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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가르치기 전에 억압부터 하는 교육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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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가르치기 전에 억압부터 하는 교육은 그만!

[이렇게 읽었다] 그레그 베일리의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과 신화가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이 지상에 있는 사람 수만큼, 그리고 부족과 종족, 또는 민족의 숫자만큼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이야기들 중에 착하고 선한 사람이 결국은 행복하게 잘 산다는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많은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착하고 선한 사람이 행복하지도 않고 잘 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보상받지 못하는 선함의 고통과 상처 때문에 권선징악은 더욱 절실한 인간의 바람으로 교육되고 문화화 된다.

그것은 꽤 많은 아동·청소년 책들이 한결 같은 도덕적 훈화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마치 저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문명화 과정'처럼 말이다. 칸트(Kant)가 <실천이성비판>(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에서 '왜 착한 사람이 행복할 수 없는가'라는 문제로 내내 고민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그 문제를 내 안에 있는 양심과 하늘에 있는 별을 일치시킴으로써 해결했다. 말하자면 양심은 무엇을 위한 양심이 아닌 '자명하게 스스로 빛나는 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나 성공을 위한 양심'이 아니라 '그냥 양심'이며 양심은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생각은 선과 악은 이미 뒤엉켜있기 때문에 현실의 역사는 '선악의 피안'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 또는 선과 악을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니체(Nietzsche)를 빌리지 않더라도 말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세상의 그토록 많은 신화나 전설 중에 유독 그리스 로마 신화만이 '튀게' 강조되며 읽히고, 그들과는 어떤 혈연적·지연적·시대적 관계도 없는 21세기 한반도에서조차 슈퍼 베스트셀러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세속적이며 가장 비윤리적이거나 윤리와 비윤리가 온통 뒤섞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명품들의 상표에도 그리스 로마 신들의 이름이 부적처럼 붙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피로회복제 '박카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로마 이름으로 편의점에까지 꽂혀있는 오래된 생필품이다. 단군 신화나 주몽 이야기 그리고 혁거세 이야기 같은 것들은 교과서에도 있고 시험에도 출제되고 가끔 TV 드라마로도 방송되지만, 에르메스 같은 명품이나 폭스바겐의 최고급 브랜드 파에톤, 그리고 비너스 같은 상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옛 신화는 오늘 우리의 삶과 가까이 있지 않다.

▲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그레그 베일리 외 지음, 원재훈 편역, 두리아이 펴냄). ⓒ두리아이

왜 그럴까.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옛 문화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 문화, 다시 말해 서구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지배력은 문화 자체의 보편적 우월성과 불균형한 힘의 폭력적 지배가 서로 삼투하여 얼크러져 생긴다. 우리의 삶이 후기 산업사회나 금융자본주의의 글로벌한 경쟁 위에 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서구의 문화와 힘의 지배를 우리가 내면적으로 수락하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외적으로라도 받아들인 것이다.

가끔 생태주의나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며 우리의 삶과 문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야기조차도 예컨대 니어링(Nearing)이나 푸코(Foucault)나 지젝(Zizek) 따위 미국과 서구의 철학자를 거치지 않으면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풍토이다. 진보진영에서 자주 언급되는 촘스키(Chomsky) 같은 학자도 변형생성문법의 언어학자로서가 아니라 미국 국적의, 미국 대학의 저명한 유대계 좌파학자이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뿌듯한 것도 우리가 좋아해서라기보다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화제가 되었기 때문은 혹시 아닐까. 언제나 미국시장을 이야기하면서 말해지는 현대차나 삼성 스마트폰처럼.

인류의 역사가 19세기 제국주의를 넘어섰다하지만 로마가 제국이듯 미국이 제국임은 니알 퍼거슨(Niall Ferguson)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적 전개는 무력감 속에 허덕이며 중화문화권의 변방에 있던 식민지 한반도를 끄집어내어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우리의 삶과 문화를 형성해 왔다. 한때 숨죽였던 친일파와 친미파의 득세와 함께 오늘날 새삼스레 강조되는 글로벌 경쟁력은 이 땅의 교육을 미국과 서구 유학을 마친 세력의 가방끈으로 강철처럼 이어놓았다.

그런데 언뜻 보아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많은 인문주의 책들은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와 도덕주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강조의 폐쇄성과 일관성은 그만큼 우리가 미국과 서구 중심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갇혀있다는 위기감의 반대급부적 표현이겠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오래전 루신(魯迅)이 '아Q'를 통해 말해주었듯 또 다른 정신적 폐쇄성과 문화적 위선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도덕주의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른 말이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와 도덕주의가 필요할수록 왜 세계가 약한 나라나 착한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도덕주의와는 관계없이 구성되어졌으며 전개되어 왔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뿐이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을 필요가 있는 세상은, 착한 사람이 복이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로마가 희랍의 후예임을 드러내면서 아무런 윤리의식도 없는 아프로디테(미와 욕정의 신, 로마 이름 비너스)를 왜 내세웠는지,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불륜 정부인 아레스(전쟁의 신, 로마 이름 마르스)를 왜 그토록 강조했는지를 다시 한 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림으로 그려진 유명한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밀애 장면의 배경은 대홍수 이래 살아남은 인류의 조상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피난처로 삼은 이상향, 아폴론 신의 파르나소스 동산이다. 착하고 못생기고 일만하는 대장간 신인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소리소리 지르는데도 들은 척도 안하고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는 사랑을 즐긴다. 그들 불륜 남녀 한 쌍의 사랑은 아폴론 신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아홉 뮤즈와 천마를 데리고 신들의 전령으로 나타난 헤르메스의 축복을 받고 있다.) 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인간의 윤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행태로 우주와 자연과 역사를 농단하고 있는지를 깊이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다시 한 번, 세상의 많은 신화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비윤리적인 세속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화는 없다. 오죽하면 영남대학교의 박홍규 교수가 <그리스 귀신 죽이기>(생각의나무 펴냄)같은 책을 냈을까. 물론 <그리스 귀신 죽이기>보다는 에로틱한 그림으로 그려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토마스 불핀치 지음, 서영 그림, 이광진 옮김, 가나출판사 펴냄)나 고(故) 이윤기 선생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웅진지식하우스 펴냄)가 당연히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였다. 특히 이윤기 선생은 젊은 시절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세계의 어떤 신화 책보다도 아주 매력적인 한글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당신의 목숨과 바꾸어 내놓았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서구 중심적 사유와 삶의 패턴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로 표현되는 세계관에 대한 본질적 비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이 필요한 만큼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깊은 이해 또한 절실한 것이다.

