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마야는 자기 새끼들이 모조리 죽은 줄도 모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는 (…)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개썰매꾼 재형에게 소리 없이 물었다. 정유정 작가의 신작 <28>(은행나무 펴냄) 오프닝을 끝맺는 이 가슴 아픈 질문은, 숨 막히는 마지막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단단히 숨통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살려주세요"라는 울부짖음 앞에서 귀 막고 돌아섰던 이들 모두에게, 개는 여전히 따뜻한 다갈색 눈동자로 묻는다. 대체 왜 그랬어?
▲ <28>(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28>의 배경은 수도권 인근 도시, 인구 29만 명의 화양(火陽)이다. 설날 직전, 이곳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발한다. 최초의 발병자는 개 번식사업을 하던 중년 남자다. 직전에 신종플루를 앓았던 이 남자는 아픈 개에게 물린 이후 눈이 빨갛게 붓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인다. 그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119구조대원들을 중심으로 인수공통전염병, 일명 '빨간 눈'이 퍼지기 시작하고 삽시간에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돌연사한다.
흰자위가 핏빛이었다. 아니, 안구 자체가 푹 퍼낸 선지 덩어리 같았다. 눈꺼풀과 눈두덩까지 자줏빛이었고 눈자위엔 고름 덩어리 같은 점액질이 들러붙어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개썰매를 끌던 서재형은 한국 화양에 돌아와 유기견을 구조하는 수의사로 지낸다. 그러나 과거를 들춰낸 기사를 쓴 기자 김윤주 때문에 큰 난관에 처한다. 더 심각한 재앙은, 재형이 키우는 알래스카 말라뮤트 '쿠키'의 원래 주인이었던 박남철과 박동해로부터 비롯된다. '빨간 눈' 발병지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늑대개 '링고'는 화양을 떠돌다가 재형의 집 근처에서 또 다른 말라뮤트 '스타'와 마주치고 곧장 사랑에 빠진다.
'빨간 눈'은 무서운 속도로 화양에 번져나가고 사람들은 속절없이 쓰러진다. 간호사 수진과 119 구조대원 기준은 이 병과 맞서는 최전방에서 끔찍한 공포에 시달리고, 국가는 이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화양을 봉쇄한다.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사방에서 죽음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화양은 지옥이 된다.
<28>은 그 아비규환을 살아내는 다섯 명의 사람과 개 한 마리의 이야기다. 재형, 윤주, 수진, 기준, 동해, 그리고 링고는 죽음의 한복판을 짓밟고 그 안에서 나뒹굴며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목도한다. 인간이 타인에게, 혹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 그리고 나 혼자만 살아남겠다는 욕망과 혹은 같이 살고 싶다는(거꾸로 같이 죽고 싶다는) 욕망은 합치되지 못한 채 연쇄적인 비극을 일으킨다. 종말의 손길은 개와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
<28>은 뛰어난 스릴러이자 생태소설, 재난소설, 러브스토리기도 하다. 딱 한 마디로 말하자면, 뛰어난 이야기다. <7년의 밤>이 음습한 물가에서 내면의 심연까지 계속 잠수해 내려가는 단단한 덩어리의 이야기였다면, <28>은 백색의 건조한 공간을 단숨에 그을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직선의 이야기다. 작가처럼, 등장인물들처럼, 독자 역시 그 기나긴 레이스를 뛰는 내내 옆이나 뒤를 돌아볼 짬을 낼 수 없다. 등 떠밀리며 계속 질주하는 독서의 체험. 이글이글 내리쬐는 불볕더위 속에서, 눈물범벅 땀범벅이 되어 <28>을 밤새워 읽었던 건 축복이었다.
'프레시안 books'는 지난 6월 22일 정유정 작가를 만나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28>의 정유정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28>은 6월 16일 출간되었다. 그 사이 초반 독자들의 반응을 체크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나.
