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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의 멘토'로 세계를 호령하자!

[동아시아를 묻다] 동방 사상과 지구 이론

포스트 민주주의

아시아학회(AAS) 마지막 편이다. '중국 사상과 지구 이론'이라는 회의가 있었다. 중국 사상으로 세계를 재건해 보자는 취지이다. 담대하고 도전적인 발상이다. 장소도 가장 너른 곳이었다. 그런데도 빈자리가 없었다. 비단 '중국의 부상' 때문만도 아니다. 참가자들이 공유하는 더 큰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쇠락'이었다.

그리스의 아테네부터 미국의 워싱턴까지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여실하다는 것이다. 선거는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심판에 그치기 일쑤다. 의회가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한 지도 이미 오래다. 막대한 재정 적자, 편협한 파당 정치, 결단력 부족 등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졌다.

혹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실패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가 인류의 마지막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의 종언'을 자부한다는 점에서 양쪽은 퍽이나 닮았다. 자연과 진화를 거스르는 신학적 사고가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어느덧 공산주의만큼이나 경직된 도그마가 되었다. 다른 정치에 대한 상상력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갱신과 혁신에도 무디고, 더디다.

반면 중국은 공산주의 탈피와 더불어 실용주의를 회복했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말했다. 현 체제를 완성형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 높고 더 나은 수준의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이다. 백년지대계의 발상이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제도 실험이 전개 중이다. 민주주의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1인 1표의 선거제가 정착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중국 왕조의 평균 수명이 250년이었다. 과연 2150년에도 민주주의가 지속되고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무릇 제도는 짧고, 역사는 길다. 수천 년의 한 토막이 아니라고 장담하기 힘들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지속했던가.

즉 민주 대 독재라는 잣대를 버렸다. 작은 정부, 큰 정부의 논쟁도 치웠다. 목표는 단순명쾌하다. '유능한 정부'의 건설이다. 민주주의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많은 방법과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변화와 혁신에 열려 있다. 민주주의 이후를 고민하는 이들로 회의장이 북적였던 까닭이다.

실력주의(Meritocracy)

▲ 공자. ⓒwikipedia.org
헌데 이 회의가 주목한 것은 오늘의 중국 사상이 아니다. 신좌파도, 자유주의도 거론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2500년 전,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였다. 고대 사상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근대(성)의 문제를 가장 먼저 이론적, 실천적으로 고민했다고 자리매김했다. 춘추전국이야말로 유럽의 근대 이행기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이행을 추동했던 것은 철기 보급과 농업 혁명이다. 이는 유럽의 상업/산업혁명과 유사한 효과를 낳았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정치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인구가 늘고, 사회 연결망이 넓어졌다. 문화와 가치관은 다양해졌다. 피라미드식 사회 구조는 해체되었다. 그래서 사회를 통합하는 새로운 기제가 필요했다. 봉건 지배층을 대신할 신진 엘리트의 양성도 필요했다. 나아가 국제 관계도 고민했다. 사생결단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안을 궁리했다. 국가 경영과 국제 평화에 대한 사유가 만개한 것이다.

이는 유럽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고민과 유사하다. 방책 또한 흡사했다. 양쪽 모두 교육을 강조했다. 학습을 통해 뛰어난 자를 지배층으로 만들고자 했다. 신분제의 타파이다. 즉 권력의 원천은 더 이상 천명이나 천주, 혹은 핏줄에 있지 않다. 학습과 실력에서 비롯한다. 공자가 '최초의 교사'로 추앙받는 까닭이다. 맹자가 만든 기관도 '학교(學校)'이다. 실제로 최근의 지구사(global history)는 제자백가의 사상이 유럽 계몽주의에 미친 영향을 밝히고 있다. 몽골 세계 제국의 문류(文流)망을 통하여 이슬람 문명권을 거쳐 유라시아 최서단까지 확산되어 간 것이다. 즉 중세의 기사들이 칼 대신 펜을 들게 되는 근대화란 '몽골의 충격'의 산물이다. 무사가 선비가 되어가는 중국의 과정을 뒤따른 것이다. 마침내 유럽에서도 귀족이 아니라 지식 관료가 통치하는 근대 국가가 느지막하게 출현했다.

