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과 손석춘이 만나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 사람은 철학 교수에서 농군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언론인에서 교수가 되어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연배로는 거의 20년 차이지만, 이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는 격의가 없다. 이야기의 강물은 그렇게 거침없이 흘렀다.
윤구병은 70 고개를 넘었다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의 열정과 젊음을 지녔다. 게다가 좌중을 포복절도시킬 농과 풍자가 파도처럼 넘친다. 변산에서는 농사를 짓고 경기도 파주에서는 보리출판사를 꾸려나가는 그에게 화두는 늘 "생명"이다. 좋은 농작물과 좋은 생각을 먹이는 것이 곧 사람을 위한 길이요, 세상을 위한 길이라는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가 농사와 출판을 동시에 감당해나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쉬운 우리말의 힘
▲ <노동 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 농부 윤구병과의 대화>(손석춘·윤구병 지음, 알마 펴냄). ⓒ알마 |
"지금 우리말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말들, 꼭 삶에 필요한 말들이 전부 없어지고 힘 있는 나라들의 말이 득세하고 있어요. 세 나라 시대(삼국 시대)부터 힘 있는 사람들이 더 힘 있는 중국에서 말을 들여와 우리말 질서를 다 흩뜨려놓고 우리의 섞임이 없는 정말 쉽고 소중한 말들을 다 없애는데 큰 몫을 했잖습니까?"
그가 예를 든 지명을 보자면 가령 이런 식이다.
"흑석동은 바위가 톡 튀어나와서 한강이 감아 도는 데거든요? 그래서 감은돌이, 물이 감아서 도는 곳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먹물들이 듣기에는 '아, 검은 돌? 검을 흑(黑), 돌 석(石)이네?' 그래서 감은돌이가 흑석동이 되었어요. 그런데 한강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뒤에 감은돌이 또 나와요. 마포 지나면, 앞선 것을 흑석동이라 했으니, 또 흑석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검을 현(玄)자를 붙여서 현석동이라고 하거든요. 흑석동이나 현석동 같은 말을 들을 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어요?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게 들어간 예에는 "바람들이"를 풍납동이라고 한 것, "모래내"를 사천이라고 한 것 등도 있다. 한마디로 "말길"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시골의 까막눈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구체성을 가진 말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정치도 경제도 민주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특권을 지닌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월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체 혁명이 필요하다
결국 이 말은 사회 혁명이 일어나기 전 문체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루쉰이 중국에서 한 게 문체 혁명이잖아요?" 유럽의 식자들에게조차 괴테나 단체, 밀턴에 비해 2급 작가로 평가절하 되고 있는 빅토르 위고에 대해 윤구병은 단호하게 옹호한다.
"실제로 사회 변혁에 가장 직접적인 충격을 준 사람, 그리고 끝까지 혁명 편에 선 사람은 빅토르 위고거든요. 그 빅토르 위고가 죽었을 때 200만이 넘는 파리 시민이 나와서 애도를 했다고 해요."
프랑스의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역사의 심장을 파고 든 거작을 남긴 빅토르 위고의 면모를 그는 높이 사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과 관념적 논리에 익숙한 철학자로 지내온 그가 흙과 생명의 세계 속에서 건져 올리는 삶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그는 농사의 가치를 절절하게 설파한다.
"지금 건강한 생산 영역 가운데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 농업입니다. 농촌은 평화의 근거지이자 생명의 뿌리이지요. 말하자면, 우리 목숨을 지키는 겁니다."
우리 목으로 드나드는 숨을 목숨이라고 하지 않느냐면서, 이 목숨을 지켜내는 정치와 경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걸 위해서는 노동 시간을 줄이고 농촌을 살리는 것이 정치의 근본 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는 이걸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이고 있다. 당장에 그가 책임을 지고 있는 보리출판사는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임금을 줄인 것도 아니다. 그는 장시간의 노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면서, "적게 일하고 느리게 살고 적게 소비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면서, "그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가치"에 눈뜨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도대체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이웃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그는 낙산 산꼭대기 판잣집에서 사는 가난한 시절을 거쳐, 대학에 들어가 프랑스어, 독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원전 읽기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학문적 지식을 과시하는 논문 쓰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남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것을 요구할 뿐, 자신의 생각을 독자적으로 펼쳐나가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말의 소중함에 대해 주목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생각에서 나온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하방의 가치
이건 우리 학계나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독자적인 생각은 책을 자신의 생각으로 읽고, 삶의 현장과 엉켜 나오는 것이라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문화 혁명이 오늘날 비판받고 있지만, 현장에 내려가 민중과 하나가 되는 "하방(下方)"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도시에 있는 젊은 사람들을 적어도 3분의 2에서 절반 정도는 시골로 내려 보낼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식량 자급이 없는 자주 국방이 어디 있고 자치 정부가 어디 있어요?"
