 한명인 나는 "남겨지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어디까지든"라는 <도주론>(문아영 옮김, 민음사 펴냄)의 저자 아사다 아키라의 말처럼 살고 싶기도 한 것이다. 아사다 아키라는 인간을 두 형태로 분류했다. 편집증적 인간인 파라노이아 형과 분열증적인간인 스키조프레니아 형으로. 전자는 재산을 축적해 가정을 이루는 '정주(定住)하는 형태'로 도중에 그만두면 게임에서 지게 된다. 반면 스키조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도망치는 자는 몸이 가벼워야 한다. 늘 0에서 시작하는 게 스키조다.
▲ <도주론>(아사다 아키라 지음, 문아영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즐거움이라. 나처럼 꽉 막힌 인간에게 즐거움이라. 비정규직을 노마드 족이라 포장하는 것처럼, 말만 그럴 듯한 스키조라. 그러다가 평생 사회·가족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고독인이 되면 책임질 건가? 즐거움을 추구하기엔 유지비가 많이 드는 게 바로 지금의 소비사회다. 가벼움을 획득하기 위해 기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게 지금 이 시대인데.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다면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벼워야만 한다고 외치는 게 지금 이 시대인데.
아직도 일어날 일들이 많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불확실성,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갈망 고뇌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자의 불행은 선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진 수단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끌어냈는가?'라는 질문은 시도 때도 없이 소비자를 엄습하여 잠을 설치게 만든다 (<액체근대>)
게임을 중단하면, 그대로 끝나거나 아니면 추락의 위험이 깃든 대 탈주를 시도하거나. 잠깐 게임을 멈춰도 게임 포인트는 남는 것처럼 세상이 게임과 동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로그아웃을 하거나 캐릭터를 바꿔보거나 무기도 새로 바꿔보거나. 현실은 사는 방(동네)을 옮기려 해도, 이직을 하려 해도 무력감만 한가득이다. 지금 나는 '멋진 도망자'라기보다 '서핑보드'를 타야하는 꼴에 더 가깝다. 가볍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멋진 포즈까지 취해야 한다.
가벼워지기 위해선 가벼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역설의 '이해타산'을 견뎌야 한다. 얽매이지 않기 위해 회사를 탈출하면 일상이 이해타산으로 물든다. 사람을 만나 밥을 먹으려 해도 돈, 커피를 마시려 해도 돈, 경조사에 참석하려해도 돈. 몸을 조여 오는 가계부의 구속은, 어느덧 생각을 옥죄고 나란 인간을 무거운 인간 즉 한쪽으로 쏠린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몸무게가 감소하려면 몸속의 지방분해가 과잉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길은 평탄하지 않다. 현재의 소위 게이들을 보아도 탈주 도중에 추락하거나 반대로 세분화된 성적 역할로의 편집증적 고착에 빠지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양성성조차 불순하다면서 무시하는 동성애 엘리트주의라는 것도 있다. 이만큼 편집증적인 것이 또 있을까? 남자의 탈주의 선과 여자의 탈주의 선이 교차하는 곳에 새로운 사랑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주론>)
그래서 교차점을 찾고 싶었다. 정주 속에 도주의 길을, '기민하게 수시로' 탈주를 계속하면서 정주의 길을 달려가는 거다. 어차피 도주해봤자 저승 아닌 이승이겠지만, 그래도 어딘가를 향해 달린다는 건 아직 세상을 포기하지 체념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 크로스로 달리면서 탈주로 위장한 편집증을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극과 극이 아닌 나 같은 중간종자를 위한 지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호흐, 베르그송과 더불어 오즈가 제안하는 자유의 전략은 여기에 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속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 '뿡뿡' 소리처럼 가벼운 신체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이야기할 때 문제로 삼은 것도 이것과 다르지 않았다. 노동을 그만두고 시작에 전념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동시에 시를 쓰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란 여러 개의 지속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 그를 위해 가벼운 몸을 획득하는 것이며, 네트워크 또는 '생산라인'으로부터 몸을 떼어 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액체근대>(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강 펴냄). ⓒ강 |
실의에 빠져 마지막 여행지인 비아리츠를 막 떠나려고 하는 그때, 델핀느는 자크라는 남성과 만나 마침내 웃음을 되찾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세계가 클리셰의 총체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자크도 다른 모든 남자와 똑같이 '더러운' 존재일 뿐 '백마탄 왕자'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자크와 만남으로써 델핀느는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는다. 어째서인가?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 순간 "이만하면 훌륭하잖아!" 하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요령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옥처럼 가혹한 여름 방학의 경험을 통해 세계의 더러움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체념')을 배웠기 때문이고, 나아가 세계의 잠재력을 믿고 거기에 자신을 거는 것('도약')을 배웠기 때문이다.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내게 있어 봉기가 글과 영상이라면 이 모든 게 부디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몇 년 후, 내가 지금 쓴 글을 읽으며 세상 모르는 '허세글'이라 부끄러워하거나, '출구 없는 길'로 들어설 징조였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13년 상반기의 나는 월급의 70퍼센트를 저축하며 원룸텔 탈출을 꿈꾸고 있었고, 퇴근 후에 틈틈이 글을 쓰며 내 안의 '불안'을 돈도 안 되는 '창조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동화작가가 된 정주리,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장규직. 미스 김이 만든 불판은 누군가에게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책으로나마 불판을 기웃거린다. 그래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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