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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국정원' 요원, 미래의 대통령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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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직 '국정원' 요원, 미래의 대통령을 꿈꾼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 <내 이름은 욤비> 강연

자유 연상을 해보자. '난민' 다음에 무엇이 떠오르는가? 전쟁, 기아, 굶주린 아이들,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정도? 1차적으로는 당연한 이미지다. 실상 UN에서 '난민의지위에관한협약(난민협약)'을 1951년 채택했을 때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량으로 발생한 난민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로는 이와 같은 난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반영한 결과"였던 것이다. 우리의 인식 체계는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 전쟁 무렵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난민협약에서 규정한 난민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①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②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③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④국적국 밖에 있는 자"

<내 이름은 욤비>(박진숙·욤비 토나 지음, 이후 펴냄)에서는 난민이 "간단히 말해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자유를 제약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맞서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용감한 사람들'"이라 표현한다. 이 문장에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쯧쯧, 불쌍한 사람들, 하고 혀를 차고 말 게 아니었다. 난민이 실제적으로 고국에서 어떤 일을 겪은 사람들인지, 그들이 왜 낯선 이국에서 떠돌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바로 이들의 '용기'에 대해 눈뜨는 것이었다.

한국에는 현재 260명의 난민(2012년 기준)과 수천 명의 난민 신청자들이 거주한다.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욤비 토나에게 "왜 이렇게 먼 한국까지 온 거죠?"라고 물었을 때, 질문의 의도는 간단했다. 서구의 다른 국가들이 난민 문제에 훨씬 개방적이며 그 이슈가 잘 자리 잡았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욤비 토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한국은 난민협약에 가입한 국가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합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인들도 중국이나 미국, 그리고 유럽의 아주 머나먼 나라까지 피난 갔잖아요. 왜 가까운 중국에만 가지 않고 그렇게 멀리 갔을까요?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인 겁니다."

한국은 '이런 거' 잘 못하는 나라잖아, 라고 빈정거리고 말 게 아니었다. 난민들도 한국 말고 다른 나라 가는 게 나을 텐데, 하고 안타깝게만 여길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 엄연히 세계적 차원의 협약에 동의하고 가입한 국가다. 난민협약에 가입한 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다시피 했다는 것에 빈정거림의 면죄부를 주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한국은 권리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와 의무가 있는 나라다. 당연한 논리였다. <내 이름은 욤비>을 읽을수록, 욤비 토나의 말을 들을수록 그렇게 단순하고 단단한 편견은 하나씩 깨져 나갔다.

<내 이름은 욤비>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밀 요원 출신인 욤비 토나가 '반역자'가 되어 쫓기다 한국에 정착해 6년 만에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과정을 담은 책이다. 지난 2월 1일, 서울 중구의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서 열린 욤비 토나의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에 앞서 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에 대한 욤비 토나의 강연과, 뒤이은 관객과의 열띤 대화의 시간을 이 자리에 지상 중계한다. 통역은 <내 이름은 욤비>를 공저한 박진숙이 맡았다. <편집자>

▲ <내 이름은 욤비> 출간 기념 강연회. 왼쪽이 욤비 토나, 오른쪽이 박진숙. ⓒ프레시안(최형락)

▲ <내 이름은 욤비>(박진숙·욤비 토나 지음, 이후 펴냄). ⓒ이후
안녕하세요. 나는 욤비 토나입니다. 콩고에서 왔습니다.

콩고 사람이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놀라십니다. 콩고가 과연 어떤 나라길래 난민 신청까지 할 정도였냐고 자주 물어보세요.

쉽게 생각해봅시다. 북한도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지요. '민주주의'가 이름에 들어갑니다. 독재 국가의 특성 중 하나가 '민주주의'라고 자칭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민주주의도, 인민도 없는 국가가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거지요. 콩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던 콩고의 정식 명칭이 콩고민주주의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입니다.(웃음)

콩고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광물의 90퍼센트 정도가 콩고의 땅에 묻혀 있거든요. 그 자원을 탐내는 서구 강대국 때문에 오랜 분란을 겪었습니다. 서구의 강대국들은 제3세계에 큰 나라가 존재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작게 쪼개어 분쟁을 조장하죠.

