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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한 '그 놈'을 처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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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한 '그 놈'을 처단하라!

[김용언의 '잠 도둑'] 스티븐 킹의 <11/22/63>

데리, 살렘스 롯, 캐슬록.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이 낯선 세 단어로부터 끔찍하게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알아차릴 것이다. 메인 주에 있다는 가상의 도시들, 스티븐 킹이 자신의 소설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버린 공포소설의 성지, 악령과 나쁜 기억과 피에 굶주린 자들이 침대 밑에, 하수구 아래, 굴뚝 안에 숨어있는 곳.

이중 데리는 스티븐 킹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그것>(정진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의 핵심 공간이자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스티븐 킹의 최신작 <11/22/63>(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펴냄) 1권을 읽던 도중, 171쪽에서 "제가 데리로 건너갈 거라서요. 나중에 연락드리죠"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 틀림없이 '엇!'하는 신음을 내뱉었을 것이다.

분명 <11/22/63>의 홍보 문구에는 '만일 과거로 돌아가, 서거한 대통령을 살릴 수 있다면…세상은 더 나아질까?'라는 질문과 함께 '시간 여행을 다룬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는 찬사도 덧붙여 실려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나는 순진하게도 <11/22/63>이 시간여행 대체역사물일 것으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시라도 빨리 (케네디가 리 오스왈드에게 암살당한) 댈러스로 가야 할 주인공이 먼저 데리로 향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11/22/63>은 물론 시간여행을 중요한 축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스티븐 킹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역사는 결코 과학소설의 정밀한 합리성이나 경이로움, 혹은 판타지소설의 눈 휘둥그래지는 설정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낯선 이를 병적으로 두려워해야만 하는 토박이들이 묵묵히 운명을 견디는 곳, 아내와 아이와 또 다른 소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사내들로 가득한 현실적인 지옥 자체다.

얼마 전 알코올 중독자 아내와 헤어진 영어교사 제이크 에핑은 고졸 학력 인증 준비반 학생들에게 숙제를 주었다. 주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 그리고 '두꺼비 해리'로 불리는, 늘 다리를 절고 정신지체인처럼 보이던 학교 수위 해리 더닝의 리포트를 읽고 그는 충격에 빠진다. 해리는 50여 년 전, 그러니까 그가 10살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해머를 휘둘러 어머니와 여동생, 두 명의 형을 살해한 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유일한 생존자였다. '목석 같은 인간'이었던 제이크는 그 글을 읽으며 울었다. 그는 그때 전혀 몰랐다.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던 그 모든 이들이 그 눈물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

▲ <11/22/63>(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얼마 후 음식점 '앨스 다이너'의 주인 앨이 제이크에게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다. 앨스 다이너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창고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토끼굴' 터널 입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원하는 곳이 아니라 특정한 날짜, 1958년 9월 9일로만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앨은 묻는다. "자네, 분수령이라는 단어 알지?" 그리고 재차 그 어원이 '지도'에서 나왔음을 상기시킨다.

"육지, 대개는 산이나 숲이 강물과 연결되는 곳을 분수령이라고 하거든. 역사도 강물이라 할 수 있잖아. 안 그런가? (…) 광범위한 사건이 역사의 변화를 초래할 때도 있지. 분수령 전역에 장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는 것처럼. 하지만 쨍쨍한 날에 강물이 넘치기도 해. 분수령의 일부 지역에 장기 폭우가 쏟아지면, 역사에도 그런 식의 집중 호우가 퍼부은 적이 있잖아. 예를 들어 볼까? 9.11사건은 어떤가? 아니면 2000년 대선 때 부시가 고어를 이긴 것은?"

그러니까 앨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미국의 현대사를 갈갈이 찢어놓은 문제의 그 사건, 미국인이라면 2001년 9월 11일만큼이나 결코 잊능 수 없을 날짜, 1963년 11월 22일을 '바로잡는다면', 이후의 미국도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제이크, 자네가 역사를 바꿀 수 있어. 알겠나? 존 케네디를 살릴 수 있다고."