그럼에도 차이는 있었다. 유럽의 좌파와 우파는 국가를 '필요악'으로 여겼다. 자유주의는 야경 국가를 지향했고, 공산주의는 최종적 해체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반(反)국가주의는 오늘날 서구의 신좌파와 신자유주의에도 계승된다. 반면 중국에서 패권을 쥔 유가들은 달랐다. 국가를 선의 원천, 도덕의 보루로 삼고자 했다. 즉 도가적 낭만주의 혹은 근본주의를 사절했다. 철저한 현실주의였다. 개인이 은거할 수는 있다. 그래도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가와 통치자를 도덕적으로 규율하는 것이 지상의 길이다. 그리고 두 번의 천년, 지배 사상으로 군림했다.

국가의 경영 방식도 달랐다. 정치 참여를 제한했다. 모두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해도, 도달하는 수준은 각자 다르다. 인간은 본성으로 유사하되, 습성으로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교육 참여는 평등하되, 정치 참여는 차등적이어야 한다. 사회적 유동성과 개방성은 보장하되, 위계를 통한 안정도 추구했다. 그리하여 도입된 제도가 과거(科擧)이다. 과거 응시의 문은 누구에나 열려 있다. 다만 그 문턱을 넘는 자만이 정치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귀천이 갈리는 신분제도 아니고, 18세만 지나면 누구나(=아무나) 주권자가 되는 민주제도 아니다. 철저한 실력주의(meritocracy)이다.

이는 작금의 중국 공산당의 운영 방식과도 통한다. 당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되, 그 실력 여부에 따라 자격은 엄격히 제한된다. 승진 또한 성적순이다. 여전히 선거(election)보다는 과거(selection)에 가깝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 10년, 20년의 장기적 전망 하에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 과연 진화한 실력주의가 정체된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갑론을박, 논쟁은 뜨거웠다.

World Wide Web : 一卽多 多卽一

중국과 유럽은 국가의 구성 원리도 다르다. 유럽의 국민 국가는 대저 민족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중국은 문화가 관건이다. 화이(華夷)의 구별은 민족적, 인종적인 것이 아니다. 화(華)에는 생물학적 속성이 전혀 없다. 문화의 성숙 여부가 요체이다. 그래서 공자도 맹자도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다. '군신유의(君臣有義)'야말로 맺고 끊을 수 있는 '사회 계약'의 정수이다. 왕이 말을 듣지 않거나 뜻이 통하지 않으면, 미련 없이 그 나라를 떠났다.

조선이 '소중화'를 자부했던 것도 비슷하다. 조선 민족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북방의 여진족도 남방의 왜족도 과거에 합격하면 지도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그 비율이 가장 높았을 때는 조정의 4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즉 화/이는 고정불변의 딱지가 아니다. 문화를 익힌다면 오랑캐도 '조선 중화'의 일원이 되는 열린 개념이다. 그래서 조선 또한 '민족 국가'가 아니라 '문명 국가'였다. 동아시아가 유별났던 것도 아니다. 이슬람의 지식 계층도 국가에 구애받지 않았다. 무굴 제국의 관료가 오스만 제국의 관료가 될 수 있었다. 모두가 이슬람 율법을 습득한 무슬림 세계의 형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그야말로 최신의 발명품이다.

따라서 근대의 대분기(great divergence)란 이중적이었다. 서구(west)와 나머지(rest)가 나뉘었고, 그 내부는 또 국가별로 쪼개졌다. 산업 혁명이 대분기를 가속화시켰다면, 정보 혁명은 '대융합(great convergence)'을 촉발하고 있다. 유럽부터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고 있고, 나머지 지역도 문명을 단위로 한 정치체가 등장하고 있다. 규모부터 문명 국가(civilization-state)인 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약여하고, 남미의 '좌향좌' 또한 이념적 틀로만 접근할 일이 아니다. 안데스 전통과 토착 문화가 결부된 문명 공동체의 복원이다.

아랍 혁명 이후의 이슬람 국가 모델 또한 '서구화'가 아닐 것이다. 터키와 인도네시아 등 세속적 이슬람 정치에 가까울 법하다. 즉 지구촌은 재차 인류사의 대부분의 시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양한 문명이 공존하던 항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역사의 종언'도, '문명의 충돌'도 그릇된 전망이었다.