우연히 서점의 어린이 책 코너에서 화려한 장정으로 만난 눈에 띄는 책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그레그 베일리 외 지음 원재훈 편역, 두리아이 표냄)는 무엇보다 책 읽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유럽의 박물관 그림들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선 지도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림들의 설명과 글이 기존의 신화 책들과는 아주 달랐다.

물론 잘 짜인 이야기의 전개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책속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이해가 숨어있었다. 가령 '제우스' 편에서 오늘날 서양 국가의 국기들에 그려진 독수리가 그냥 독수리가 아닌 제우스의 독수리라는 사실, 그리고 기독교의 야훼 하느님을 라파엘로가 제우스로 그려냈다는 사실 말이다. 올림포스의 제우스를 본떴던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식,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을 제우스와 티탄의 싸움에 비유한 대목 등등 또한 눈에 띄었다.

'아프로디테' 편만 하더라도 자식 아프로디테가 아버지의 성기를 도려내어서 태어났음을 화려한 나체 그림과 함께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부자손 간의 싸움(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 즉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와 제우스가 저마다 서로서로 죽이고 쫓아내고 살아남기를 도모했다는 것)이 문명과 문명의 투쟁 또는 세대와 세대 간의 싸움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문적 사유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함께 몸과 감각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미술과 건축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오래된 인류의 문화적 유산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단순히 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명화와 역사적 자료를 함께 놓고 보는 것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오늘의 서구 문화의 두 원천이 그리스 로마 문명(헬레니즘)과 유대 기독교 신앙(헤브라이즘)이며, 특히 르네상스 이후 그림과 건축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그 인문적 교양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 김수영(金洙暎)은 ;욕망이여 입을 벌려라"라고 외쳤다. 김수영은 욕망을 억압하는 질서가 마치 의미 있는 자유인 것처럼 가르치는 숱한 도덕적 체계-법질서와 학교의 질서, 독재정권과 권력의 질서-에 대하여 욕망을 해방하는 질서가 진정한 자유임을 그리고 욕망을 억압하는 질서가 거짓임을 그의 시로 보여주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말은 오래된 거짓말이다. 삶에도 길이 없는데 어떻게 책에만 길이 있겠는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거나 책을 통해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숨은 이해관계가 표현되어 있는 거짓말 중에 하나이다.

그렇더라도 만약 책이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특별한 시대에 국한된 생각이 아니라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끝없이 반복되어 나타난 말이라면? 아마도 책이야말로 길은 보여주지 못할지라도, 압축적으로 우리들의 욕망을 성찰하고 우리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닐까. 설령 그것이 서구 중심주의의 음험한 폭력이 숨어있더라도 말이다.

문화의 성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욕망에 대해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자유를 허락한다.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욕망의 해방과 욕망의 교육은 서로 손을 잡고 인류를 성숙하게 만들며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왜 우리의 아동·청소년 책에는 욕망을 가르치기 전에 앞서 먼저 욕망을 억압하는 도덕적 설교가 넘칠까. 살아보기도 전에 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고 느끼기 전에 욕망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억지로 도덕적으로 살게 강요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 아이들이 책을 싫어한다면 이미 아이들이 경험하는 살벌한 경쟁과 입시 중심의 교육환경 그리고 혹독하게 삶을 나누는 경제적 편차 속에서 아이들이 느끼고 깨닫는 바와 책이 말해주는 세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다르다면 왜 다른지, 또 현실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어떤 욕망들이 만드는지, 정말 사람은 착한 존재인지, 만약 사람이 악하다면 악한 사람들끼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우리 책들은 도대체 설명을 안 해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선함이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절망하지 않는 것은 절망할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질긴 희망이 언제나 절망을 앞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연히 만난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는 특별한 느낌과 생각을 전해주었다.

이 책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상투적인 윤리주의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조금 어눌한 글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청소년들에게는 재미있고 쉽게 전달될 것 같다. 특히 쉽게 만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명화(유럽의 저명 박물관이나 귀족들의 대저택에 숨어 있는 가격을 말할 수 없는 작품들!)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예술사를 주도한 대표적 그림들로 많은 인문적 감수성과 미학적 유혹을 자극한다. 독서의 경제학이 주는 최고의 효과이다. '욕망의 만다라'를 보여주는 벌거벗은 근육질의 올림포스 신들은 욕망으로 뒤엉킨 삶과 역사의 구체성을 힘들이지 않고 느끼게 하여 독서의 소중한 기초 체험으로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작은 노력으로 서구 문명의 핵심을 한꺼번에 맛보게 하는 '특별히 잘 만들어진' 이 책 <그리스 로마 명화신화>는 어려운 출판 환경 때문에도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어른들이 보아도 무척 재미있을 듯싶다. 온 가족이 TV를 끄고 함께 모여 읽을 만한 책으로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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