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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모델'을 넘어, 성리학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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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모델'을 넘어, 성리학을 구하라!

[이렇게 읽었다] 이승환의 <횡설과 수설>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철학자는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쉬운 답이다. 우리는 한국은행 천원 권에서 퇴계 이황의 얼굴을, 오천원 권에서는 율곡 이이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약 40년 동안 한국은행권의 모델이었다. 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큰 힘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화폐 개혁을 하지 않는 한, 이들은 앞으로도 수십 년은 한국은행권 화폐모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이처럼 철학자가, 그것도 두 명이 동시에 대단히 오랜 시간 화폐모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는 우리가 세계에서 유일한 것 같다. 철학 전공자들에게 익숙한 다른 철학자 가운데 이런 대접을 받는 인물은 없다. 예를 들어, 존 로크는 파운드화 모델로 채택된 적이 없는 것 같다. 칸트는 전후 서독의 5마르크 동전 모델로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고, 데카르트는 공교롭게도 비씨 정부가 발행한 100프랑 지폐의 모델이었다.(나치의 패망과 함께 이 권의 효력도 물론 사라졌다.) 그리스의 옛 화폐 드라크마 화에도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나왔던 적이 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모델로 쓰이지는 않았다. 유로화 지폐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유럽 중앙은행의 방침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 유럽 철학자들이 지폐에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경우 화폐에 인물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나 업적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신화적 인물이 된 김구가 10만원 권의 인물로 지정된 것을 봐도 그렇다. 결국, 비록 약간의 볼멘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퇴계와 율곡에게는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다른 인물에 비해 더 기억할만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이들이 함께 기억되는 이유는, 성리학 이론의 양대 산맥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퇴계는 이론적 업적이 그의 삶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부분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그동안 나는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말하기 힘들었다. 이 점에서도 이들은 익숙한 서양 철학자들과 다르다. 로크, 데카르트, 칸트의 이론은 확실히 지금도 살아있는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연구는 인류의 학문이 걸어온 길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인류가 지닌 최선의 이론을 만드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지폐에서 매일같이 보는 이 두 철학자는 그들의 이론적 행보를 명쾌하게 정리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론이 정말로 현재 인류가 지닌 최선의 이론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이승환의 <횡설과 수설>(휴머니스트 펴냄)은 이런 의심에 답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지폐에서 수 십 년간 사람들에게 얼굴을 선보였지만, 그 이론적 행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던 성리학자들의 이론 체계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그 다음 그는 이렇게 재구성된 체계가 인류가 현재 지닌 최선의 이론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조선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활동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기

▲ <횡설과 수설>(이승환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우리는 역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읽는다. 그것은 철학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의 잡다한 사료를 취합하여 특정한 구조로 배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한다면, 다시 말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역사 기술을 목표로 한다면 이 구조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 기술은 서로 충돌할 수도 있는 두 목표를 모두 만족시켜야만 하는 과제인 셈이다.

이 과제를 만족스럽게 수행하려면, 재구성의 틀이 되는 구조를 역사 속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또한 동시에, 이 구조는 역사를 일군 행위자들이 실제로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를 최대한 포착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두 조건을 만족해야만 역사 기술이 내놓은 재구성은 합리적일 수 있다.

<횡설과 수설>은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승환은 퇴계와 고봉의 논쟁 이래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도 진행되었던 성리 논쟁 속에서, 논쟁 전반을 재구성할 수 있는 틀을 분리해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이 틀을 논쟁 참여자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틀은 "횡설(橫說)", "수설(竪說)", "발설(發說)"이다. 이들 틀은 모두 쌍 개념을 어떤 효과를 주기 위해 배열하는 방식의 이름이다. 횡설은 쌍 개념을 서로 수평 관계에 놓고 대비하는 방식인데, 서로 대립하는 쌍 개념을 대비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수설은 쌍 개념을 서로 수직 관계에 놓고 대비하는 방식으로, 쌍 개념 가운데 무엇이 토대적이고 무엇이 그 위에 있는 것인지 보여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발설은 쌍 개념의 한쪽은 어떤 행위자가 성향이나 속성으로서 보유한 부분으로, 다른 한 쪽은 그 성향이나 속성이 실현된 부분으로 보는 방식으로, 쌍 개념 가운데 무엇이 실제로 실현된 사건이고 그 사건의 근거가 되는 배후의 성향인지 보이는 데 효과가 좋다.