더불어 거대 도시의 출현도 역력하다. 도시 국가에 방불한 대도시들이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해간다. 도시 간 네트워크도 활발하다. 서울의 교류망은 광주나 제주보다 도쿄나 뉴욕, 런던과 더 긴밀할 수 있다. 인천은 상하이와 분주하고, 부산은 오사카와 밀접하며, 나진·선봉은 연변과 친밀하다. 그만큼 개별 도시는 지역적·지구적 네트워크 속에 자리한다. 그래서 국가 회동인 주요 20개국(G20, Group of 20) 정상 회의만큼이나 도시 연맹인 R20(Club of 20 Regions)도 괄목할 만하다. 21세기 판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방불한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정체성도 민족이나 국가로만 귀속되지 않는다. 누구와 어떤 네트워크를 맺느냐, 그 네트워크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독자적인 정체성이 생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중화 세계의 내부 원리와 흡사하다. 오래토록 중국에는 '중국인'이라는 집합적 의식이 희박했다. 생활 세계의 동향(同鄕) 네트워크, 동업(同業) 네트워크가 더 중요했다. 민간의 자유인들에게는 직업과 장소와 콴시(關係)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각종 회(會)와 계(契)가 유난히 발달한 까닭이다.

20세기 중국의 혁명가들은 국민성이 '모래알'이라며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나 21세기 실리콘 벨리로 상징되는 '네트워크 사회'야말로 중국식 민간 사회의 확대판이다. 종족과 민족의 구별이 느슨해지고, 국가의 경계도 유연해진다. 회와 계의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얽히고 엮이는 지구촌(world wide web)은 나날이 '천하'(天下)에 근접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200여개의 영토와 영주로 토막 난 20세기야말로 '전 지구적 봉건 시대'였다는 역설! '중국 사상과 지구 이론'이 주목한 또 하나의 화두였다.

미래학

아쉬움이 컸다. 방대한 주제와 열띤 논쟁을 담기에 두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아울러 한국 지식인들이 눈에 띄지 않은 점도 석연치 않았다. 분단 체제론, 환태평양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중국학계 일색이었다. 실은 '중국 사상'이라는 단어부터 마땅치가 않았다. 제자백가가 중국만의 사상일까? 고대 그리스 사상을 오늘의 그리스로만 귀속시킬 수 있을까?

제자백가는 명명백백 동아시아의 공공재이다. 삼봉도, 퇴계도, 율곡도, 다산도, 혜강도 제자백가를 깊이 배우고 익혔다. 그 소중한 자산을 '중국 사상'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명적 뿌리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패착이고 당착이다. 그래서 '중국 사상'으로 지구 질서를 재건하자는 야심찬 회의에도 좀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새삼 강조컨대 중화 질서도 중화 사상도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을 보라. 자그만치 '순임금의 신하(舜臣)'이다. 그의 형은 또 요신이었다. '요임금의 신하(堯臣)'라는 뜻이다. 이는 사대주의의 발로일까? 아니다. 요순으로 상징되는 태평성세에 복무하겠다는 보편 문명에 대한 공속감의 표현이다. 내 민족, 내 나라만의 유아독존을 거두는 고결한 미덕의 발현이다.

세계 시민의 '글로벌 윤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충무공은 조선을 지켜낸 군사 영웅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의 가치를 수호한 문화 영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운운하며 세련된 폼을 취할 것도 없다. 동방 사상은 진즉에 천하위공을 앞세우며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를 지향했다. 토박이의 동학(東學)이 부재하니, 뜨내기 수입상들이 판을 칠 따름이다.

동아시아학은 더 이상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21세기 지구 문명을 재건하는 평천하(平天下)의 방편이다. 고로 동아시아학은 미래학이다. 옛 것을 익혀 새 천하를 일구는 '실학'이다. 그러한 자각이 있어야 동방 문명을 독식하고 독점하려는 중국의 독선도 떳떳하고 꼿꼿하게 타박할 수 있다. 소국의 예로써 대국의 덕을 이끄는 것이다. 중국이 패도로 내달리지 못하도록 우리가 먼저 왕도를 내세워 압박하는 것이다.

부디 자기 소외와 '백년간의 고독'을 거두고, 잃어버린 사기(士氣)를 한껏 북돋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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