정유정 : 내 생각과 독자가 다다르는 지점 사이에 갭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는 플롯이라든가 여러 부분에서 다양한 실험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스럽게 끝낼 수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자주 듣고 싶다.
프레시안 :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소재를 택한 이유가 구제역 때문에 돼지를 몰살하는 장면을 뉴스에서 본 다음부터였다고 들었다. 조류독감부터 시작해서 구제역, 광우병에 이르기까지 동물로부터 전염되는 미지의 위험에 대한 공포가 점점 커져간다는 상황이 이 소설 속에 잘 포착된 듯하다.
정유정 : 내게는 그 뉴스 동영상의 쇼크가 메가톤급이었다. 처참한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다 본 다음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인간이 이러다가 처벌받을 거다, 동물이 화를 당하면 인간도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공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뉴스 댓글을 보니까 더 잔인했다. '한갓' 가축이니까 그렇게들 말하는 거겠지만, 동물을 도구화하는 시선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본질적인 가치,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종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지는 걸까? 만일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이 아니라 집 안에서 키우는 개를 소재로 한다면 좀 충격을 받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그 동영상에서, 방역복을 입은 채 돼지 생매장 장면을 몰래 촬영하던 여성이 울면서 "어떡해, 어떡해" 하고 발을 구르는 장면을 다시 봤다. 잔인한 댓글을 다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독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하지만, 동시에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헌신을 보여주는 존엄한 인간이 있다는 것. <28>에서 수의사 서재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이 그 때문이었다.
프레시안 : 서재형은 정말 사랑스러운 주인공이었다.(웃음) <7년의 밤>의 서원이 성장하면 재형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정유정 :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인물이지.(웃음) 내가 그런 타입을 좋아한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에서도 그렇고, 강한 것보단 좀 혼자서 꿍얼꿍얼거리는 섬세한 타입을 좋아한다.
프레시안 : 이 작품이 영화화된다고 상상했을 때, 사실 가장 멋있어 보일 역은 119 구조대원 한기준이다. 어떤 면에선 악역에 가깝기도 한데, 그만큼 움직임과 감정의 진폭이 크니까.
정유정 : 기준은 안타고니스트가 되어야 맞긴 한데, 주인공으로는 좀 애매하다. 조연이라기엔 또 너무 크고. 사실 <28>을 쓰면서 내 마음 속의 투톱은 개 링고와 재형이었다.(웃음) 늦게야 만났는데 서로 가까워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형성했다가 끝내 자기 식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 <7년의 밤>(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정유정 : 남편이랑 닮았냐고?(웃음) 남편 직업이 119 구조요원인지라 그 질문 많이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격 빼곤 안 닮았다. 우리 남편은 순둥이다. 기준이의 실제 모델은 내 막내 동생이다. 다 쓰고 나서 동생한테 읽혀봤더니 기준에게 굉장히 호감을 갖더라고. 딱 그럴 줄 알았지.(웃음)
프레시안 : 개 링고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직업들을 신중하게 선택했을 텐데, 일단 그 직업들을 고르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분명 군인이나 경찰이 들어갈 거라 상상했는데, 수진의 군인 동생 현진은 문자 메시지나 사진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 등장하지 않는다.
정유정 : 중요한 건 공권력이 아니라 사람들 자신이다. 그들을 구원하고 돌보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까. 군인이 화양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입장을 전달하는 건 별 의미 없게 느껴졌다. 경찰 역시 아무리 공포에 질린 희생자들 속에 함께 섞여 있어도 자기 임무가 있지 않나. 5.18 항쟁 때에도 경찰들은 결국 시위대를 제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뒤로 멀찍이 빼고, 마치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처럼 살인범 동해한테 집착하는 조연으로만 등장시켰다.
