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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경찰의 최고 악몽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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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경찰의 최고 악몽은 바로…

[김용언의 '잠 도둑'] 에드 맥베인의 <살의의 쐐기><아이스>

한국에서 시리즈 장르물의 운명은 대부분 불운했다. 특히 처음부터 '몇 부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완간되는 소설은 그나마 덜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천천히 그 인물과 상황을 활용하고 변주하고 성장시키면서 독자가 그들과 함께 나이 먹고 그들을 친구처럼 여기게 되는 친숙한 운명에 이르는 시리즈물이 쉽게 발붙일 상황이 아니었다. 조급한 도서 시장은 그걸 기다려줄 인내심이 없었다. 어느 출판사가 어떤 작가의 '전작', 적어도 '시리즈'를 출간하겠다고 공언했다면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시리즈의 재미를 깨닫게 되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소수의 충성스런 팬보다는, 단 한 권의 완성된 재미만을 요구하는 다수의 독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에드 맥베인의 경찰 범죄소설 '87분서 시리즈'는 그런 의미에서, 스웨덴 범죄소설의 대부 격인 마이 셰발·페르 발뢰 부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국내에는 <웃는 경관>(양원달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단 한편이 소개됐다)와 더불어 가장 불운한 시리즈 중 하나다. '87분서 시리즈'는 1956년 처음 시리즈 1편 <경찰 혐오자>가 출간된 이래, 에드 맥베인이 사망한 2005년 출간된 마지막 작품 에 이르기까지 장편만 총 53권에 달한다.

이중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10여 권 가량이지만, 그나마도 대부분 절판 혹은 품절되었다.(나는 이 시리즈를 구하느라 헌책방을 이 잡듯 뒤졌지만, 간신히 <10 플러스 1>(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소녀와 야수>(홍영의 옮김, 문학관 펴냄), <살인자의 선택>(김선일 옮김, 수목출판사 펴냄)밖에 찾지 못했다.) 현재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은 <경찰 혐오자> 한 권뿐이었다. 적어도 2012년까지는 그랬다.

1월 벽두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87분서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두 권이 연달아 출간된다고 했다. <살의의 쐐기>(박진세 옮김, 피니스 아프리카에 펴냄), <아이스>(이동윤 옮김, 검은숲 펴냄)이 그 작품이었다.

먼저 <살의의 쐐기>는 잘 만든 단막극을 보는 듯한 촘촘한 짜임새와 긴장감이 일품이다. 10월 초 어느 화창한 가을날 하루 동안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서, 크게 두 가지의 사건이 평행으로 진행된다.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죽음의 화신'처럼 보이는 여자 버지니아가 38구경 총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을 든 채 87분서 경찰서 안에 들어온다. 떠들썩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형사들은 죄다 사무실에 갇힌 채,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러 왔다"는 그녀의 총구 앞에서 벗어날 계획을 제각기 세우기 시작한다.


▲ <살의의 쐐기>(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피니스아프리카에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카렐라는 '밀실 미스터리'처럼 보이는 돈 많은 노인의 시체 앞에서 반드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겠노라는 투지를 불태우며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은 채 죽음의 현장을 계속 맴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즉시 '죽음의 화신'에게 목숨을 잃게 될 카렐라는, 대신 노인이 죽은 대저택에서 또 다른 죽음의 위협 앞에 내던져진다. '죽음의 화신'의 분풀이 대상이 된 다른 87분서 형사들은 사무실에 갇힌 채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 형사들 모두에게 참으로 길고 대단한 하루로 기억된 이 날의 핵심은, 책 제목에 이미 노출되어 있다.

증오와 살의의 쐐기. 버지니아는 자신의 연인의 목숨을 앗아갔던(혹은 그렇다고 믿는) 스티브 카렐라에게 '목숨은 목숨으로'라는 아주 간단한 원시적 법칙을 적용시키며, 87분서 형사실에 쐐기처럼 자리 잡는다. 그녀는 자신의 살의를 아주 미세한 틈새로 끼워 넣으며,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범죄자와 동일시하지 않"는 공정성의 개념을 어렵게 터득한 87분서 형사들을 점차 증오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당길수록 더 효과적으로 단단히 잠기게 되는" 아주 단순한 도구 쐐기처럼, 원시적 형법의 원념에 휩싸인 버지니아는 모두에게 자신의 내부에 그런 힘이 숨어있는지도 몰랐던 엄청난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악' 그 자체다.

"나는 증오한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하여 이 형사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하찮은 미물로 만들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에게서 인간성을 강탈했고, 인간인 한 남자를 강탈하려 하고, 한 남자에게서 존엄성을 벗겨 내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모든 남자들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보통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짧고 경쾌한 장편인 반면, <아이스>는 다른 시리즈 세 편 정도를 합친 것만큼 길고 묵직하다. 그리고 그 길이만큼이나 <아이스>는 도덕성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을 여러 각도에서 던지며, 어떤 사건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87분서 형사들의 대다수를 깊은 절망에 빠뜨린다. 여기에도 유머는 있지만, 어두운 절망이 더 깊다.

금발머리 무용수, 삼류 건달 마약 판매상, 수상쩍게 돈이 많은 보석상이 누군가의 38구경 총구 앞에 차례로 죽어나간다. 또 다른 축으로는 코인 세탁소의 여자들을 위협해 팬티를 벗겨 내거나 밤늦게 귀가하는 간호사들만을 골라서 강간하는 비겁한 남자들이 있다. 여기서는 깜짝 놀랄 만한 범인의 정체보다도, 그 죄악 앞에 몸서리치는 형사들의 모종의 깨달음이 핵심이다.

