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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아이덴티티>는 영 수준이 낮아서…"

[2012 '올해의 책'] 줄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만 감춰두고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졸저 <범죄 소설>(강 펴냄)을 처음 쓰던 당시,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동연 옮김, 이후 펴냄)에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내가 직접 또 다른 범죄 소설사를 써보겠다며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참고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에선 영영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실망하기 시작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영어권의 온갖 추리 소설 관련 논문을 프린트하고 거기 가장 많이 인용된 이론서들의 제목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여러 문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책의 제목이 바로 줄리언 시먼스의 'Bloody Murder', 즉 <블러디 머더>(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였다. 이 책을 마주친 건 그야말로 황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목격한 모세의 심정이었다.

<블러디 머더>의 장점은 아주 간단하다. 추리 소설의 백과사전이자 그 자체로 역사서이다. 그 서술 과정의 추이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은 풍부한 예시로 추리 소설 입문자의 애간장을 타오르게 하며, 저자의 명료하고 간결한 해설과 판단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비록 줄리언 시먼스 본인은 "이 책은 중독자의 책일 뿐, 학자의 책이 아니다. 열광과, 이따금 느낀 실망을 기록한 책이지, 카탈로그나 백과사전이 아니다"라고 덧붙였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블러디 머더>에서 엄청난 도움을 얻었고 <범죄 소설>에서도 소중하게 이 책을 언급했으나, 이 책의 존재를 결코 바깥에서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아주 오래 전 1970년대엔가 한번 조악하게 번역된 적이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그 이후로 이 책은 말하자면 '전설 속의 그대' 같은 존재였다. 책 표지마저 너덜너덜해진 낡은 원서지만, 이 책을 나만 갖고 있은 채 뭔가 잘난 척 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 때 두고두고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며 유용하게 써먹으리라 생각했다.

그 꿈은 올해 7월 산산조각이 났다. <블러디 머더>가 출간된 것이다. 그것도 매끄러운 번역으로, 엄청난 양의 유용한 부록과 함께.

▲ <블러디 머더>(줄리언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세상에 '독학'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떤 분야든 새로, 올바로 입문하기 위해선 그 권위를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득도한 경지의 스승이, 혹은 지금까지의 단계를 편견 없이 비교적 정확하게 정리해주는 참고서가 필요하다. 거기서 배움을 얻고 난 다음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호기심과 용기를 안겨주는 그런 지침서, 추리 소설은 '시간 때우기 오락거리'라고만 생각하던 이들에게 "그렇지만은 않다"라고 정면으로 말해주는 그런 지침서 말이다. <블러디 머더>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줄리언 시먼스는 이 책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해야 한다. 어떤 범죄 소설이 좋은지를 말하려면 어떤 것이 덜 좋은지, 평범한지, 형편없는지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연히 질문이 나올 법하다. 줄리언 시먼스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긴 한가? 그 이름 처음 들어보는데?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거의 번역된 적 없지만, 줄리언 시먼스 그 자신이 유명한 추리 작가이자 시인, 영문학사가이자 전기 작가로서 미국 추리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1990년에는 영국 추리 작가 협회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렬한 범죄 소설 탐독가이다.

시먼스는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했던 수수께끼 풀이에 치중하는 추리 소설 자체에만 집중하기보다 추리 소설의 형식과는 궤를 많이 달리 하는 하드보일드 소설과 스릴러 소설, 스파이 소설까지 포함하는 범죄 소설이라는 큰 범위 내에서 자신만의 계보를 만들어갔다. 즉 1794년 윌리엄 고드윈의 <칼렙 윌리엄스>부터 시작하여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등으로 이어지는 범죄 소설의 여명기부터, 애거서 크리스티와 도로시 세이어스, S. S. 반 다인 등의 추리 소설 황금기,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와 로스 맥도널드 같은 하드보일드 작가들, 이언 플레밍과 존 르 카레 등의 스파이 스릴러 작가, 엘모어 레너드, 토머스 해리스 같은 20세기 후반 범죄 소설 작가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폴 오스터 등의 '조커'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그는 범죄 소설이 어디까지나 '선정 문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독자들의 짜릿한 흥분과 관음증을 자극하는 그 선정성 너머에 분명히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뚜렷이 구별시키는 문학적 완성도가 존재한다는 걸 언명한다.

"(예를 들어) 르 카레와 스파이 소설이라 통칭할 만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다른 작가들 사이의 간격은 기발함이나 놀라움인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상력, 창조력, 단어를 실제로 종이에 적어 내려가는 능력에서 우열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 나는 순종 서러브레드와 그저 그런 말(馬)들을 구분하려는 비평은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비평가의 조건은 이토록 단순하면서 절대적이다. 많이 읽을 것, 많이 쓸 것, 그러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확고한 논거와 기준을 가지고 독자들과 작가들을 설득할 것. 시먼스가 이 책의 3판을 냈을 때 그는 이미 80세가 넘은 상태였다. 그 판단의 기준에 대해 믿고 따를 수 있는 노선배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즉 범죄 소설이 기발함과 놀라움이라는 태생적 조건 안에서 얼마나 풍성한 상상력으로 자가 발전을 거듭했는지를 설득하고, 범죄 소설이 '문학'의 한 분야라는 당연한 위치를 자리 잡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선배 말이다. (이 책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한국에선 지금까지도 "추리 소설이 무슨 문학이야"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

줄리언 시먼스의 기준에 따르면,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내가 심판한다>(박선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복수는 나의 것>(박선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등)는 최대한 칭찬해봤자 "후기작들은 적어도 내가 읽어본 것에 한해서는 초기작보다 덜 조잡하지만,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장 역겹고 심란한 점은 마이크 해머가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정도다. <본 아이덴티티>(최필원 옮김, 문학동네 펴냄)의 작가 로버트 러들럼에 대해서는 "조악한 필치와 한심할 때가 많은 소재 선택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러들럼의 책을 한 권도 끝까지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더 이상 자세한 발언은 하지 않겠다"라고 언명했고, <환상의 여인>(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의 코넬 울리치에 대해서는 "플롯은 멜로드라마처럼 한심하고 선정적일 때가 많고, 필치는 쉼 없이 새된 어조로 칭얼거리는 듯하여 나는 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겠다"라고 평가절하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시먼스 자체는 1994년 타계했으나, 그가 남긴 범죄 소설사의 경전에 반박하는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 참 재미있었어. 끝"이 아니라 왜 A 작가보다 B 작가의 글이 훌륭한지, C 작가의 이런 장점을 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지, 모두가 칭송하는 D 작가의 한계가 어떤 지점인지에 대해 글로서 토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는 다른 장르 소설들에 비해 범죄 소설 독자가 그나마 좀 많은 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들이 토론하고 대화하는 공개적인 장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블러디 머더>를 기점으로 범죄 소설 독자들도 더 큰 목소리로 자신만의 계보를 만들어가며 범죄 소설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장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다시 한 번, 줄리언 시먼스는 "<블러디 머더>는 읽고, 참조하고, 논쟁하고, 이유 있는 반박을 해야 할 책이다"라고 선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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