사람들한테 가장 많이 도움을 베풀고 자기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직업군을 고르다보니, 지금의 주인공들이 결정됐다. 의사가 등장하면 너무 학술적인 대사를 써야 해서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지니까 간호사 수진이 등장했다. 수의사 서재형은 말할 것도 없고, 기록자로서 기자 윤주가 필요했고, 동해 같은 경우는 내 소설 속에 항상 등장하는 악동이랄까…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이다. 타고난 기질도 분명 있겠지만 부모가 그렇게 내몰아간 면도 있다. 부모가 원하는 유형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하는 폭력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 자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골치 아픈 부분을 끄집어내냐고 자주 물어보던데, 난 아버지와 아들, 혹은 아버지와 딸의 구도를 좋아한다. 어머니와 딸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가 없다. 폭력의 차원이 되게 자잘하니까. 말싸움, 기싸움 쪽으로 자주 흘러가니까. 아버지가 등장해야 폭력 자체에 독자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힘이 들어간다.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낡은 이론이라고들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연산군도 아버지를 너무 미워한 나머지 아버지가 아끼는 노루를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잖아.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외부로 폭력적으로 발현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동해가 바로 그 인물이다. 일종의 방아쇠 역할이다. 누군가는 동해가 맥거핀이라고 하던데, 난 동해가 사방을 쏘다니며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죽어줘야 하는 인물이긴 한데, 죽기 전까지 많은 일을 시키고 싶었다.(웃음)
프레시안 : 주인공의 수가 전작들에 비해 많이 늘어나서 어려웠던 점이라면.
▲ <28>의 정유정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7년의 밤>보다 한 발 나갔다는 반응이다. 그 말을 들으면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지난 번 작품보다 낫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일정한 수준의 소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목표가 2년에 한번은 장편소설을 꼬박꼬박 내는 거다. 그 때문에 운동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웃음) 산을 넘고 호랑이랑 싸워야 하는데, 내가 힘이 없으면 산을 넘기가 싫어진다. 빙 돌아가고 뒤돌아 가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맥이 빠지는데. <28> 쓰면서 꾸준히 운동하고 푹 자면서 힘내서 썼다. 장편소설은 노동이다. 엉덩이 노동. 체력이 정말 중요하다.
프레시안 : <28>이 결말로 향해 달려갈수록, 진행 방향은 독자의 예상을 죄다 엇나간다.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결정해두었나.
정유정 : 처음부터 행로는 다 정해놓았다. 어떤 인물은 예수가 못 박혀 죽은 것처럼 타인을 위해 비참하게 희생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줘야 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말해줄 인물들도 정해져 있었고, 쓰면서 가장 괴로웠던 인물은 수진이다. 소설을 쓰면서 못된 짓을 할 때 좀 쾌감을 느끼는 편인데, 수진 같은 경우는 쓰면서 계속 울었다.
수진의 개인사는 나의 개인사이기도 하다. 99퍼센트가 일치한다. 그래서 더 거리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전쟁이나 재난 시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하는데, 그걸 수진이가 맡아줘야 했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챕터는 그날 쓰고 읽고 수정하고 다음 파트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수진의 챕터는 쓰고 나면 하루 내내 잠만 잤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기력이 소진됐다. 수진의 파괴된 머릿속을 쓰는 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링고 같은 경우는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사랑 얘기를 본격적으로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링고와 스타를 통해 실현했다.(웃음) 윤주와 재형은 왜 그렇게 안 되던지, 무척 많이 고쳤는데 원하는 대로 안 된 것 같다. 대신 링고와 스타에게 심혈을 기울였다.(웃음)
프레시안 : 안 그래도 <28> 읽으면서 링고와 스타의 사랑이 훨씬 더 인상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웃음) 혹시 링고와 스타라는 이름은 비틀즈로부터 따온 게 맞는지?
정유정 : 맞다. 남들은 이해 못하는데, 난 링고 스타를 제일 좋아했다.(웃음)
프레시안 : 링고를 늑대개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링고와 스타로부터 <시튼 동물기>(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의 늑대 왕 로보와 블랑카를 떠올렸는데.