"하방 당해서 농사 직접 짓고 조그만 공장에서 용접하고 철판 두드리고 그랬는데 어떤 사람은 10년 후, 어떤 사람은 8년 후, 또는 5년 후에 돌아와서 다시 학교에 다녔어요. 지금 중국 공산당의 중추 세력이 모두 이 사람들입니다. 하방 당했던 사람들이지요. 지금 중국이 빈부 격차가 엉망으로 커지고 부패도 심해지고 있지만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괴물을 굴리면서도, 그래도 미국과 맞서겠다고 저렇게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의 현장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먹물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래서 윤구병은 "먹물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면 교육에서 이를 어떻게 하면 해결되는 것일까? 그의 답은 명료하다. 머리 쓰는 시간을 하루에 세 시간 이하로 줄여야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자연에서 배우고, 사람에게서 배우고 현장에서 배워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철학을 가르쳤던 그는 예를 들어 "존재", "무"와 같은 개념으로 철학의 주제에 다가서지 않는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우리말로 그의 생각을 푼다. 이걸 누가 못 알아듣겠느냐는 것이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없을 것이 있으면 그거 없애야 하잖아요. 그런데 없을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기 이권 챙기기를 가장 잘하며 잘 살아남는 사람들은 그중에서 하나만 건드리려 해도, 없애려 해도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는단 말이죠."
이런 현실에서 그가 보는 오늘날 강단 철학은 살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 팔아먹으면서 존경 받는다"고 신랄하게 꼬집는다. 정작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없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뜻일 게다. "사는 것이 먼저고 철학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인용하면서, 윤구병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맑은 물, 맑은 공기, 건강한 땅을 회복시켜 사는 일을 소중히 여길 것을 힘주어 말한다.
바람둥이 윤구병
그는 우주도 있고 하느님도 있겠지만, 목숨이 붙어사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도 가장 고마운 것은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이 불어 숨을 쉬고, 그 숨이 들락날락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니 말이다. 바람이 하도 좋아 그는 "평생 바람을 몰고 다니고 바람둥이로 살리라 생각해요"라고 대담자 손석춘을 웃긴다. 그러자 손석춘이 정색을 하고 묻는다.
"선생님은 말씀만 그렇게 하시는 것 아닌가요? 실천은 하셨어요?"
"유명한 바람둥이죠. 지금 여기다도 이 분(알마출판사 편집장)에게 드리는 책에다가 사랑 고백했지 않습니까? 사랑한다고."
이러면서 파안대소하는 윤구병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 여자밖에 없어요"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한다기보다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다. "여친"을 몰고 다니는 윤구병이다. 나이 칠십에 농사꾼이요, 꽃미남도 아닌 그를 여성들이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하니 도대체가 그 존재로서 매력덩어리인 사람이다. 인간적 흡인력이 강한 이다.
그와 만나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흥이 절로 나고, 수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남자들도 한없이 끌리는 남자다. "욕정 없는 사랑도 사랑이냐"라면서 "설령 사랑해서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져야 할 책임이지, 그것을 누가 어떻게 법적으로 통제하느냐"고 한 그는 사랑의 자연스러움을 가로막는 일체의 법적, 제도적 장치에 못마땅해 한다.
나투라 나투란스 나투라 나투라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랑의 책임과 윤리, 그리고 사랑의 자연스러움이 서로 얽혀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고뇌와 모순, 그리고 욕정과 갈망 등이 그의 생각 안에서 어떤 질서와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지 기회가 되면 묻고 싶어졌다. 자연의 사람인 그에게 사랑은 도대체가 어떤 무한대의 영역으로 펼쳐져나가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us) 나투라 나투라타(natura naturata)"라는 말을 그는 좋아한다. 일본인들은 이를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소산적 자연(所産的 自然)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는 이걸 누가 제대로 알아듣겠느냐고 비판한다. 그래서 나온 그의 번역은 앞의 것은 "자연스럽게 하는 힘", 그러니까 저절로 하게 되는 힘, 그리고 뒤의 것은 "그 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바로 이 자연스럽게 절로 이루는 힘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사회, 교육, 환경, 인간관계가 그 생각과 삶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사랑도, 교육도, 정치와 경제도 그리고 문화와 예술도 모두 이런 흐름을 타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구병의 "변증법 노래와 춤"
지난 주 어느 날 밤 나는 고개를 여럿 넘으면서 윤구병, 영화감독 정지영, 서울시 교육감 후보 이수호와 함께 화천 이외수의 감성마을 모월당(慕月堂)에서 주인 이외수와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윤구병은 "변증법"을 일깨워주겠다면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가사 전체는 기억나지 않지만 핵심 대목은 이랬다.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색시가 조오타, 그러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막걸리를 따라주는 색시가 좋더라."
어깨춤을 들썩들썩하면서 윤구병이 부르는 이 노래에 좌중이 배를 잡고 넘어진 것은 물론이다. 막걸리는 따르는 색시가 좋은 까닭이 뭐겠는가? 기분 좋게 아름다움에 빠져보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있을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는 현실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취흥에 젖어 한판 잔치를 벌일 것이다.
정녕 바람이 불면 좋겠다. 바람을 몰고 다니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더욱 좋겠다. 절로 춤을 추고 싶은 그런 날들이 오면, 우리는 오랜 수도자가 득도한 기쁨으로 "나투라 나투란스 나투라 나투라타"하고 주문을 외울지도 모르겠다. 하고 보니 인도의 고행자가 하는 외우는 주문 같기도 하고, 그 어조는 "수리수리 마하수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높은 곳의 큰 뜻이 우리가 사는 땅에 내려와 저절로 술술 풀리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아, 부디
이 2012년 12월이여,
나투라 나투란스 나투라 나투라타
수리수리 마하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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