제이크는 폐암으로 죽어가는 앨 대신 그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결심을 내리는 데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세우겠다는 정의감이 작용했다기보다…제이크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해리 더닝의 비극을 먼저 막겠다는 생각이 컸다. '토끼굴'을 나가면 1958년 9월, 그리고 해리의 사건은 1958년 10월 말 할로윈에 벌어진다.

"1958년 10월. 그게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앨은 경고했다. 그동안 무수히 '토끼굴'을 드나들면서 느낀 건, "과거를 바꿀 수는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는 거야. 그날 아침에 나는 나일론 스타킹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듯한 심정이었어. 살짝 헐거워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철썩 들러붙어 내 몸을 조이더군. 결국에는 찢어버릴 수 있었지만. (…) 과거가 달라지지 않길 바라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라는 사실이다.

앨의 경고가 맞았다. 토끼굴을 통과해 어린 시절 해리가 살았던 마을 데리로 향하는 제이크는 계속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묘하게 아귀가 틀어진 듯한 이물감이 계속 그를 괴롭히고,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사물이나 사람이 이후에도 계속 모습을 바꿔가며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 '화음'을 조성할 때, 그러니까 제이크가 1958년에 뛰어듬으로써 원래 1958년의 질서가 살짝 흐트러졌지만 어떻게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어떤 '흔적들'이 개입하면서 제이크를 지속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화음을 좋아하고, 주로 악마의 음악을 만든다."

여기에 두 가지 변수가 끼어든다. '토끼굴' 앞을 늘 지키고 있는 부랑자, '옐로 카드맨'은 제이크가 두 번째로 토끼굴을 빠져나올 때 외친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잖아! 당신 뭐야!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꺼져, 이 짐라야!" 짐라. 그것은 이후 5년 동안 과거에서 생활하는 제이크의 뒤를 좇는 사악한 주문이 된다. 두 번째 변수는 새디 던힐이다. 강박증적인 전 남편에게 학대받았던 아름다운 여인, 제이크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마는 강력한 변수.

<11/22/63>은 스티븐 킹의 <그것>과 피터 스트라우브의 <고스트 스토리>(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 아주 범상한 표정으로 타임머신을 합해 놓은 것 같은 놀라운 대체역사물이다. 해리 더닝의 아버지 프랭크, 그리고 존 F 케네디의 암살범 리 오스왈드, 새디의 전 남편 존은 모두 가정폭력범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은 빈민가든 명문가든 다반사였고, 이웃집들은 그 광경을 보거나 소리를 들어도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예의였던 시절이다.

"1958년이나 985년이나 2011년이나 마찬가지였다. 겉을 보고 속을 판단하는 미국 사람들은 프랭크 더닝 같은 남자들이 하는 말을 믿게 되어 있었다."

총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알코올 중독이나 병적인 심리상태에 대한 연구도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으며, 코앞에 들이닥친 위험신호를 잘 파악하지 못하던 순진한 시공간이다. 하수구에는 아이의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고, 팔 한 쪽이 잘린 채 살해당한 아이가 벌건 대낮 사거리 한복판에 버려져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이크는 데리에서 리 오스왈드의 거울상과도 같은 프랭크와 대결하면서 일종의 시범 경기를 펼치는 셈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데리의 악몽을 몇배로 더 확장시킨 듯한 끔찍한 인종차별과 폭력의 도시 댈러스에서 그는 죽은 프랭크 더닝의 보복과, 정확하게는 역사의 복수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그 안에는 데리가 있었을 것이다. 데리의 이상한 모든 것, 데리의 삐딱한 모든 것들이 그 굴뚝 안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동면하고 있었을 것이다. 힘든 시절은 끝났다고 사람들을 호도하면서, 그들이 긴장의 끈을 늦추고 힘든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길 기다리면서."(그리고 이것은 명백하게 <그것>의 결코 잊을 수 없는 악의 구현체, 피에로였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까 제이크가 데리에서 '뭔가'가 숨어있는 버려진 공장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처럼, 대체역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던 앨의 열망 역시 어쩌면 선의로 포장되어있으나, 데리의 주민들을 숨 막히는 불신과 적의로 몰아넣었던 악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인다면, 이건 개인 힘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그런 종류의 체념이 아니다. 선의로 가득한 어리석은 희망을 비웃거나 정의를 비교적 '손쉽게' 이뤄낼 수 있다는 악마의 제안에 몸서리치는 도덕적 결벽증도 아니다.