정유정 : 사실 약간 갈등이 있었다. 내가 채식주의자였다면 동물의 입장을 더 당당하게 확실히 옹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이고 동물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육식을 한다. 그 부분에 있어서 좀 당황스러웠고, 내 입장을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청어람미디어 |
<28>에서 갈 수 있는 지점은 거기까지였다. 동물은 인간과 같은 하나의 생명체고 자기 삶의 주체다, 제발 쉽게 생각하지 말자. 딱 거기까지. 고기를 먹으면서도 동물에게 감사하고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게 안 되니까 수백만 돼지들을 파묻었던 것 아닐까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마크 롤랜즈의 <동물의 역습>(윤영삼 옮김, 달팽이 펴냄)과 <철학자와 늑대>(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도 인상 깊게 읽었다.
늑대와 개에 관한 행동심리학 관련 책들에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 늑대와 개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단지 자연과 문명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늑대의 세계는 역학적 세계고 개의 세계는 마법의 세계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문을 열고 나가는 걸 보여주면, 늑대는 단번에 문 여는 걸 따라한다. 하지만 개는 사람을 쳐다본다. '당신이 와서 열어'라는 뜻이다. 인간이 개를 길들여오면서, 개에게 인간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개는 그 세계를 떠나면 생존력 자체에 결손이 생겨버린다. 그러나 늑대는 기본적으로 야생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조직과 사회를 구축하는 데 능하다. 문제 해결의 핵심이 뭔지 안다는 거다. 개는 인간을 이용하는 능력을, 늑대는 직접 행위라는 능력을 갖고 있다. <28>에서 링고의 마음 속 목소리가 바로 그런 직접 행위의 능력이자 자아의 목소리다. 또 늑대는 배우자 하나와 평생을 사는 순정파기도 하다.
그런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링고를 늑대개로 설정했다. 늑대 중에 가장 큰 종이 팀버 울프고, 링고는 그의 후예다. 원래 그 종은 투견과 경비견으로만 사용된다고 하더라. 그렇게 늑대의 야성과 개의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캐릭터를 일단 만들고 나니, 링고가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아서 스타를 사랑하고, 알아서 서열1위의 수컷으로서 위엄을 보여주면서 살아갔다. 나는 링고를 굉장히 사랑했다.
프레시안 : 또다른 개인 스타와 쿠키 같은 경우는 어떻게 캐릭터를 구축했나.
▲ <철학자와 늑대>(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 ⓒ추수밭 |
프레시안 : 제목 <28>은 어떻게 지었나.
정유정 :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화양28'이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 살지 않다보니 잘 몰랐는데, 화양리라는 동네가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약간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었고, 결국 '28'로만 가는 게 강렬할 것 같았다. 또 중요한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사건 발생한 지 딱 28일째였기 때문에 내용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프레시안 : 예전 <7년의 밤>을 쓸 때는 안개 낀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밤마다 산길을 걸었다는 얘길 했던 기억이 난다. <28> 같은 경우는 사실 살면서 한번 마주칠까 말까 한 파괴적인 상황의 연속이 이어진다. 핍진성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성격상 이것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을 텐데 어떤 식으로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정유정 : 일단 화재 장면을 위해서는 소방관, 불, 방화범이 나오는 영화들과 책을 열심히 찾아봤고 소방대원들을 직접 취재했다. 진압팀이 불을 끄기 이전에, 인명을 구조하는 119 구조대원이 제일 선봉에 서서 불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 사람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해 어떻게 일을 하는지 하나하나 배웠다. 취재할 거, 공부할 거가 이번처럼 방대했던 적이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공부하고 취재한 다음 그 수많은 자료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바이러스 부분도 그렇다. 에이즈 같은 경우도 4년 만에 겨우 병원균의 정체가 밝혀졌지만, 균 자체가 바이러스인지 박테리아인지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무척 많다. 이 소설에서처럼, 딱 28일 동안에는 역학 조사든 뭐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막판에 짠, 하고 백신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서울대 우희종 교수님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빨간 눈'에 대해 일일이 컨펌을 받았다. <28>에서 설정한 인수공통전염병 '빨간 눈'은 일종의 이볼라 같은 출혈열이다. 균이 눈으로 날아 들어가기 때문에 혈관이 다 파괴되어 피가 흐르고, 그게 몸 안으로까지 들어가 폐에 출혈을 일으킨다.