이승환에 따르면 이 틀 속에 성리 논쟁을 불러온 이유가 숨어 있었다. 성리 논쟁의 핵심은 '리'와 '기'라는 쌍 개념의 관계로 적절한 것이 무엇이냐는 데 있었다. 그리고 퇴계는 리와 기의 관계를 횡설로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퇴계가 리와 기는 인간이 지닌 성향 가운데 각각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이하 도덕 성향)과 기초적 욕구를 추구하는 성향(이하 욕구 성향)에 대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두 성향은 서로 잠재적으로 대립하며, 특히 욕구 성향은 도덕 성향을 제압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도덕적 완성을 위해서는 욕구 성향을 잘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퇴계가 말하고 싶어 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쌍 개념이 서로 수평으로 배열되어야 한다고 보는 횡설을 채택하면 명쾌하게 드러날 수 있다.

율곡은 리와 기 쌍 개념의 내용을 다르게 보고 있다. 리는 일종의 원리에 해당하며, 기는 그 원리가 실려 있는 재료에 해당한다. 이승환은 율곡이 염두에 두는 리와 기의 관계가 지난 80년대부터 분석철학계의 핵심 논의 대상이 된 승반(乘伴, supervenience) 관계라고 주장한다. 이 관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승반자는 승반기초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말해, 승반기초 없이는 승반자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악기가 없다면 곡은 실현될 수 없다.
2) 승반자는 특정한 승반기초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승반자는 다양한 종류의 승반기초를 통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곡이라고 해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악기를 통해 연주할 수 있다.
3) 승반기초가 변화하면, 승반자 역시 변화한다. 예를 들어 악기의 조율 상태가 달라진다면 연주의 음색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리는 여기서 승반자에 해당하고, 기는 승반기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관계를 드러내려면 쌍 개념을 서로 수직으로 배열하는 수설이 적절하다.

이렇게 정리하면, 왜 퇴계와 율곡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지, 그리고 상대 유형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에 대해 밝힐 수 있다. 퇴계는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밝히기 위해서, 인간의 성향은 서로 독립적인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주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율곡은 도덕 실천의 원리가 인간과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따라서 원리는 재료에 실려 있다는 승반 관계를 강조해야만 했다. 이들은 자신이 보여주려는 내용을 상대가 사용하는 틀과 설명으로는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틀은 성리 논쟁 전반을 재구성하는 데 지금까지 사용된 틀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지금까지 있었던 조선 성리학에 대한 재구성 가운데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1) 당파 싸움의 일환이었다는 설명을 통해서는, 18세기에 노론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호락 논쟁"을 해명할 수 없다. 때로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운 학인들끼리도 대립하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양측이 서로 다른 틀 속에서 리·기 개념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혼동으로 해명하는 것이 단순한 파벌 싸움으로 보는 것 보다 좋다.
2) 조선 유학이 주기론과 주리론의 대립이었다는 다카하시 도오루의 분류는 횡설과 수설의 대립이었다는 견해보다 조악하다. 어떠한 성리학자라고 해도 리에 대한 강조 없이 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할 수는 없다. 특히 "주기론"은 조선조 당시에는 일종의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에도 주기/주리 분류를 사용한다면, 이는 역사 속의 논쟁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3) 이승환의 해명은 다산의 해명보다 더 상세하다. 다산은 퇴계의 입장은 인간의 도덕에 주목하는 특수한 설명(專論)이며, 율곡의 입장은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에 대한 보편적 설명(總論)이었다고 평하고, 이런 목적과 맥락의 차이 덕분에 두 철학자의 리·기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지적을 행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퇴계와 율곡이 강조하는 내용이 각각 수설과 횡설이라는 상이한 틀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승환은 퇴계(및 그 상대 고봉)와 율곡(및 그 상대 우계) 이외에도, 수많은 조선 유학의 행위자들이 각각 수설이나 횡설을 채택하여 리와 기의 관계를 서술했다는 것을 충분한 증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의 재구성은 역사의 중요한 부분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합리적 재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재구성은, 마치 근대 철학을 합리론과 경험론의 두 축으로 분류하는 칸트의 재구성이 이후의 어떤 근대 철학사에서든 염두에 둔 틀이 된 것처럼, 한국 성리학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 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설명 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조선 성리학 논쟁은 횡설과 수설의 대결이었다는 이승환의 설명을 넘지 못한다면 그 설명은 학계가 현재 도달해 있는 상태와는 동떨어진 입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메타 사회이론에 대한 야심, 그리고 약간의 취약점

이승환의 야심은 물론 철학사의 재구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재구성을 통해 드러난 대립을 해소하는 한편, 이런 식으로 개량된 틀은 다른 종류의 이론들이 미처 제시하지 못했던 시사점을 사회 이론에 제공해 준다는 야심찬 주장까지 하고 있다.

