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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우는 이유, 여자와는 달라!

[김용언의 '잠 도둑'] 필립 K. 딕의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

1988년 10월 11일 화요일. 3000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유명 가수 제이슨 태버너는 우생학 실험의 결과물인 '식스'다. 일반인보다 노화가 느리고 복원력이 빠르며 뛰어난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 모두의 열광적인 사랑과 숭배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존재. 그러다가 제이슨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신분증은 물론 출생 기록까지 감쪽같이 사라졌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만져보려 안달하던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경찰과 중앙 정부가 모든 사람의 정보를 관리하며 사상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독재 사회에서 '존재의 증명'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강제 수용소행을 뜻한다.

궁지에 몰린 제이슨은 신분증을 위조하지만 곧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치안감 펠릭스 버크먼은 이 사건에 강한 흥미를 보이며 제이슨이 반사회 세력을 등에 업은 위험 인물이 아닐까 추측한다. 제이슨 태버너는 기존의 유명 가수 시절 받던 관심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살인 사건도 벌어진다.

'한 번 열었던 파일을 완전히 도로 덮어버리는 일은 없군.' 제이슨은 문득 깨달았다. 일단 한 번 주목을 받았다 하면, 두 번 다시는 무명의 존재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필립 K. 딕 지음, 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펴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주인공의 불안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펴냄)이나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가 그렇듯.

그리고 존재를 입증할 수 없음에는 위에도 설명한 그 모순점이 존재한다. 모두가 잘 알고 있던 연예인은 정부와 경찰의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었으나, 순식간에 무명의 존재로 뒤바뀌면서 그는 국가 안보에 위협을 미칠 만한 구체적인 위협으로 설정된다. 태버너는 기존의 유명세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아무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지 못할 '무명'을 획득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필립 K. 딕 지음, 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펴냄). ⓒ폴라북스

한편, 버크먼은 "내가 왜 굳이 태버너를 찍었을까? 지구상에 살아가는 60억 명 중에서 왜 유독…이 한 사람인 걸까"라고 자문하고는 곧 답을 찾는다. "당신이 사실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질지도 몰라.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러나 눈에 띄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살인 사건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될 누군가가 필요했고, "우리는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는 가운데 "제이슨 태버너의 역할은 결국에 가서는 크고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의 몸속에 들어있는 어떤 비합리적인 의지 때문에, 그는 나타나기로, 눈에 띄기로, 세상에 '알려지기로' 작정한 거야." 버크먼은 그렇게 '강력하고, 불가결하고, 즉각적'으로 확신한다.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는 필립 K. 딕의 후기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사실 과학 소설(SF)로서의 설정 자체로만 보면 허점이 꽤 존재한다. 제이슨 태버너가 이틀 동안 무명의 존재로 살아야 했던 근거가 밝혀지는 부분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간략하게 한 줄 요약하자면 일종의 평행 우주들 틈새에 느닷없이 끼어들게 된 것인데, 옮긴이 박중서의 해설에 다르면 이 '설득력 없는 정당화'를 두고 비판하는 입장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SF 설정의 치밀함과 정묘함을 시시콜콜 따지지 않아도 되는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끝내주게 재미있다. 마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빅 슬립>에서 수많은 이들이 각각의 살인범 손에 죽어나가고 'A는 B가 죽였고 C는 D가 죽였고…'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엔 헛갈려버리며 두 손 들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 슬립>이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사실에 변함없는 것처럼 말이다.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의 흥미로운 지점은, SF 설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주인공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게 오히려 정서라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슬픔'. 소설이 진행되면서 총 세 명,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경관' 펠릭스 버크먼)이 운다.

제이슨의 연인이며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식스' 동료이자 냉담하기 짝이 없던 헤더 하트는 제이슨이 죽을까 두려워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일반적인 연인의 슬픔이다. 제이슨에게 신분증을 위조해주는 캐시 넬슨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편이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을 뿐이며 자신의 삶이 저열하고 비참하게 배신으로 점철되는 건 오로지 남편의 석방을 위한 수단이라는 거짓 환상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간다. 누군가 그 가상의 현실을 냉혹하게 뒤흔들 때마다 그녀는 다시금 정신 분열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울음을 터뜨린다. 눈물은 그녀를 압도적인 현실로부터 지켜주는 일종의 장막이다.

한편, 예전에 제이슨 태버너가 데이트를 즐겼던 루스 레이의 경우 직접적으로 울진 않지만 눈물과 슬픔에 대해 제이슨 태버너와 기나긴 토론을 벌인다. 이 부분이야말로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의 핵심적인 장이기도 하다. 마치 <몰타의 매>(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서 탐정 샘 스페이드가 사건의 전개와 동떨어진 플릿크래프트라는 남자의 과거를 느닷없이 읊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순간이듯 말이다.

"슬픔이라는 건 어른이든 아이든 동물이든 간에, 모든 생물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에요! 그건 '좋은' 느낌이라고요. (…) 그것은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거예요. 따라서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경험이죠. 가끔은 나도 우리가 그런 일을 거뜬히 견디도록 구축되지는 않았다고 확신해요. 그건 너무 끔찍하니까요.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을 겪으면 당신의 몸은 거의 자체 파괴에 이르고 말 거예요. 하지만 나는 슬픔을 겪기를 '원해요'. 눈물을 흘리기를 말이에요."