예를 들어볼까요. 콩고 동부 쪽에는 우라늄 매장지가 있습니다. 미국은 벨기에와 협력하여 그 우라늄을 발굴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돈을 내고 샀어야 했는데, 지금까지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콩고에 아무 것도 주지 않았지요.

스마트폰을 많이들 쓰시죠? 스마트폰이나 랩탑, 닌텐도 같은 전자기기를 만들 때 콜탄(coltan)이라는 광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콜탄 역시 80퍼센트 이상이 콩고에 묻혀 있어요. 그래서 한국의 삼성을 비롯하여 제1세계 다국적 기업들이 콜탄을 채취하기 위해 콩고에 진출했습니다. 물론 그 회사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요. 하지만 이 얘기까지 이 자리에서 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콩고의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콩고민주공화국 비밀정보국(ANR)'에서 일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의 비밀요원이었던 거죠. 그러다 2002년 체포되었습니다. 복잡한 국내 정치를 둘러싸고 콩고 영토 일부를 르완다와 우간다에 분할해줄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고민 끝에 이 같은 추악한 거래 정보를 야당 민주사회진보연합(UDPS) 쪽에 넘겼습니다.

나는 '국가 기밀 유출' 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정보국 안팎의 친구들이 힘을 합쳐 저를 몰래 빼내주었고 해외 도피까지 도와주었습니다. 체포된 직후부터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급하게 중국행 비행기를 탔고 우연한 기회에 한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한국 사람들을 처음 봤고, 한국어도 처음 들었지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고, 1994년에는 출입국관리법 아래 난민 관련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난민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야, 한국에서 처음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2001년에야 나왔으며 신청 서류를 내놓고도 인터뷰 기회 한번 얻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난민 신청자에게 숙소부터 먼저 제공합니다.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 당신이 갖고 있는 G-1 비자로는 체류는 가능하지만 일을 하면 불법이니까 일하지 마라."

나는 그 상태로 6년을 지냈습니다. 일을 못하게 했지만, 돈이 없으면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기 때문에 불법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주로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 다음에는 NGO에서 일했고, 성공회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엘리트 교수나 변호사와도 만나보았습니다. 한국의 아주 낮은 계층부터 높은 계층까지 다 만나본 셈이죠. 그러면서 한국에서 보게 된 건 두 개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는 공장 사람들, 거친 동료들, 욕을 마구 하는 '사장님'입니다. 또 하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학생들과 활동가들입니다. 이 두 개의 이미지가 완전히 100퍼센트 상반돼요.(웃음)

▲ 욤비 토나. ⓒ프레시안(최형락)
공장 사장님들은 외국 노동자들을 자주 때립니다. 나도 많이 맞았어요. 가령 기계가 새로 들어오면 사장님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작동하면 돼"라고 대충 말로만 설명한 다음 직접 해보라고 합니다. 당연히 처음엔 잘 못 다루죠. 하지만 잘 몰라서 쩔쩔매거나 실수라도 할라치면 "너 머리 없냐?"하면서 마구 때립니다.

나도 맞기 싫으니까 "일 안 하겠다"라고 말해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날 밤 사장님이 맛있는 소고기국을 끓인 다음, 내가 짐 꾸리고 있을 때 그 국을 짐가방 위에 부어버린 적도 있어요. 그런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2007년 난민 지원 단체 '피난처'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피난처'를 운영하는 대표 이호택은 저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2003년에 처음 알게 된 이후 친형제처럼 나를 대해 줬어요. 나는 그를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공장을 전전하면서 고생하는 걸 늘 딱하게 생각했는데, 2007년에 "당신도 난민이니까 같은 난민을 돕는 일을 하면 우리보다 더 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겁니다.