앞서 퇴계는 횡설을 통해 리와 기가 수평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그림을 보여준 반면, 율곡은 리는 기에 올라 타 있다는 그림을 보여주었다는 이승환의 재구성을 살펴본 바 있다. 그는 두 틀을 어렵지 않게 짜 맞춘다. 퇴계가 보여주는 두 성향의 대치 국면을, 율곡이 생각하는 승반 기초에 올려놓기만 하면 두 틀을 짜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답을 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389쪽에 등장하는 논변을 아래에 옮기도록 하겠다.

(통합 논변)
전제 1) 인간의 성향 D는 도덕 성향인 리와 욕구 성향인 기로 나눌 수 있다.
전제 2) 특정 조건 C가 만족되면, 성향 D는 그와 연결된 사건 E로 승반기초인 기*에 실려 실현된다.
보조전제 1) 욕구 성향과 승반 기초는 서로 다른 개념임에도 그동안 동일한 단어 氣를 통해 지시되었다. 따라서 양자는 기와 기*로 구분해야 한다.
보조전제 2) 성향 D 가운데 도덕 성향은 사단 및 도심道心이라는 사건과, 욕구 성향은 칠정 및 인심人心이라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결론) 성향 D는, 승반기초인 기*에 실려 실현되며, 이 가운데 도덕 성향은 사단 및 도심으로, 욕구 성향은 칠정 및 인심으로 실현된다.


이 종합적 틀을 통해, 율곡과 퇴계의 입장을 모두 반영한 개량된 틀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승환의 견해다. 그리고 이 개량은 일종의 메타 사회이론의 위상을 성리학에게 부여하기 위한 시도로 이어진다. 8장 3절과 9장 5절이 바로 그런 시도이다.

8장 3절에서 그는 19세기 말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라는 구호를 통해 널리 알려진, 동아시아 3국의 문명·개화 담론의 구조는 각각 수설, 발설, 수설의 틀로 분석하면 더 명쾌하게 이해,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는 "화혼양재"를 "화혼"에 상무 정신·용맹 ·단합 정신을, "양재"에 무기나 기술을 대응시키는 한편, 양재 위에 화혼이 승반하는 수설로 분석한다. 그런데, 승반 토대의 내용과 승반자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은 상당히 잘 어울리는 승반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도 군사적 팽창주의로 흐르기 쉬운 방향으로 말이다. 반면 "중체서용"이 주장하는 체용(성향과 그 실현) 관계는 부적절한 것이다. "중체" 즉 유교적 덕목이라는 성향으로부터 "서용" 즉 서구의 물질문명이 실현될 것이라는 주장은 허황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또, "동도서기"가 말하는, 도의 기에 대한 지배 관계 역시 부적절하다. "동도" 즉 유교적 덕목이라는 원리가 곧 "서기" 즉 서구의 물질문명과 제도라는 재료를 지배한다는 생각 역시 믿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승환이 도입한 횡설·수설·발설이라는 틀은 19세기 말 문명·개화 담론을 재구성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될 수 있고, 상당한 설명력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명개화 담론 분석 속에서는 개량된 틀이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개량된 틀은 9장 5절에서 사용된다. 여기서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보와 보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을 횡설과 수설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립은 개량된 틀을 통해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횡설은 진보·보수 공히 이상주의가 대립되는 두 유형의 가치를 배열하는 데 사용하는 틀이다. 한쪽 유형의 가치(예를 들어 분배 정의)와 다른 유형의 가치(예를 들어 토건 사업)는 서로 이분법적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 유형의 가치가 다른 유형의 가치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전자가 후자를 통제해야 한다. 이런 그림은 퇴계의 횡설이 보여주는, 성향 이원론의 그림과 유사하다.