"어째서죠?" 그로선 차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회피해야 마땅한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면, 우리는 최대한 빨리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루스가 말했다. "슬픔은 당신과 당신이 잃어버린 것, 이 두 가지를 도로 합쳐주니까요. 그것은 합체에요. 당신이 사랑하는 물건, 또는 사람이 가버리면, 결국 당신도 함께 가버리게 되죠. 어떤 면에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나누어서 그 가버린 것과 동행하는 거예요."

그리고 펠릭스 버크먼의 눈물이 있다. 갑작스럽게 울게 되는 남자, 그 스스로도 울음 자체를 아예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 얼굴에 뭔가 흘러내리는 걸 깨닫고 더듬어보니 턱이 젖어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지금 내 얼굴에 이게 뭔가?"라고 묻자, 그의 비서는 "지금 울고 계십니다"라고 가르쳐준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다음에야 처음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버크먼에게 공포와 알 수 없는 신비로 다가온다.

왜 남자가 울어야 할까? 그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는 달라. 그것 때문은 아니야. 감상 때문만은 아니라고. 남자가 우는 것은 뭔가를 상실했기 때문이야. 살아있는 뭔가를. 남자는 아픈 동물 때문에 울 수 있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의 죽음. 남자는 그 때문에도 울 수 있어. 하지만 단순히 뭔가 슬프기 때문에 울지는 않아.

남자는. 그는 생각했다. 미래나 과거를 놓고 우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현재를 놓고 우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이 현재인 걸까?


그리하여 소설 말미에 이르면 사실상 제이슨 태버너의 '사라진 존재' 사건은 거대한 맥거핀에 불과하고, 그 전엔 단 한 번도 울어본 적 없었던 치안감 펠릭스 버크먼이야말로 소설의 중심으로 재등장한다. 어떤 여정을 거치는 가운데 전혀 다른 차원을 경험하며 바뀌어가는 과정이 소설 주인공의 주요 조건이라고 전제한다면, '비존재'에서 다시금 '존재'로 넘어가려는 제이슨 태버너의 노력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변화 없는' 과거로의 회귀다.

하지만 펠릭스 버크먼은 단 이틀 동안 온 생애가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그는 언어와 음악을 사랑하고, "경찰관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경찰관일 수 있었으며, "비합리적이지만 아름답게 작동하는 육감"에 따라 수수께끼의 핵심으로 바로 파고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질서와 구조와 조화와 규범"이 더럽게 중요하기 때문에 경찰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순된 남자였다.

'저 곳'에서 '이 곳'으로 뛰어 들어온 제이슨 태버너와 조우한 뒤 비로소 자신이 신봉했던 규범을 깨뜨리고, 배신과 거짓이 자신의 위장막이 될 수 있음을 깨달으며, "나는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버크먼은 '화살에 꿰뚫린 하트'를 타인에게 내보일 수 있게끔 변화한다. 버크먼은 더 이상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서 음악과 문학을 바라보지 않고, 음악과 문학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겸손하게 구하는 데 이른다.

제이슨 태버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울지 않는다. 자기애가 강하고 생존 본능에만 사로잡힌 그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제이슨 태버너는 "여자에 관해서라면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사랑이 그렇게 좋은 이유"가 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이며 앞으로도 특권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을 것임을, '일반인'이 겪는 고난과 그들이 격정에 함몰되곤 하는 경향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확신한다.

그는 이들이 여기 사로잡혀있을 뿐이라고 간주했다. 일반인들이 여기 계속 남아있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곳을 발명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이곳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이곳을 참아낼 뿐이었다. 일찍이 그 역시 참아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는 이들의 굳은 얼굴이며 축 늘어진 입매를 바라보며 오히려 죄의식을 느꼈다. 일그러진, 불행한 입매였다.

그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에 격한 분노와 권태를 느끼고 "합리적인 반응은 전혀 먹히지가 않"는 "비논리의 끔찍스러운 힘"을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10월 11일 화요일 자신이 진행하는 쇼 생방송을 정확하게 마쳤다고 생각하지만 평소보다 30초 분량이 모자랐던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자신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주변 세계가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어긋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비존재'가 되어버리는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상황에 빠져버리지만, 그는 사실상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합리적인 존재다. 태버너는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의 눈물과 히스테리와 집착과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루스 레이가 들려주는 '고양이를 사랑한 토끼의 야심과 실패'의 사례도 이해하지 못한다. 오랜 시련 끝에 다시 원래의 유명 가수 제이슨 태버너로 돌아왔음을 깨달았을 때 그가 내뱉은 말, "잘 있어요. 우리는 완전히 실패했어요. 우리 둘 다요"라는 것은 어쩌면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유감스러워하거나 회한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 '실패'가 성공가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SF 작가'라는 별칭답게, 필립 K. 딕의 소설은 자주 영화화됐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 <컨트롤러> 등 스크린으로 주로 필립 K. 딕의 이름을 접했던 독자라면 현란한 비주얼과 팽팽한 긴장감, 기발한 착상 등에 익숙해져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은 좀 당혹스러운 작품일 수 있다.

이것을 영화로 옮긴다 한들, 격렬한 추격신이나 신기한 미래 풍경은 끼어들 틈이 없다. 오히려 서정적이고 슬프며 마지막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만이 충만하다. 스포일러를 우려하여 자세하게 적진 않겠지만, 한밤중 텅 빈 주유소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끼리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간질거림이나 쑥스러움 없이 있는 그대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이 책 곳곳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곡가 존 다울런드의 투명한 곡 '흘러라 내 눈물'을, 책을 읽는 내내 되풀이 재생시켜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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