난민 자격 심사 때문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인터뷰를 여러 번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난민 신청 인터뷰 시 통역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걸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설령 통역자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통역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도 너무 많아요. 그래서 인터뷰를 위해 영어를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콩고에서는 250여개 부족이 공존하는 다인종 국가인만큼 수많은 언어가 사용됩니다. 공용어로는 프랑스어를 쓰고, 각 부족마다 콩고어, 링갈라어, 스와힐리어, 키콩고어, 루바어 등을 따로 써요. 나도 프랑스어와 키수쿠어, 키콩고어, 링갈라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에선 소용없었어요.

영어를 처음부터 배우려니 단박에 잘 하진 못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낯선 단어 때문에 실수를 몇 번 범했는데 그게 문제가 됐었어요. "학교를 언제 마쳤냐?"는 질문에 graduate라는 단어가 들어가지요. 나는 이 영어 단어를 '그래듀아'라는 프랑스어로 이해했습니다. 콩고는 벨기에식 교육 제도를 사용하는데, 그래듀아는 3년제 컬리지 단계를 말해요. 난 그 3년 교육을 마친 시기를 묻는다고 생각하고 그 연도를 말했습니다.

다음번 인터뷰 때 또 다시 "학교를 언제 마쳤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땐, 그래듀아를 끝낸 다음 이후 학위 단계를 끝낸 시기까지 계산해서 완전히 졸업한 연도를 말했죠. 그랬더니 인터뷰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화를 내면서 "당신은 거짓말쟁이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를 무척 불신하고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고 문제가 커졌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궁금해서 여러 루트를 통해 알아봤더니 의사소통이 잘못됐던 거죠. 한국과 콩고의 제도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아요.

결국 난민 인정 신청이 불허됐어요. 난민으로 인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출입관리사무소 측은 콩고에서 겪은 일에 관련된 신문 자료라든가 정보국 기밀문서 등의 첨부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얻으려면 콩고 대사관에 문의해야 해요. 나처럼 반정부 활동 죄목으로 박해받은 사람 입장에서 콩고 대사관과 접촉한다는 건 살인 위협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콩고 쪽 자료를 모을 수가 없었어요.

이때 아브라함이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줬어요. 그는 아프리카 난민 현황을 조사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부러 콩고를 경유하는 코스를 택했습니다. 내가 콩고에서 겪었던 일들을 입증해줄 자료를 찾겠다는,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위험한 길을 택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내 동생과 가족들, 친구와 동료와 전부 접촉할 수 있었고, 나의 체포와 고문에 관련된 기록물들을 수집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 자료들을 첨부해 난민 이의 신청을 냈습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난민인정협회는 콩고의 신문 기사는 언제든 조작 가능하고 심문 기록이 공문서 형식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며 또다시 기각했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아브라함과 김종철 변호사 등 친구들이 나를 위해 변호인단을 꾸려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결국 승소했습니다. 나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외국인등록증과 의료보험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난민협약 하의 국가들에선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에게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도 동일한 지위를 부여해 가족 결합을 보장합니다. 나도 마침내 콩고에 있는 아내와 세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게 된 겁니다.

그 이후 나는 성공회대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 아시아 각국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아시아 내의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사실 등록금을 마련할 때마다 고민이 많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시 일자리였습니다. 막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총 다섯 명입니다. 먹고 살아야지요. 오랜 시간 끝에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일자리가 없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난민에 대해 잘 모르고, 내가 일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 욤비 토나. ⓒ프레시안(최형락)
지금은 부평 쪽에 있는 치과에서 일합니다. 치과 의사는 아니고요.(웃음) 글로벌 서비스라고 외국인 손님의 검진을 돕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외국인 손님들이 잘 안 와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무료 검진을 받는 것도 싫어합니다. 혹시라도 병에 걸린 걸 알면 더 무서우니까요. 병명을 알 순 있지만, 치료를 받을 수가 없잖아요. 너무 비싸서 그 돈을 낼 수 없는 거예요.