반면 수설은 진보·보수 현실주의가 채택한 틀이다. 승반기초 자리에는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위치해 있다. 반면 승반자 자리에는 그에 비하면 상부구조인 법률이나 기타 제도적 장치, 도덕 등이 위치해 있다. 살펴본 대로 승반자는 승반기초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또 승반기초가 변화하면 같이 변화하기 때문에, 승반기초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 또는 승반기초에서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이 수설을 채택한 현실주의자들이 주력하는 목표다.

이승환은 진보와 보수가 모두 횡설 또는 수설을 채택하여 가치를 배열하고, 사회를 서술·평가해 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단순히 횡설이나 수설의 틀만으로 사회 문제를 적절하게 서술·평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보 이상주의가 택한 횡설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가 어떤 승반기초에 올라 타 있는지 주목하기 힘든 틀이다. 승반기초를 무시하는 주장이 실질적인 효력을 지닌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반면 보수 현실주의가 택한 수설은 자신이 지키려는 하부 구조의 안정성을 오히려 도덕적 가치와 같은 상부 구조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본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상황인 셈이다. 양자의 이와 같은 단점을 극복하려면, 개량된 '종합적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승환의 생각이다. 종합적 틀을 활용하여 진보와 보수의 생각을 다시 구획하면, <표 1>처럼 될 것이다.

▲ 표1

이런 시도는, 성리학이 제공하는 틀이 사회에 대한 진보·보수 담론을 재구성하여 배열하는 틀로서, 즉 메타 사회이론으로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가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도 속에는 오늘날 한국 철학계에서 통용되는 주장보다 성리학의 가치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다. 성리학은 도덕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대상에 대비했을 때, 도덕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다는 것이 한국 철학계의 통념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승환은 성리학에서 도출한 수설이 진보 이상주의에게 승반기초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데에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도덕적 이상론자에게 성리학은 이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이 왜 중요한지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틀을 제공하는 메타 이론이기도 하다. 이렇게 성리학은 통념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범위에서 작동하는 이론이라는 것을 보였으므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듯하다.

물론 이승환의 입장이 무결할 리는 없다. 약간의 의문점에 대해 질문을 몇 가지 적어두어, 향후 발전에 약간의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물리주의와 "승재론" : 이승환은 supervenience를 기존 번역어 "수반" 대신 "승반"으로 번역했다. 이는 "수반"이라는 한국어 낱말이 승반자가 승반기초로 환원·제거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또 특히 19세기 말에 유행한, 승반자인 리에 따라 승반 기초인 기도 변화한다는 주장(승재론)의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없는 번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분석철학의 맥락에서 수반 이론은 이른바 물리주의를 비물리적 존재자들에게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수반 이론은 마음과 같은 비물리적 존재자나 규범 역시 물리적 존재자에 의존하고, 물리적 존재자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마음이 물리적인 몸과 동일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승재론의 경우 존재론적으로 우선적인 것이 오히려 승반자다. 따라서 승재론을 옹호하는 성리학자는 물리주의와는 정 반대의 방식으로 수반 이론을 사용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수반 이론은 분석철학의 맥락과 성리학의 맥락에서 서로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수설'이라는 틀만 공유하고 있지, 완전히 다른 의도를 가진 이론 체계로 보인다. 화해하기 힘든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비교 평가할 것인지는 미완의 과제로 보인다.

-프레임과 다의어 : 내가 '틀'이라고 불렀던 것은 <횡설과 수설> 본문에서 사용된 표현대로면 모두 "프레임"이었다. 이는 물론 현대 언어학의 성과(국내에도 잘 알려진 저자인 마크 존슨과 조지 레이코프의 작업이다)가 성리 논쟁을 해명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주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쌍 개념들을 잘 구획된 서랍 속에 체계적으로 분류해 집어넣는 작업 방식(바로 이렇게 "프레임"이 실현된다)의 대립으로 성리 논쟁을 요약한 것은 분명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리 논쟁을 이런 방식으로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리학자들이 리·기를 자연종(natural kinds)으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자연종이란 "물"이나 "인간"처럼 우리의 개념 체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인 유형이다. 하나의 자연종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여러 기술구는 모두 하나의 자연종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에 대해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전기분해가 가능하다", "용매다" 와 같은 무수히 많은 기술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모두 물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기술구로 볼 수 있다. 결국 성리학자들은 리와 기가 보여주는 다의성을 하나의 자연종에 대한 여러 기술구라고 간주하고, 이런 다양한 기술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진정한 리와 기를 찾아 헤맸던 것일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인간이 추론을 할 때, 자연종과 그 본질을 문화와 무관하게 사용한다는 주장 역시 탄탄한 심리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어, Susan A. Gelman, The Essential Chil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그렇다면 성리 논쟁을 진정한 리와 기를 찾아 헤맨 과정으로 재구성하는 방법 또한 일종의 프레임 전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만큼이나 유력한 재구성 후보인 셈이다. 물론 단순한 이론 속에서 상정되었던 자연종이 좀 더 발전된 이론 속에서 사라지고 다른 종으로 대체되는 장면은 과학사 속에 흔하다. 그렇다면 이런 재구성 방식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기'는 적어도 승반 기초로서의 '기'와 승반자로서의 '기'라는 이질적인 종으로 이뤄져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적은 재구성 방법론에 대한 의구심이지 <횡설과 수설>의 결론에 대한 의구심은 아니다.