"한심한 떠돌이를 한 명 없애면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어"라던 희망은, 대체역사물의 규칙상(대체역사물의 모든 전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곧 '또 다른 한심한 떠돌이'의 등장을 예고한다. 리 오스왈드라는 단 한 명의 '나비'만 없애고 나면 모든 방향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건 '나비 효과'에 대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역사는 어떻게든 전쟁과 살육의 비극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뒤틀린 지도자들은 그만큼 많으며, 리 오스왈드를 대체할 미치광이들도 헤아릴 수 없다.

다만 대부분이 최악이며 아주 일부만이 그나마 차악인 매일매일이 역사를 이뤄가는 순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에라도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순 있다. 폭력의 유전을 어떻게든 끊어내면서,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옴으로써,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올바른 방향의 삶을 지향하면서, 공포가 자신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노력함으로써 나비의 날개짓의 방향을 바꿔놓을 순 있다. '분수령'과는 상관없는 사소한 삶일지 몰라도, 작은 구릉들은 어떻게든 그 분수령에 파동을 보내게 마련이다.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타란티노는 우리 모두가 늘 간절히 염원했지만 감히 실현시키지 못했던 그 욕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현시켰다. 히틀러를 영화 속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만세! 히틀러가 죽었다! 제2차 세계 대전도 종식시킬 수 있다! 어차피 판타지인데 왜 우리 마음대로 못해! 그럼으로써 그는 대체역사물의 원칙을 어겼다. 과거는 어떤 자정작용을 통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시간의 흐름과 인과관계 법칙은 깨질 수 없는 전제라는 원칙 말이다. 다만 영리하게도 히틀러의 죽음 '이후'까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최후의 함정을 피해나갔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그 함정과 정면 승부를 걸었다. 실제로 오스왈드의 저격을 막는다면? 케네디가 살았다면? 불협화음을 좋아하지 않는 역사는 어떤 식으로 자신만의 조화를 찾아낼까? 그리고 그 해결책은 기가 막히고 더없이 아름답다. 당신이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더라도, <11/22/63>의 제이크가 프롤로그에서 해리의 리포트를 읽으며 울었던 것처럼, 이 책 에필로그에 묘사된 평화로운 재회의 순간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스티븐 킹도 꽤나 '화음'을 좋아하는 것 같다.

PS1. 얼마 전까지 <11/22/63>은 <양들의 침묵><필라델피아>의 조너선 드미 감독이 영화화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방대한 규모의 원작 소설에서 영화 소재들을 취사선택하는 부분에 있어 스티븐 킹과 생각이 많이 어긋났고, 급기야 12월 6일 이 프로젝트에서 조나단 드미는 물러났다. 이후 새롭게 물망에 오른 연출자의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았다.

PS2. <11/22/63>의 원래 결말은 현재의 결말이 주는 아련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궁금한 분들은 스티븐 킹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원래 결말 부분을 읽을 수 있다(☞바로가기). 출간 직전 설득 끝에 결말을 바꾸게 한 주인공은 스티븐 킹의 아들이자 그 자신이 유명한 공포소설 작가인 조 힐(<뿔>(박현주 옮김, 비채 펴냄), <20세기 고스트>(박현주 옮김, 비채 펴냄))이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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