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주차 요원도 겸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부시맨 아니면 굶어죽는 아이들 그 두 가지 이미지만 떠오르지요. 아프리카 사람이 주차한다고 하니까 한국 손님들이 머뭇거리면서 흠집 내지 말라고, 아프리카 사람이 차를 몰 수 있냐고 묻기도 해요. 나 운전 잘 합니다. 콩고에서도 코란도를 몰았어요. 그곳에서 한국의 코란도 차가 인기 좋거든요.(웃음)

난민 중에서도 저 같은 남성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입니다. 여성 난민들의 상황은 한층 더 열악하고 심각해요. 남성들은 숙소가 없으면 PC방에서라도 그냥 잘 수 있잖아요. 하지만 여성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난민들 중에는 학력 높은 사람들이 많아요. 종교나 정치적 문제로 난민이 되었지만, 고국에선 엘리트였던 이들이죠. 하지만 한국에 와서 지금껏 맞닥뜨린 적 없는 상황에 처해 결국 성매매에 나서게 됩니다. 안산 등지에 가면 그런 업소가 굉장히 많아요. 그래도 지금 통역을 도와주시는 친구 박진숙 씨가 이주 여성을 위한 문화‧경제 공동체 '에코팜므'를 만들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한국에서 난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길 바랍니다. 난민이라는 단어에는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피난민이나 실향민이라는 단어는 낯익지요? 한국도 1960년대 이전에는 난민 대량 생산국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난민 신분으로 외국에 갔잖아요. 왜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요? 난민 하면 무조건 생소하게만 생각하거나, 우리와는 절대로 관계없는 단어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누구든 어떤 나라든 난민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작년 5월 일 때문에 캐나다에 갔다가 일본인 난민신청자를 만났습니다. 지진과 핵발전소 사고 때문에 난민 신청을 했어요. "우리나라는 안전하지 않거든요"라고 하더군요. 일본, 부유한 나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1950년대 한국인들이 난민이었고, 이번엔 콩고 사람이고, 다음번엔 일본 사람일 수 있는 겁니다. 난민 문제는 계속 발생해요. 그 점을 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 욤비 토나. ⓒ프레시안(최형락)

관객 :
욤비 씨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하시고 지혜로운 분 같습니다. 콩고로 돌아가시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박진숙 : 질문을 통역하기에 앞서 제가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릴게요. 2002년에 욤비 씨를 처음 알게 되고 맞이한 크리스마스 날이었어요. 욤비 씨도 참석했던 크리스마스 파티 자리에서 한 사람씩 소원을 말했지요. 욤비 씨가 뜬금 없이 콩고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막 웃었는데, 욤비 씨는 되게 진지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충분히 그 꿈처럼 될 수 있는 분이라고, 대통령이 아니라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욤비 : 저한테는 한국이 학교였어요. 난민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을 배우려고 합니다. 아직도 한국의 민주주의, 경제, 인권 등을 유심히 살피면서 나중에 콩고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지금 배운 것들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지 공부하는 학생이에요. 제가 어딜 가든지, 어떤 일이 주어지든지 거기서부터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관객 : 전 경기도 안산시에 살고 있습니다. 아까 욤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안산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요. 미등록 체류자도 있을 것이고 합법적인 체류자도 있겠지요. 외국인 노동자를 생각하면 머릿속으로는 항상 그분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적 어려움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막상 자주 마주치다보면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기분상 그랬어요. 하다못해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왜 저렇게 시끄러울까, 일이나 열심히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생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니 고민이 많습니다. 욤비 씨는 이런 편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욤비 : 한국 사회는 다문화사회에 접어들었지요. 전체 국민 중 2.5퍼센트가 외국인이랍니다. 다문화 이슈를 피할 수 없는 시점인데, 다문화 개념이 다문화가정과 겹쳐지면서 또 다른 편견을 낳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다문화가정이 한국에 적응하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한국인들도 외국인의 문화를 이해하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준비하는 다음 책은 아프리카 인과 한국인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가이드북입니다. 한국만 해도 그 안에 경상도와 전라도 등의 지역색이 있잖아요. 아프리카도 하나의 국가가 아닙니다. 거대한 대륙인데,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프리카에는 콩고, 나이지리아, 잠비아, 가나 등 다양한 국가들이 존재해요. 각각의 나라에는 다른 민족성이 있습니다. 그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을 쓰고 싶어요.