어떤 면에선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더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스처럼, 환자가 사라지면 백신을 개발할 필요도 없이 그냥 묻혀버리니까. 처음에 썼던 원고에선 '빨간 눈'의 역학관계를 죄다 설명하다보니, 어떤 사람들이 이 병에 감수성이 있어 감염되지 않았나 등의 모든 설정을 하나하나 다 밝히려니 원고 절반 가량에서 전부 바이러스 얘기만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이야기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쪽을 확장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야 했다. 이건 설정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애써 만들었던 바이러스의 디테일을, 아무것도 안 밝혀진 상태에서 통째로 버렸다.
프레시안 : 예전에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게 훨씬 힘들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래서 <7년의 밤>에서 서원의 엄마 은주를 그릴 때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고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엔 주요 여성 인물이 윤주, 수진, 승아까지 세 명인데.
정유정 : 수진에게는 내 개인사를, 윤주에게는 내 성격을 불어넣었다. 전에는 캐릭터에 작가의 성격을 집어넣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먹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쓰다 보니 이야기가 솔솔 풀렸다. 남편이 읽고 나서 윤주가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고 뭐라 하던데, 내 성격이 그렇다.(웃음) 이젠 여성 캐릭터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관계없이, 자신감이 붙었다. 비로소 여주인공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시안 : 전작들에서 늘 수난을 겪는 소녀 캐릭터가 등장했는데 <28>의 승아는 그 연장선상이면서도 훨씬 더 비참한 고통을 겪는다.
정유정 :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초고에선 승아의 운명이 달랐지만, 결국 지금처럼 바뀌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재난의 상황에선 어린 아이와 여성이 가장 힘든 상황에 처하니까, 그걸 현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수진과 승아였다.
▲ <28>의 정유정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도시가 폐쇄되고 비상 상태에 놓인다는 설정 때문에, 가상의 도시 화양은 광주의 5.18 항쟁을 연상시킨다. 사실 그동안 광주의 기록을 논픽션으로만 접했기 때문에, 광주항쟁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놓지 않고서도 광주를 에둘러 이야기하는 픽션을 접한 것이 어떤 면에선 놀라웠다.
정유정 : 근대사의 가장 큰 상처는 광주다. 아직까지 암매장된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고, 실종자로만 남아있는 이름들도 많으며, 사망자 수치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15살 때 광주항쟁을 겪었기 때문에, 부분부분 상황을 안다. 도청 앞 상황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광주 도로에 차들이 죽 서있었고,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폭행하던 풍경 말이다.
도시를 통제하려면 당연히 계엄군이 들어오게 된다. <28>을 쓰면서 광주의 모습이 필요했다. 5.18 자료집에서 군대가 움직이는 경로라든가 명령 계통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어떻게 도시를 장악하는지를, 특히 5월 17일부터 마지막 진압을 끝내고 물러가는 날까지의 기록을 유심히 봤다. 그리고 시민들 역시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반응하고 평화 행진을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28>의 화양을 축조해간 거다. 5.18의 향기가 날 수밖에 없다.
그때 광주에선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계엄군과 충돌할 때만 총소리가 났지, 시민들 자체는 고요했다. 자기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아주머니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학생들을 위해서 김밥이랑 주먹밥을 싸서 시청 앞으로 부지런히 날랐을 따름이다. <28>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는 모습에서 그 점을 알리고 싶었다. 반드시 어떤 특정 대상을 상징한다고 못 박을 순 없지만, 전체를 설계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된 게 5.18 항쟁인 건 맞다. 정치적 의미를 덮어쓰는 게 무서워서 쓰고 싶은 걸 못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정치소설은 아니지만, 상당부문 참조를 한 건 인정한다.