여기서 맞닥뜨리는 범죄자들은 되풀이 "해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한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육체적 고통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타인의 갈망을 이용하여 웃돈을 벌어들이거나 코카인을 흡입하거나 자신의 성적 환상을 채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결국 형사들은 범인을 잡아들이기에 성공하지만, 사법 체계의 허점은 언제나 범인에게 보석을 허가한다.(그는 결국 처벌받지만 공적인 차원이 아닌 사적 복수에 의해서 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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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검은숲 펴냄). ⓒ검은숲

형사들은 회의에 빠져든다. 이 도시를 뒤덮은 강력한 추위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처럼, 형사들은 이처럼 만연한 부도덕 앞에 점점 마모되어 간다.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라고 혼잣말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다 잊은 듯 돌아서도, 그들에게 그 무력한 분노는 차가운 얼음처럼 일정한 상흔을 남긴다. 그들의 가장 큰 악몽은 끔찍한 살인 사건이 아니다. '완전한 불공정성'과 '완전한 비논리성' 앞에서 요지부동으로 갇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의 무력감이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범죄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경찰 범죄소설의 한 모범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매력적인 아마추어 탐정들이 득시글대던 20세기 초반을 벗어나, 실질적인 사회 정화 세력이자 법질서를 수호하는 실권자인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기기묘묘한 트릭을 몇 겹으로 구사하며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외치는 바보 같은 조력자(왓슨 씨, 미안합니다)의 탄성을 자아내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날 법한 살인사건을 끈기 있게 추적하는 과정을 아주 실감나게 구사했다는 뜻이다.

"경찰서란 커다란 조직체다. 그리고 형사는 조직의 한 단위일 뿐이다. 형사들은 매일 서로 출근해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한다.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규칙과 수속이 있고, 서류를 작성하고, 타이프를 치고, 전화를 걸고, 남의 집을 방문하고, 수사를 하고, 다른 서에 연락하고, 전문가와 의논도 한다. (…) 형사란 흡사 회계과장이나 다름없다. 오직 한 가지만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란 생각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회계과장도 혹독한 직업이지만 죽음과 직면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매일 죽음을 바라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10 플러스 1>)

게다가 단 한 명의 탐정 시리즈가 종국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여러 명의 경찰에게 다채로운 성격을 부여하면서 시리즈마다 주인공 경찰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작가 자신에게도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영리한 선택을 보여주기도 했다.

단언컨대 87분서 형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경찰이다. 이 중에서도 주연급 캐릭터는 물론 존재한다.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없이 스티브 카렐라 형사다. 옆으로 살짝 찢어진 눈 때문에 동양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탈리아 출신 '쾌남', 아름다운 아내 테디만을 사랑하는 순정파지만 일단 어딘가 찜찜한 낌새를 풍기는 사건 앞에서는 따뜻한 가정으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그 주위를 맴도는 타고난 형사.

카렐라 뒤쪽에서 줄지어 등장하는 87분서의 형사들은 매 작품을 펼칠 때마다 어느 시점에 등장하려나, 은근히 기다려질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농담을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성과 똑같은 이름을 갖게 된 형사 마이어 마이어는 "유대인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주변의 유대인을 두들겨 패기 위해 도발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면 성과 이름이 같은 마이어의 이름이 그 도발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걸 깨닫고 세상만사를 향한 참을성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순진하고 잘생긴 형사 버트 클링은 지지리도 여자 운이 없어서 매번 깊은 실의에 빠지곤 했다.

그 외에도 87분서로 새로 전근 올 당시 이 강력반에 편견과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빨리 카렐라를 존경하게 된 거구의 빨강머리 형사 코튼 허스,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파에 속한 사람"처럼 구는 고지식한 형사 리처드 제네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유도로 범인을 매다 꽂을 수 있는 왜소한 형사 핼 윌리스, 자신이 끓이는 (그러나 모든 형사들이 마시고 토할 만큼 맛없는) 커피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무직 경관 앨프 미스콜로, 흑인들이 무척 싫어하는 흑인 형사 아서 브라운, 자주 강간 사건의 '미끼'로 사용되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아름다운 형사 아일린 버크, 한번 열이 받으면 물불 안 가리고 성질을 부려대지만 자신이 거느린 형사들의 안위를 누구보다 아끼는 반장 피트 번스, 기타 등등.

시리즈의 어느 편이라도 아무 것이나 골라 펼쳐들 때 이전 작품의 주연급이던 형사가 여기선 스쳐가는 단역처럼 등장하면 괜히 섭섭해진다. 코난 도일이 홈즈를 절벽 위에서 '죽여 버리고'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에르퀼 푸아로를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현실 속 미디어들에 그들의 부고가 실리거나 분노한 독자들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울부짖었던 것처럼, 만약에 87분서 형사들 중 누군가가 불의의 사고로 죽기라도 한다면 진심으로 눈물이 흐를 것 같다.(정말 죄송한 얘기지만, 그러기 전에 에드 맥베인이 2005년에 돌아가신 것이 어떻게 보면 형사들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남겨두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곧 봄이 다가온다. 따끈따끈한 신간 <살의의 쐐기>와 <아이스>를 해치운 다음 '87분서 시리즈'를 좀더 알고 싶어졌다면, 발품을 팔아서 품절도서 <10 플러스 1>부터 읽으시길 권한다. 이 책의 시작이 딱 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봄에 죽는다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이건 법률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형법 56조. 봄의 사망. '누구를 막론하고 봄에 죽으려는 자, 또는 죽게 하는 자, 또는 죽음을 도모하는 자, 또는 죽음을 구원으로 간주하는 자는 그 죄가 무거우므로 마땅히….'> 이렇게 정해진 법률 말이다. 특히 3월 21일부터 6월 21일까지는 죽음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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