물론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관습을 이해하고 적응하려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인들도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처음 만나자마자 몇 살이야, 집은 어디야, 직장은 어디야, 이런 걸 너무 자세하게 물어보면 날 취조하는 건가 싶어 겁날 때가 있어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에선 그런 사적인 질문들은 좀 무례하게 여겨집니다.

관객 : 전 난민 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난민들 스스로가 자기 처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한 상황에서 그러기 힘들다는 것, 혹은 본국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더라고요. 여러 NGO가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상 많이 부족하고요. 난민들 사이의 직접적 네트워크나 커뮤니티도 열악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점에 대해 혹시 계획하시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욤비 : 난민들에게 그런 두려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밖으로 나가서 어떤 액션을 취했을 때 누군가 나를 강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그렇다고 해서 난민들에게 계속 시혜만 베풀어주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 평화로운 방식으로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리드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피난처'의 아브라함 대표와 함께 수많은 세미나와 캠페인, 심포지엄을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이 한국인이면서도 여러 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걸 지켜보면서, 어떻게 일하면 되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저도 여전히 두려워요. 하지만 혹시 나중에 콩고로 돌아갔을 때 살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민족의 영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웃음)

관객 : 저는 캐나다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외국인에 대한 개인적 편견을 극복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가정주부로서 아이들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욤비 씨 같은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궁금합니다.

욤비 : 한국에서는 난민 이슈가 이제 초기 단계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난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인 것 같습니다. 난민 하면 무조건 가난하고 뭔가 줘야 하는 사람, 이를테면 거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난민 캠페인에 나가면 "먹을 거 줄게"하고 접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음식을 받으면 당장 그날 하루야 살 수 있죠. 하지만 다음날은 또 굶습니다. 난민은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난민에게 뭔가 줘서 당장의 시급함을 해결하는 것보다 좀 더 본질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이끌어주는 쪽으로 인식이 전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각종 난민 단체들을 후원해주는 겁니다. 다들 재정이 어려워요. 가난해요!(웃음) 개인적 차원에서나 국가적 차원에서, 난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 단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관객 :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보니 가족과 떨어져 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욤비 씨도 무려 6년 동안 가족과 이별해야 했는데요.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셨나요.

욤비 : 첫 번째는 개인적 자질 같습니다. 콩고에 두고 온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지만, 제가 정보국 요원으로서 고통을 견디는 훈련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감정 조절을 비교적 잘하는 성격이기도 한 것 같고요.

두 번째로는 친구가 많아서입니다. 모든 난민이 저처럼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저는 운이 좋습니다. 여기 통역을 도와주는 박진숙 씨라든가, 박진숙 씨의 남편 김종철 변호사, '피난처'의 아브라함 등의 친구들을 만났잖아요. 이분들은 제가 난민 심사를 받거나 소송을 걸 때 제 옆에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내 이름은 욤비>를 읽고 이 강연 자리까지 와주신 점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5000명 정도의 난민 신청자가 존재합니다. 3, 4개의 NGO가 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그 NGO들을 도와주신다면, 혹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연결해보시면서 난민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관객 :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현황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욤비>를 읽으면서 난민 가족 자녀들의 정체성 문제도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기도 한데요. 욤비 씨는 콩고인이라는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근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자녀들이 너무 빠르게 한국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셨지요.

욤비 : 다문화가정의 아이들과 난민의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립니다. 하지만 20년 쯤 지나면 문제가 생길 거예요. 이 아이들이 고국의 문화를 잃어가며 한국에 익숙해질 거예요.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게다가 한국 문화는 상당히 공격적이죠. 분명 여기서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정부 차원에서 좋은 정책을 만들어 다문화가정과 난민의 아이들, 한국 아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해요.

한국인들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들을 외국인이라고만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구 어디에도 자신의 나라가 없다고 느끼게 될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정체성을 통합시켜야 해요.

지금 다문화가정 관련 정책들도 다문화가정 쪽에만 일방적으로 한국에 대해 가르치는 편입니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지에 대해 교육시키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봐요. 다문화가정에서도 가르치고, 한국인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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