프레시안 : 군부대와 시민의 충돌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 부분에선 어느 정도 모호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대신, 핵심은 개 링고와 인간들의 싸움으로 집중된다.
정유정 : 메인 플롯은 아파트 위의 싸움으로 집중시켰다. 사람들이 기관총으로 몰살당하는 풍경을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독자들은 상상할 수 있다. 역사의 비극은 오랜 세월이 흘러야 밝혀진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힘 있는 사람들은 불리한 사실을 명시하지 않고, 그 외의 사람들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니까.
예전에 한센씨병을 앓는 이들이 소록도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뉴스로 접했을 때 가슴 아팠다. 그런데 댓글들은 "그럼 저런 문둥이들을 격리해야지 어떡할 거야"라며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는 욕설투성이였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이 사람들이 희생을 하며 한스러운 삶을 산 건데, 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어야 맞지 않을까. 인터넷에만 들어가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배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인 눈감기가 그런 식으로 거칠게 표현되는 것 같다. <28>에서도 화양이 봉쇄됐을 때 바깥 사람들의 90퍼센트가 찬성한다고 설정했다. 화양을 봉쇄하는 데 찬성한 죄책감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거다.
프레시안 : 기존 작품들을 '영화적'이라고 표현할 때마다 오히려 작가 본인은 영화를 거의 보지도 않는데, 라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28>을 읽으면서, 이번엔 아예 작정하고 글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끝장을 보려는 듯한 결기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정유정 :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다.(웃음) 그게 나의 강점이니까, 강화시키는 게 맞다. 내 강점을 억누르면서 문단 윗분들이 요구하는 걸 쓸 생각은 없다.
가장 중요한 건 <28>에 어울린 톤을 결정하는 것이다. <7년의 밤>과는 다른, 이 소설에 어울리는 톤을 찾아야 했다. 인물이 훨씬 많아졌지만, 밀도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꽉 채울 자신이 있었고, 대신 속도 조절에 더 힘을 기울였다. 여러 인물이 왔다갔다 움직이지만 독자들의 마음이 산만해질 틈 없이 막 밀고 나가자, 그런 속도전을 전략으로 삼았다. 행동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읽다보면 다 알 수 있는데 굳이 내면을 설명해줘야 하냐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독자가 한번 책장을 펼치면 못 일어날 만큼 사건, 상황, 속도전에 중점을 뒀다.
▲ <인간 없는 세상>(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랜덤하우스코리아 |
정유정 : 인간을 멸종시키는 건 결국 인간일 거라고 생각한다.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이한중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에 나오는 것처럼, 쓸쓸하고 황폐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쏘아올린 라디오 전파만 돌아다니는 그런 풍경이 인상 깊었다. <28>을 쓰면서 <인간 없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고,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 받았던 황폐한 풍경들을 자주 떠올렸다.
프레시안 : 그 연장선상에서 '불볕'이라는 뜻의 화양이라는 도시명과, 소설 속에서 내내 되풀이 묘사되는 미칠 것 같은 추위의 강렬한 대비도 인상적이었다.
정유정 : 여름의 뙤약볕에 풀이 말라붙는 것처럼, '붉은 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생명이 일제히 사그라드는 풍경, 그럼에도 죽지 않은 생명과 위대하면서도 냉혹한 자연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바이러스는 겨울이 제 철이다. 박테리아가 여름에 창궐한다면, 겨울은 바이러스다. 봄이 되면 바이러스가 저절로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다. 소설 에필로그의 배경도 그래서 봄이다.
프레시안 : 차기작을 벌써 얘기하는 건 이르겠지만, 사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구상 중이라는 인터뷰를 읽었는데.
정유정 : 그건 좀 과장된 소식이고, 아직 뭐가 될 진 모르겠다. 다음 작품은 1인칭 시점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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