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백성의 지혜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만들었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지혜가 많기 때문이니, 지혜로 다스리려고 하면 나라의 적이 된다."
노자야 백성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정치가들이 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겠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괴기해도 너무 괴기하다. 이런 유사한 시각은 노자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서양 철학은 그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극찬을 받는 플라톤 역시 철인 정치를 주창한 바 있고, 니체는 초인을 말했다. 세 가지 사상의 공통점은 역사를 관통하며 크게 왜곡된 모습으로 발현했다는 것이다.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치스는 대놓고 우민화 정책을 추진하며 역사를 비틀었다. 제3세계의 독재 정권들은 시민들이 우매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한다. 그런 와중에 일군의 파시즘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평화로웠던 시대도 마찬가지다. 철인 정치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조선 정조의 경우에도 백성들은 어디까지나 '어엿븐'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국가의 운명은 자신의 개혁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통신 시설이 발달한 지금도 이러한 시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더 교묘해진 듯한 느낌인데, 아무래도 민중들은 더 이상 우매하지도 않고 감시하는 눈도 많기 때문일 테다. 때문에 그들이 내놓는 변명은 매양 '전문성'과 '안보'다. 모두가 다 똑똑한 시대라서 그냥 그렇다는 말은 안 통하니 그들은 전문가라는 이유로 더 고급스럽게 포장하거나 아니면 전문가의 입장과 분석이라는 그럴듯한 변주를 하고 있다. 또 조금만 우리가 더 알아가려고 하면 국가 안보니 기업 기밀이라느니 혹은 '종북이냐' 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민중들은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 대해선 의견을 피력하고 같이 논의하는 게 불가능하다. 정보가 없고 창구는 막혀 있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때문이다. 올해 안에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을 결정해서 발표해야 하는데 그 결정 과정이 흉악하다.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은 산업자원통상부의 수많은 계획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국내 에너지, 기후 변화 정책을 포괄적으로 조정하는 위상을 가진다는 점에서 쉬이 볼 수 없다.
게다가 에너지 정책은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 정책과 고용 문제, 물가 상승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사실상 국가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최상위 계획 중 하나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계획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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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예상하신 바와 같이 '그들끼리' 결정한다. 산업계나 시민 사회의 의견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국가 에너지 계획 중 정부가 내놓은 초안이 거의 바뀐 적이 없고, 그 초안을 일개 국책 연구 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거의 도맡다시피 해서 수립한다.
그래도 이번엔 조금 달라졌나보다. 완성된 계획을 배포하기 이전에 주제별로 워킹 그룹을 만들어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만들었다. 덕분에 시민 사회 인사도 일정 정도 포진했다. 예전에도 그런 프로세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 전 발표된 전력 계획에서 핵 발전 비중이 빠졌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걸 감안한 처사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제점은 변한 게 없다.
자칭 '워킹 그룹'이라고 부르는 분과 중 하나인 원전 분과를 보자. 언급한 바와 같이 전력 계획에서 핵 발전 비중이 빠졌는데 이는 이해관계가 첨예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난하고 치열한 논의가 있어야 할 텐데, 전체 16명 중 핵 발전에 반대하고 있는 시민 사회 인사는 2명에 불과하다. 위원장을 포함해 나머지는 소위 전문가 그룹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은 핵 발전에 찬성하거나 현실론을 들이대며 핵 발전을 필요악쯤으로 여기는 비판적 지지자들이다. 일반인 중 상당한 세를 형성하고 있는 탈핵은 논의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분명히 정부가, 혹은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제시했던 핵 발전 비중이 에너지 공급 측면에서 봤을 때 타당한지 아닌지 논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공염불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핵 발전을 포함해 에너지는 국민 전체에게 영향을 끼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결정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의제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회의 안건지와 녹취록이라도 공개해야 하건만 모두가 비공개다. 이유는 같다. 국가의 정책이고 보안이 필요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또 말은 안 해도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합리적인 의견을 내기 어렵다는 인식도 작용했을 테다. 그건 전문가주의의 함정이다.
물론 국내 에너지 수요를 예측하는 복잡한 수식도 필요하고, 안정적으로 수급을 관리하는 적정 비율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핵 발전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탈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논의는 건너뛰고 그럼 얼마나 비중을 둬야 할까 논의하는 건 주객이 전도됐다.
핵 발전에 관해 근본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핵 발전 지역 주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송전탑 때문에 생업을 때려치운 촌로의 목소리도 필요하고, 에너지 소비자인 도시인들의 의견도 청취해야 한다. 재생 가능 에너지 산업이나 화력 발전에 종사하는 사람도, 에너지를 잘 모르는 학생들도 의견을 내야한다.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조그마한 회의실에 모여 전문가라는 이유로 모두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면 최소한 회의를 공개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후쿠시마 사고 후 2022년까지 모든 핵발전소 폐기를 결정했던 독일은 핵 발전에 관한 사회적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핵발전윤리위원회-핵발전안전위원회가 아니고-의 회의 과정을 생방송으로 방영하면서 즉석에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정부가 조금 더 민주적인 결정 방식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전문가 회의를 통해 결정된 초안을 내놓은 다음 사회 주체들에게 의견을 묻지 말고, 사회 주체들에게 의견을 물은 후 세부적인 내용을 전문가들이 다듬는 과정을 수용해야 한다. 그들이 향유하는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국가의 정책은 톱다운(top down) 방식이 아니라 보톰업(bottom up)방식이어야 한다.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에 참여하는 시민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가당치도 않은 철인 정치를 하시겠다고 나선 저들과 구체적인 수치를 두고 일대 결전을 준비하는 게 필요한 게 아니다. 전문적이지 못하다느니, 현실을 모른다느니 하는 구태의연한 비판을 입에 물고 사는 저들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탈핵을 원한다면 정부와의 대화도 필요하지만 어렵게 형성된 탈핵의 열망을 한 곳에 모으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또다시 되풀이되는 저들만의 잘못된 결정 과정을 부수는 게 더 중요하다. 회의에 참석하시라. 그리고 안건지와 녹취록을 포함해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그 결정은 이곳이 아닌 국민들이 하자고 제안하시라. 그걸 거부한다면 거기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 정작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들이 저들에 의해 거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전문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 사회가 먼저 핵 발전을 주제로 한 시민 합의 회의를 열 것을 제안한다. 모든 정보를 주고 직접 이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이야말로 디테일이라는 함정 속에서 어서 오라 손짓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보내는 합리적 대답이 되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정한다는 기본권을 지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우리, 합의 회의 하자.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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