왜 하필이면 조선 성리학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 할까?

이제 책의 논의에서 벗어나, 이승환이 이 책을 통해 영향을 끼치려고 했던 맥락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책은 한국 철학 연구 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퇴계 공정", 그리고 그와 유사한 시도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퇴계 공정 또는 그와 유사한 시도란, 다음 경향을 말한다. 상당수의 한국 성리학 연구자들이 퇴계는 리의 능동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주자가 이루지 못한 독창적인 사상적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남명 조식의 사상이 상당히 정교한 형태로 전개되어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승환은 이 두 시도 모두에 대해 상당히 강력한 비판을 가한다. 퇴계가 리의 능동성을 주장했다는 견해는 퇴계 본인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 품었던 생각과 다르다. 또 조선조 당시의 논의 가운데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입장은 주자가 육성으로 말하던 언어인 백화 문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주자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또한 남명의 문집에는 문헌학적으로 의심스러운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정교한 사상적 작업의 근거로 여겨졌던 부분은 남명의 저술이 아님에도 문집 편집자(남명의 후손이다)에 의해 문집에 포함된 문헌이었다. 다시 말해, 남명 조식의 정교한 사상의 근거가 되었던 문헌은 위작이었던 셈이다. 결국 "퇴계 공정"이 보여주려고 했던 퇴계의 독창성이나, 남명의 정교한 사상은 적법한 문헌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승환의 지적이다.

물론 연구자들을 이런 방향으로 이끈 동기 속에는, 그 가치를 곱씹어 볼 부분이 분명히 들어 있다. 이승환이 지적했듯이, 연구자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퇴계를 통해 정당화하기 위해, 또는 퇴계의 업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 중요할 것이다) 퇴계가 리의 능동성을 주장했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면 말이다. 여기서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민족주의적 동기에 대해 약간의 말을 더 해 보도록 하겠다.

앞서 지적했듯이 퇴계는 수 십년간 1천원 권 모델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에게서 독창성을 찾고 그의 논의가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는 데 지금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은 그만큼 민족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어떤 생각이 자신의 조상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따위는 사실 그 생각이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 어떤 생각은, 독창성을 가져야, 그리고 그 생각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인류의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때문에 민족주의적 열정은 객관성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이승환의 연구는 한국 성리학 연구자 사회에 대한 호소인 셈이다. 그 호소의 내용은 '객관성의 통제' 하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을 더 넓혀보자. 당신이 외국의 출판사나 유학갈 곳을 물색하는 외국의 젊은 철학도라고 가정해 보라. 다시 말해, 외국의 논의를 통해 상업적 이익을 올리거나, 외국에서 낯선 논의를 연구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논의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행위자라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한국인이 품은 민족주의적 열정은 당신의 결정에는 거의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논의가 가진 객관적 가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 이승환은 한국 성리학에서 획득한 틀을 메타 사회이론으로 만들어, 사회 현상을 재구성하는 데 설명력이 있음을 보이려고 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 성리학 연구가 외국의 출판사나 유학갈 곳을 물색하는 외국의 젊은 철학도에게도 보여줄 것이 있다는 일종의 과시에 가깝다. 그리고 이 과시는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노력 위에 서 있다. 덕분에 이런 시도는 지폐에 퇴계나 율곡의 얼굴을 싣는 식으로, 민족적 감정에 호소해 성리학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보다 외국인들에게 높이 평가될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조선 성리학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중대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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